대하소설 「신불산」(476)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26장 언양어장 열찬씨⑥
대하소설 「신불산」(476)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26장 언양어장 열찬씨⑥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3.05.23 06:00
  • 업데이트 2023.05.22 11: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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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언양어장 열찬씨⑥

그렇게 눈치로 삼십 년이 넘게 부부생활을 지탱한 남숙씨는 이제 완전히 지쳐버려 천형씨가 말을 걸 때가 아니면 좀체 말을 걸지 않았고 생활비를 달라고 모처럼 말을 섞고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 같은 식탁에 앉아도 외면한 채 조용히 밥을 먹는 것이 어쩌면 그렇게 모전여전 어머니를 닮은 팔자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처남 남근씨는 달랐다. 어릴 적에 부모대신 학비를 대준 고마운 매형이기도 했지만 이제 자신도 선원이 되고 성년이 되니 같은 뱃사람인 매형이 더욱 살가운 점도 있어 귀향할 때마다 양주와 양담배를 사와

“자영요! 오늘은 코가 비뚤어지도록 한 잔 하입시다.”

하며 취할 때까지 마시다 노래방을 가기도 했는데 어쩌다 열찬씨가 합세하면

“아이구, 우리 매제 이서방! 시인 매제가 나는 좋더라!”

하면서 반색을 했다. 어떤 때 천형씨가 마구로라 불리는 커다란 참치를 꽁꽁 언 채로 가져오면 일일이 손으로 썰어 쟁반에 담으면

“매제 어서 잡수소. 혹시 비아그라 필요하면 말만 하소.”

하다 남숙씨와 영순씨가 쌍권총으로 눈총을 보내도 껄껄 웃으며 마시다 취하며 다섯 살이나 많아 머리가 허연 열찬씨가 손아래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자, 자영 한 잔 하이소!”

손위대접을 하다 껄껄 웃기도 했고 여자들이 없으면 사내 셋이 어깨동무를 하고 한복 입은 아가씨가 치맛자락을 잘잘 끄는 양정시장의 요상한 방석집으로 가서 밤새 퍼마시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그 마도로스처남이 고기잡이에 따라나섰는데 역시 핏줄을 무시할 수 없는 건지 단번에 재미를 붙였다. 건강한 사내인 만큼 갯버들가지나 찔레덩굴이 우거진 풀 섶도 겁내지 않고 엔간한 돌덩어리도 발로 밀어젖히면서 밟아대니 어획량도 많아졌다.  웅덩이의 깊은 물에 열찬씨와 함께 큼직한 메기나 손바닥만 한 붕어나 메기도 잡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어로장 열찬씨보다도 정작 더 신이 난 사람은 바로 그의 매형인 천형씨였다. 같은 매운탕안주라도 둘이 마시는 것보다는 셋이 둘러앉는 것이 훨씬 분위기도 좋고 술도 잘 넘어가기 때문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5대양육대주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이 중년의 마도로소는 공교롭게도 어는 서양인 못 지 않는 거대한 코를 가지고 있어 세계 어느 항구에 입항해도 누구하나 왜소한 동양인으로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당당했다고 했는데 비단 그런 외모 뿐 아니라 술이 한잔 들어가면 세상이 마치 자기 손바닥에 있는 것처럼 큰소리를 탕탕 치며 

“자, 한 잔 합시다! 한번 와서 한번 가는 인생살이 거 뭐 특별한 거 있나!” 기분을 팍팍 내는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밭두렁에 서서 바람에 흔들리는 허수아비 같은 복장으로 도랑바닥을 박박 기던 사람들이 어느새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은 멀끔한 모습으로 언양읍의 노래방에서 천연스럽게 춤을 추기가 일쑤였다. 어떤 때는 물에 젖은 옷을 입은 채로.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출근한 월요일 오전에

“매제!”

열한 시가 채 되기 전에 전화를 해

“어제 떡이 되도록 마셨는데 속 안 아풍교? 복국 사드리까?”

묘한 말투, 촌수는 높고 나이는 작은, 마치 운동경기에서 1승1패 무승부를 이룬 사람의 말투처럼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는 어조로 말하면

“그래볼까? 지금 어덴데?”
“구청앞, 초대다방!”

선택의 여지가 없어 다방으로 나가면 홀 한가운데에 떡 버티고 자리를 잡은 그는 마담은 물론 다방아가씨 전부를 불러 앉히고 가장 비싼 차를 한 잔씩 사주면서 마치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고 귀항한 콜럼버스처럼 거만한 자세로 거드름을 피우다가

“아, 시인님, 우리 매제 가열찬시인님!”

커다랗게 소리쳐 무안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첫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를 낸지 얼마 후 귀국한 그는 열찬씨의 시집을 보고 매제의 출판기념회에 참석 못 한 것이 미안하다며 얼마간의 돈이 든 봉투를 건넨 것도 모자라 술을 한 잔 산다며 노래방으로 데려가

“아, 우리 시인님! 내가 죽은 김소월이 아니고 살은 가열찬시인을 다 만나다니!”

일부러 커다랗게 소리쳐 도우미아가씨들에게 민망해죽을 판이었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남은 시집을 있는 데로 달라더니 무려 스무 권이나 들고나가 해양고등학교 출신 동창생이나 같이 배를 타던 선원은 물론 다방마담, 찻집주인, 술집주인, 하다 못 해 곱창구이나 복국 집 주인에게도 돌리고 다녔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나면

“매제, 내 친구들 좀 만나고 올께. 저녁에 시간은?”
“몰라. 공무원이 어데 시간장담을 할 수가 있나? 하루하루 무슨 일이 생길지.”
“씰데 없는 소리 대한민국에서 제일 칼 같은 6시 땡 퇴근이 공무원밖에 더 있나?” 

하고는 다섯 시도 못 되어 전화를 해서 

“매제! 여게 와 자갈치 제주도곰장어집 있제? 내 잘난 시인매제 기다린다고 벌써 한 시간이나 되었다. 대가리 하나 앞세우고 살살 함 나와 보소.”
“땍! 나이 많은 매제 보고 대가리를 앞세우라니?”
“거 손위처남한테 말이 많네. 잔소리 말고 빨리 오소. 내 절세미인을 하나 붙여주께.”
“대끼! 자기 여동생남편한테 여자를 붙여주는 사람이 어딨노? 영순이한테 일러준다이.”
“무슨 소리. 세상에 사촌처남남매만금 같이 술 묵기 좋고 오입하기 좋은 사이가 어딨노? 사촌처남남매끼리 만나서 술 한 잔도 안 하고 헤어지면 그건 인간도 아이다 아이가?”
“아이고 이 더러운 화상아.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하고 약속장소로 나가면 거의 매번 낯선 여자 한둘을 데리고 나오는 것이었다. 처녀나 유흥업소종업원 같은 사람도 있었고 부끄러워 말대답도 잘 못 해 아무리 봐도 가정주부 티가 물씬 풍기는 사람에 화장이나 옷차림, 말투가 닳고 닳은 장사꾼이나 술집이나 다방의 마담 같은 사람도 있었다. 

문제는 누가 보든 말든 그 모든 사람들과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해 이미 친해도 깊숙이 친한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이 너무나 빤 한데 도대체 그 많은 사람을 어느 사이에 사귀었는지가 궁금해 여자가 화장실에라도 간 틈에 물어보면

“두 시간 전에 만나서 한 시간 전에 갈 데까지 갔지. 조선여자고 서양여자고 뭐 항구에 여자가 별 여자가 있나?”

하면서 주먹만 한 코를 쓰윽 훑어 내리는 것이었다. 마치 버든 마을의 닭 잘 잡는 광준이 앞에 마을의 모든 닭이 눈이 마주치거나 손이 닿으면 찍소리 못 하고 엎드리듯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코가 주먹만 한 남근씨, 그 이름도 거룩한 남근(男根)씨와 눈이 마주치기나 손이 닿으면 그만 꼼짝을 못 하고 가슴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열찬씨도 그럴 수 있겠구나 수긍한 일이 한번 있었는데 언젠가 둘이 남포동의 어느 오뎅집에서 홍어회를 안주로 정종과 소주를 양껏 마시고 부평동의 비까번쩍한 양주집으로 갔는데 남부민1동장 시절의 바르게살기위원이 운영하는 집이었다. 테이블에 아가씨 둘을 불러 자리를 잡자 주인 이영식씨가 반색을 하며

“아이구, 동장님 모처럼 오셨네요.”

손을 잡고 아주 극진히 대하는 모습을 보고

“내 이럴 때 참으면 마도로스가 아니지. 사장님 이집 아가씨들 다 오라카소. 17년산, 아니 21년산 술도 한 병 더 넣고.”

큰소리를 치는지라

“처남, 무리 아이가?”

21년산 양주가 술집에선 50만 원도 넘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열찬씨가 말려도

“그라면 내가 하급선원 갑판원들이 마시는 <올드파>나 <죠니워커> 레드라벨이나 마시란 말이가?”

도로 역정을 내더니 무려 여섯 명의 아가씨에게 골고루 술을 붓고 깔깔한 신권 만 원짜리를 돌리고 나서 선장님이 이국적으로 생기고 멋지다는 말에 고무되어

“내, 5대양6대주 항구라는 항구에 다 다니며 왈츠며 탱고며 삼바며 보사노바며 재즈며 지루박이며 안 추어본 춤이 없고 안 안아본 아가씨가 없지. 자, 오늘은 누가 내 파트너가 되어줄 끼고?”

하면서 아가씨 하나를 끌고나가 

“자, 사장님 마이클잭슨 부탁해요!” 

하고 음악이 나오자 발꿈치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경쾌하게 전진후퇴를 반복하는 <문 워크>라는 춤을 열심히 추다 좌중의 아가씨는 물론 카운터를 보던 마담과 옆자리의 손님들까지 환호성을 질러대자

“자, 이젠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가 빠지면 안 되지.”

어느 아가씨의 머플러를 가슴에 길게 늘어뜨리더니 두 손과 무릎을 교차시키는 춤을 격렬하게 추자 모든 아가씨들이 뛰어나가 “오빠!”를 연호하며 난리법석이 벌어지는데

“자, 여기까지, 끝!”

일순 커다랗게 소리치며 자리로 돌아와

“자, 보자. 우리 매제 옆에 앉은 아가씨!”

하면서 만 원짜리 신권을 가슴에 꽂아주며

“니 오늘 그 양반 아주 흐물흐물하게 못 녹이면 재미없다! 아주 그냥 홍콩에 보내버려!”

신명을 냈다. 신분이 공무원인데다 주인마저 아는 사람이라 문란하게 놀 입장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당히 술도 취하고 밤도 깊어가는 판에 젊은 아가씨의 손을 잡아보고 살 냄새를 맡아보는 것이 꼭 싫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거금을 뿌렸으면 이제 곧장 중학교수학교사인 아내와 두 아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면 좋으련만 기어이 입가심을 하자고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 것이었다. 다시 또 다른 노래방에 가서 놀거나 부둣가의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다 옆자리의 여성들과 슬슬 말을 붙이다 단번에 묘한 분위기가 만들어져 슬쩍 빠지려고 생각한 열찬씨가 술값을 계산하고 일어서면

“매제, 여자가 둘인데?”
“씰 데 없는 소리!”

뒤도 안 돌아보고 나서는데 한번은

“보소! 매제.”

불러놓고는 

“써다가 보니 돈이 떨어졌네. 5만 원만 주고가소.”
“5만 원까 되겠나?”
“방값 2만원 택시비 만 원이면 나중에 해장할 돈도 되겠네. 또 잘 하면 한 50만원 생길 수도 있고.”

그렇게 헤어져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

“도대체 어데서 뭘 한다고 이적지 댕깄소? 새벽 한시가  넘도록.”

영순씨가 눈을 흘겨도

“아이구, 너거 오래비 때문에 못 살겠다. 그 인간은 인자 출항할 때도 안 되가나?”

하면 두말도 않는 것이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