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477)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26장 언양어장 열찬씨⑦
대하소설 「신불산」(477)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26장 언양어장 열찬씨⑦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3.05.24 04:25
  • 업데이트 2023.05.22 1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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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언양어장 열찬씨⑦

영순씨가 눈을 흘겨도

“아이구, 너거 오래비때문에 못 살겠다. 그 인간은 인자 출항할 때도 안 되가나?”

하면 두말도 않는 것이었다.

 

주중엔 처남을 만나고 주말엔 처형과 동서를 만나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가을이 흘러가고 있었다. 옹색한 아반떼 중고차를 쌍수정이나 천전마을의 냇가에 대고 헌옷과 헌 운동화로 채비를 하고 도랑에 들어가서 지칠 때까지 허우적거리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고기를 넉넉하게 잡으면 좋았지만 변변찮은 소출이라도 양념을 갖추어 매운탕이나 튀김의 시늉만 내면 점심과 술안주로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게 넉넉하게 점심을 먹고 아릿한 제피향을 즐기며 기분 좋게 취해 번듯이 드러누워 잠을 청하거나 가끔 고개를 들어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 새삼 더 깊고 파랗게 다가오는 하늘과 먼 산 능선과 마을과 감나무와 풀냄새들... 이게 바로 천국이구나 싶은 행복감과 이 즐거운 시절이 얼마나 오래갈까 싶은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한번은 오후 여섯시 퇴근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전화가 와서 제주곰장어집으로 나갔는데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20대 후반의 아가씨하나가 동석해 있었다. 곰장어구이와 소주로 알맞게 취해 불판에 눌러 붙은 양념에 밥까지 볶아 넉넉히 배를 채운 뒤 셋이 노래방으로 가서

“기술도 좋다. 저런 젊은 미인을 어데서 구했노?”

화장실에서 아가씨가 돌아올까 조바심을 내며 묻는데

“뭐, 눈길 한 번 잘 주면 되는 일이지. 손 한번 잘 잡아도 되고 스텝 한번 잘 맞추면 더 좋고 좌우간 지갑 열어 돈 주는 경우가 최악의 경우지.”

하는데

“어데까지 갔노?”
“갈데까지 갔지. 세상에 아낄 기 따로 있지. 실없는 말로 히야까시 한다고 잔머리 굴리며 돈 쓰고 아첨하고 파장까지 갈일이 어데 있노? 눈에 힘 한 번 주면 되는 일로. 마 초장에 후딱 했다!” “에라이.”

하는 순간 아가씨가 돌아와 다시 노래를 하고 술을 마시는데 마침 남근씨의 휴대폰이 울려

“그래, 어데라꼬? 아, 알았다!”

전화를 끊더니 바로

“매제! 우짜지? 내 바쁜 일이 생겨서 말이야. 2항사에서 1항사로 승급시켜서 승선시킨다는 콜이 와서 말이요.”

하고는 아가씨더러

“내일 연락할 께. 기왕 돈 준 거니 우리 시인선생님하고 잘 놀다가 가소.”

하고 손을 흔들며 나갔는데 둘이 남게 되자 아가씨가 기가 막히게 예쁘고 젊어 새삼 가슴이 다 울렁거리지만 이미 처남이 집적거린 데다 괜히 망신이라도 할 것 같아 차마 손도 못 잡아보고 그저 돌아가며 노래나 한곡씩 하며 술잔을 돌리는데 한참이 지나 남근씨의 전화가 오더니

“어이, 매제. 잘 되가능교?”
“시방 무신 소리 하는 기고?”
“어데 고무신이 문수가 있나? 슬리퍼가 임자가 있나? 아무나 차지하면 되는 거지.”
“에라이! 그런데 어데고? 다시 올 끼가?”
“어데기는? 더 젊고 예쁘고 돈 되는 아가씨 만나러 왔지.”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문 열찬씨만 자신이 뭘 잘못 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가씨에게 정중한 사과를 하고 자리를 파했다.

 

세 명의 어부와 한 명의 운전요원과 한 명의 게스트 겸 미식가로 이루어진 5명의 어로 팀이 전대미문의 성과를 올린 일이 있었다. 바로 명촌 누님네로 가는 중간의 사광리마을 못 미쳐 고래들 가운데를 흘러내리는 개울에서였다. 한두 번 지나다니다 보니 벌써 오리농법으로 벼농사를 짓느라 조그만 함석집을 논배미마다 지어 노랗게 칠한 지붕을 보아와 어쩌면 미꾸라지가 있을 것만 같아서 재미사마 한번 들어가 보았을 때였다.

“어라!” 

동작이 늦어 뒤쳐진 열찬씨보다 먼저 도랑에 들어가 남매가 처음 잡은 반도를 올리더니

“대박이다. 영순아, 영순아, 바께스 가 온나!”

소리쳤다. 단번에 크고 작은 미꾸라지 여남은 마리가 들어왔는데 그 중에 몇 마리는 엄지손가락보다 굵고 색깔도 노랬다. “야, 이거는 진짜 자연산이다. 크기가 이 정도면 아예 보약이다. 몸 색깔이 주변환경에 맞게 노랗거나 갈색, 회색에 가까운 것이 진짜 자연산이다.”

열찬씨도 덩달아 흥분했다. 이어 두 번째 반도를 올린 남근씨와

“이기 뭐고? 매제!”
“아이구, 그건 맑은 물에 사는 빠꾸마치네. 무슨 빠꾸마치가 그래 미거지만큼 커노? 매운탕 맛 죽이겠다.”

주고받은 뒤 세 번째, 네 번째 반도역시 굵은 미꾸라지가 수북하고 제법 큰 피라미와 붕어도 올라왔다.  “야, 이거 여간 아니네. 내 오십 평생 내내 꿈꾸던 황금어장이 마침내 나타났구나!”

열찬씨가 눈을 들어 도랑을 살피니 이제 막 나락이 펴기 시작하는 드넓은 초록들판에 폭 2미터가 되는 도랑이 근 4,5백 미터는 족히 벋어 있고 그 중간에 드문드문 논에 물을 대기 위한 작은 보, 낙차가 있어 움푹 패인 웅덩이에 한길 가량 물이 고인 곳도 있었다. 수양버들과 찔레꽃이 가지를 늘어뜨리거나 쑥, 개망초, 호장군대, 소루쟁이에 농고출신 자신이나 알 서양의 사료작물이 들어와 퍼진 이탈리안 라이그라스, 오차드 그라스, 심지어 러시안 컴프리의 거대한 잎과 자줏빛의 꽃까지 어우러진 양가의 둑이 미꾸라지나 민물고기가 붙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메기부인, 오늘이 우리 어로 단 출범 후 최고의 날일 될 것입니다. 우짜면 다시 미거지를 잡을 지도 모르지요. 기대하시라!”

하며 부지런히 반도 질을 하는데 체 10분도 못 되어 평소 같으면 한번 끓여먹고도 남을 양을 잡아

“좋다. 갈 데까지 가보자. 미꾸라지가 남나, 우리 어로단의 힘이 남나?”

장학퀴즈의 대사를 부르짖으며 한 시간쯤 잡자 반말도 더 들어갈 바께스에 가득한지라

“우짜꼬? 언양 홍근이한테 바께스 가져오라 칼까?”

망설이던 영순씨가

“아, 참!”

하더니 승용차에 가서 과일을 담았던 검정 비닐봉투를 하나 가져와 또 가득히 잡았다. 열찬씨의 예언대도 월척에 가까운 붕어도 서너 마리, 제법 큰 메기도 한 마리 잡았는데 전에 알밴 놈과 달리 길쭉한 수컷이었다.

“아이구, 이걸 언데 다 갈리노? 그 참 많아도 걱정이네.”

걱정하던 영순씨를 보며

“맞다. 작천정에 가자! 물도 많고 앉기도 수월코.”

열찬씨의 제의로 일동은 작천정으로 옮겼다. 정자 앞 호박소를 피해 한참 아래쪽으로 내려가 반도에 잡은 물고기를 부으니 반도가 넘쳐나갈 판이었다. 너무 많아 언양의 홍근이까지 불러 부지런히 가르고 씻는데

“야, 고기 반 물 반이다!”

어느새 빙 둘러선 구경꾼들 중에 젊은 여자 하나가 

“아저씨, 이 고기를 다 어데서 잡았능교?”
“고기야 물에 사니까 도랑에서 잡지.”
“어느 도랑에서요?”
“글쎄. 물만 있으면 어느 도랑이나 고기가 있지.”

하자

“맞다. 안 그래도 저게 호박소아래도 중태기가 왔다갔다 하던데.” 눈을 반짝였다. 중태기를 안다면 언양토박이로 매운탕깨나 먹어 봤겠다고 생각하는데
“그래 저 반도하나로 이 많은 고기를 다 잡았단 말잉교?”
“그렇지.”

대화가 끝나기 바쁘게

“보소!”

남편과 눈을 맞췄다. 또 한참이나 고기를 고르고 씻어 장에서 파는 그릇으로 열다섯 그릇은 족히 되겠다싶어 미꾸라지는 어로단의 사위이자 조카인 홍근씨에게 서너 그릇, 명촌과 장촌의 누님들에게도 두어 그릇씩 나눠주기로 하고 부산 집으로 가서 붕어찜과 메기와 중태기를 넣은 매운탕으로 저녁을 먹자며 마무리를 하는데

“보소. 아저씨!”

완장을 찬 검은 얼굴의 중년사내가 다가왔다. 전에 한두 번 본 정자 관리인 같았다.

“여서 이라면 우짜능교? 자연보호를 해야 할 유원지에 웬 비렁내 나는 미꾸라지가 다 뭥교?”
“예. 미안합니다. 금방 갈게요.”

하는데

“세상에 별 희한한 사람도 다 보겠네. 넘의 매운탕집 바로 앞에서 뭐 사람 보골 채우는 것도 아이고...”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알겠심더. 다음에 우리 고기 안 잡히는 날 와서 매운탕 팔아줄 게요.”

눈치 빠른 남근씨가 수습하고 돌아서려는데

“보소. 아저씨!”

아까의 젊은 새댁이

“아저씨들 말 듣고 우리 신랑이 언양에 가서 반도까지 사 왔는데 저 등신이 송사리 한 마리도 못 잡고 옷만 배린다 아잉교?”

원망스런 얼굴로 쳐다보는데

“물고기는 어데 아무나 잡능교? 반도질도 잘 해야 된지만 물이 흘러가는 길과 고인 웅덩이와 뻘 밭과 풀 섶과 어로환경도 잘 살피고 또 그날 날씨와 바람과...”

직원들에게나 써먹던 어로장의 노하우를 장황하게 설명하는데

“매제! 그랄 끼 아이고 미꾸라지를 좀 주는 기 정답이겠네. 어로장이 알아서 하소.”

손쉬운 정답을 찾아내어 한 사발 정도를 주니

“아이구, 고맙심더. 성불(成佛)하이소.”

보살 같은 소리를 하는지라

“땍! 방금 물고기를 잡으면서 성불은 무슨 성불?”

하는데

“기왕 잡은 물고기면 맛있게 잘 묵는 기 바로 성불 아이겠능교?”

대답하는 품이 맹랑하기는 해도 언양사투리가 그럴 듯 해 따지면 초등학교 후배거나 누구 아는 친구의 여동생일지라도 모르겠다 싶어

“아들 하고 신랑하고 맛있게 끓여 묵으소. 새댁이 하고 신랑도 성불하고.”

하며 기막힌 하루를 마감했다. 

 

“처남, 혹시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 가운데>라고 들어봤나?”

한바탕 어로작업을 마치고 처형 남숙씨는 젖은 옷을 갈아입으러 숲속으로 들어가고 잡은 물고기는 영순씨에게 주어 매운탕을 끓이게 하고 별미를 기다리며 꾸뻑꾸뻑 조는 천형씨를 바라보며 남근씨에게 물었다. 높고 푸른 하늘아래 가는 바람이 상큼하고 지절대며 흘러가는 시냇물은 여울목에 햇빛에 반사되며 하얗게 받아 부서지고 있었다. 마침 논배미 너머로 하얀 해오라기 한 마리가 날아올라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와? 우리 시인께서 뜬금없는 소리를 다 하시네. 무슨 시상이라도 떠올랐나?”
“아니. 그게 아니고 날씨가 너무 좋지. 풍경도 평화롭다 못 해 고즈넉하고 고기도 넉넉히 잡아 곧 맛있는 점심을 먹으며 술도 한 잔 곁들이고 더더욱 맛있게 먹어줄 천형이형님도 있고...”
“그래서?”
“우리 같은 언양 촌사람들이 이거 너무 행복한 것이 아닌가 말이야. 우리의 평생을 두고 가장 평화롭고 즐거운 시기, 아무 걱정도 없이 평온한 시기가 바로 오늘, 즉 삶의 한가운데가 아닌지?”
“아이구, 골치 아파라. 이까짓 게 무슨 행복이라고? 보소, 매제! 사나이라면 적어도 5대양 6대주 입항하는 항구마다 눈빛과 피부 빛이 다른 벽안의 아가씨 하나씩은 애인으로 두고 일 년 내내 순시하며 연애를 하고 세계 각국의 술과 음식을 즐기며 여러 나라의 술도 마시고.”

가늘게 눈을 뜨고 코를 벌름거리는 것이 방금 머리에 장미를 꽃은 스페인의 아가씨와 부둥켜안고 <베사메무초> 스텝이라도 밟는 형세였다.

“그래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아가씨와 어떤 춤을 추는데?”
“우선 네덜란드 암스텔담이나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금발의 팔등신아가씨와 점잖게 탱고라도 한 곡 땡기면서 꼬냑이나 와인에 젖는 거지. 또 샹그릴라도 있고?” 
“그기 뭔데 장식용 스탠드글라스 이름인가?” 
“이런 맹추. 샹그릴라는 스페인의 술 이름이야. 발갛게 빛깔이 좋아 멋모르는 아가씨들이 한 모금 마시면 단번에 뿅 가는 거지.”
“뿅 간다니? 히로뽕 섞었어.”
“아니지. 눈이 갤갤 풀리고 혼이 반쯤 나가 제 손으로 무장해제를 하고 안기는 거지. 심한 경우 바로 혼절을 하기도 하고.”
“그래서?”
“여자가 예쁘고 맘에 들면 바로 샹그릴라를 권하면 되지. 서툰 외국어로 힘들게 꼬실라고 애쓸 것도 없이.”
“그런데 그걸 아는 여자들이 함부로 샹그릴라를 마시는가?”
“그게 좀 그렇긴 하지만 여행이 어디 가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누고하고 가느냐가 문제이듯 여자가 보는 남자는 얼마나 친절하고 잘 생겼나가 아니라 얼마나 돈을 잘 쓰고 특히 나처럼 코가 크고 정열적이며 무식하게 졸라대는 것이지.”
“조르다니?”
“남녀 간에 달라는 것이 뭐 그것밖에 더 있나? 굳이 말을 안 해도 기가 막히게 잘 알지. 여자들이란 하여간.”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흑백 혼혈로 청동 빛의 은은한 피부 빛을 가진 무어족의 아가씨와 라스팔마스에서 잡은 생선요리와 와인, 또 탱고의 발상지인 아르헨티나 브웨이노스 아이레스의 아가씨, 삼바 춤의 본고장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나 상파울로, 산토스에서 방금 삼바축제에서 공작 같은 날개를 자랑하다 돌아온 눈썹화장도 덜 지운 아가씨, 특히 백인과 원주민의 피가 3:1로 혼혈된 가장 이상적인 피부 빛의 모레노 아가씨며 살사의 고장 쿠바의 아바나에서 역시 머리에 꽃을 꽃은 아가씨와 애니깽, 아니 알로에의 벌레가 한 마리 들어있는 데킬라를 마신다거나...

“아니, 머리에 꽃을 꽂는 곳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아냐? <샌 프란시스코에서는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라는 노래가 있듯이.”
“물론 있지. 그 뭐더라 골든게이트 브리지, 그러니까 금문교를 배경으로 한 영화, 그 향수를 파는 인도 아가씨가 나오는 영화의 미인처럼 힌두교를 믿는 인도여자, 무슬림의 중동여인들도 그야말로 그림처럼 아름답지. 약간 푸른 눈빛을 들여다  보면 그 조그만 두 개의 우물에서 이 세상의 모든 기쁨과 슬픔,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다 쏟아져 나올 것 같지.”
“이런. 인자 처남이 시를 쓰네. 내보다 낫네. 항복! 0:1로 내가 졌다.”

이렇게 꿈속을 헤매던 어느 날이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