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2호-수필】 늦지 않았어 - 이영자
【장소시학 2호-수필】 늦지 않았어 - 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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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5.22 11:42
  • 업데이트 2023.05.23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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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을 내고서

 

늦지 않았어


이 영 자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은 없었을 것이다. 두 마리 토끼는 잡을 수 없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달린다. 주로에서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본다. 멀리 바라보이던 길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새로운 길이 영상처럼 다가온다. 처음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양념처럼 첨가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마저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막다른 골목길에 들어선 듯 꽉 막히어 숨 고르기도 할 수 없다. 

몸으로 체험하는 극한의 달리기, 생각을 끄집어내 쓰는 시, 무엇 하나 쉬운 것은 없었다. 달리기는 체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다. 아무리 앞으로 나가려 애를 써도 제자리걸음인 듯 달리던 몸은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발을 내딛지 못할 상태이다. 어느 때는 발가락 끝에서 강직이 시작되어 종아리로 넓적다리로 올라타고 뛰기를 멈추게 한다. 뛴다기보다는 갖다 놓는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런 체험으로 시 쓰기는 달리기와 만나게 되었다. 육십을 바라보던 나이에 시작되었던 달리기는 그렇게 시로 살아났다. 

흔히 그렇듯 책을 읽어야겠다는 마음은 늘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글을 쓴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시는 눈과 마음으로 읽는 사람이지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2010년 3월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 입문은 변화의 첫걸음이었다. 시기적으로 많이 늦었지만 2011년 9월에는 본업인 간호학이 아닌 국문학으로 대학원 과정을 밟았다. 이십 대 공부하고자 했던 욕구를 채웠다. 늦깎이 학생으로 힘든 과정을 즐거움으로 녹이는 시간이었다. 

시 쓰기는 어렵지만 보람 있는 과정이었다. 무엇을 쓸 것인지 생각하는 시간도 길었다. 서두르지 않았다. 어떤 체험이라도 시의 소재가 될 수 있고 익숙한 경험은 본 대로 느낀 대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산다는 것은 기억을 남기는 일이고 시집에 그런 기억을 담을 수 있었다. 첫 시집 『달리는 꼴찌』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로 다른 길이지만 하나의 결과물로 태어났다. 삶을 바꾸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튜브 방송 달림이 TV 김태경 님은 『달리는 꼴찌』 출판과 관련하여 동영상 촬영까지 해 주었다. 달리기를 주제로 시집이 나온 덕분이다. 2022년 5월 22일 오전 9시 부산 맥도생태공원에서 15킬로미터를 달렸다. 시 쓰기와 마라톤을 이끌어 주신 박태일 교수, 같이 시집을 출간하고 함께 달림이 길에 다녔던 김영화, 차수민 시인도 달렸다. 
김태경 님은 앞서  『달리는 꼴찌』 시집을 읽고 소감문을 남겼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를 인용하며 

매 대회마다 회수차와 실랑이 하는 모습, 낯선 광경이다. 같은 달림이지만 후미의 모습은 잘 모른다. ‘달리는 꼴찌’인 이영자 누님은 그러한 본인의 모습을 시로 정말 잘 표현한 거 같다. 나는 이런 달림이가 좋다. 제한 시간이 넘어 인도로 뛰든 말든 본인만의 페이스로 묵묵히 달리는 나는 이런 시인이 좋다. 대중의 관심도와는 상관없이 본인만의 언어로 마라톤 시를 개척해 나가는, 달림이로서 무척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라고 밝혔다. 차수민 시인의 유쾌한 발상이 유튜브 방송을 통하여 ‘달리는 시인’으로 소개된 것이다.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건만 현실이 되었다. 시인의 또 다른 발상은 김해로 향했다. 2022년 6월 19일 김해숲길마라톤대회에서는 자리까지 마련하는 획기적 기획이었다. 달림이 TV 운영자 김태경 님도 잊지 않고 찾아주었고 영상으로 남겼다.  『달리는 꼴찌』 사인회까지 할 수 있는 뜻밖의 행운을 얻은 것이다. 생애 처음 있었던,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함께 달리고 같이 시를 쓰는 분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달리기 제한 시간이 다가올 즈음, 결승점을 향하여 아직도 주로에서 절음 걸음을 딛고 있을 때, 벌써 완주하고 반대 방향에서 여유 있는 모습으로 걸어오는 달림이들을 만난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꼭 완주 하세요”, “조금만 더 가면 되니 힘내세요” 등 격려의 박수와 응원을 보내준다. 정말 힘이 솟아나는 듯하다. 그렇다고 걸음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탈진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은 의지뿐이다. 꼴찌라도 좋다. 끝까지 가는 것이 목표니까. 출발지에서 다짐했던 완주를 향하여 거북이처럼 달려갈 뿐이다.

샤를 페로가 쓴 「장화 신은 고양이」라는 동화가 있다. 방아꾼의 세 아들이 아버지 유산을 나누어 가진다. 큰아들은 방앗간을 둘째는 당나귀를 차지했다. 막내는 고작 고양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고양이는 막내에게 장화 한 켤레만 만들어 주면 그렇게 형편 없는 유산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겠다고 했다. 장화를 신고 떠난 고양이는 결국 막내를 왕의 사위가 되도록 이끌어 주었다. 작은 것을 가졌지만 결코 작은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처음 시작은 운동장 한 바퀴 돌기였다. 자신의 노력에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이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0여 년의 시간이 지나며 시와 달리기가 만나고, 달리기로 인해 나비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그 파장은 매우 컸다. 이웃을 사회를 위해 배려하며 살아가는 분들의 혜택을 과분하게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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