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으로 듣기 민망한 말이 나오고 말았다. 아직도 세무라는 말만 붙으면 엄청난 뒷돈이라도 생기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거기 무슨 말씀이요? 남은 때 묻은 빤쓰까지 팔아서 보태는 판에...)
영순씨가 당장이라도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겨우 참았다고 했다.
점심시간에 학장동의 새 아파트를 둘러본 열찬씨가 영순씨와 점심을 먹는데
“선배님!”
성수자시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상북면 향산 출신으로 순영씨의 2년 후배인데 같이 문예반에 활동하다 당시에 유행하던 S동생, S언니로 지낸 사이라고 했다. 같은 문단활동은 해도 서로 모르고 지냈는데 어느 순간 봄순씨를 통해 열찬씨의 실체를 알고
“아이구, 선생님! 그 애절한 첫사랑의 소년이 바로 선생님이었군요!”
셋이 만나 차를 마시면서
“하긴 우리 언니처럼 아름답고 품위 있는 숙녀에겐 그 정도 첫사랑정도는 있어야지요. 그래도 남도 아닌 동향시인이 바로 언니의 첫사랑이란 것이 너무 좋아요.”
하고 잔뜩 신이 나더니
“참, 뭐라고 불러야 되노? 언니의 첫사랑이지만 형부라고 부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오빠도 아니고 동장님 과장님도 딱딱하고.”
하다가 문단에 보편적으로 통하는 선생님으로 부르기로 하고 3년에 한번, 5년에 한번 순영씨와 만나는 자리에 꼭 동참을 하는 것이었다. 수자씨나 열찬씨가 다 스스럼이 없기도 하지만 매사 깔끔한 성격의 순영씨가 혹시라도 있을 오해를 염려해 동반시키는 모양 같았다.
“아, 성시인 우짠 일이요?”
옆자리의 영순씨를 의식해 조심스레 전화를 받는데
“선배님, 수필이 시보다 더 낫네요. 하긴 부산일보 <살롱>에 나올 때 그런 줄은 알았지만. 아무튼 빛남의 이상개 선생님 부탁으로 선배님 수필집 낼 원고들을 죽 읽어봤는데 내용은 제가 손댈 것도 없고 분류나 편제는 선생님 안대로 하되 제목은 <달팽이와 부츠>로 했으면 합니다.”
“아, 그래요?”
문단경력은 짧아도 성격도 소탈하고 부지런해 문단의 여러 행사, 특히 차를 끓이고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는 귀찮은 일도 서슴지 않아 문인들 간에 인기가 좋아 부산문단의 엘리트에 정통세력임을 자랑하는 민족작가회, <민작>의 멤버로 발탁되어 그 중심멤버인 권경업 산악시인이 운영하는 사랑의 국수차사업의 모금과 운영에 참여하느라 중앙동의 빛남출판사 바로 위층의 사무실에 출근하고 있었다. 지난 번 제4시집 <비오는 날의 연가>도 처음 열찬씨가 <끊어진 하늘>로 제목을 붙인 것을 보고
“선배님, 이거 너무 노골적인데요. 중년이라면 연시도 그런 직설보다는 은은한 여운이 나야겠지요. 저는 <비오는 날의 연가>가 나을 것 같아요. 제목에서 부터 뭔가 애절한 그리움과 우수가 묻어나지 않아요?”
하는 말을 듣은 것이 대성공을 한 것이었다.
“아, 그러면 그렇게 합시다. 고맙습니다. 나중에 내 술 한잔 사지요.”
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선생님, 바쁜가베? 왜 그렇게 서둘러 끊으려 해요?”
하는데
“지금 우리 마누라랑 처제랑 점심 먹고 있어요.”
귀를 쫑긋 세운 두 여인이 혹시 무슨 오해라도 있을까 싶어 서둘러 끊는데
“보소. 만약에 내 몰래 그 첫사랑인가 뭔가 만나면 죽는 줄 아소!”
그 제서야 영순씨가 수저를 잡는 것이었다.
새해인 2003. 1월 3일 시무식은 충무국민학교 자리인 신청사에서 한다는 방침 아래 서구청의 진 직원들은 이삿짐 꾸리느라고 한바탕 북새통을 치러야했다. 객지생활 30년이 넘는 동안에 자취방 이사 서너 번에 달세 방에서 전세방, 전세독채, 가게 방, 내 집 아파트에 동사무소 이전, 부서해체와 신설부서 꾸리기까지 스무 번도 훨씬 넘게 별별 이사를 다 해본 열찬씨로서는 하면할수록 어려운 일이 바로 이사였다.
우선은 보통의 남자들이라면 거울과 형광등을 달고 부엌의 찬장이나 서랍장을 손보고 가전제품을 뗐다 다시 설치하는 일을 하기마련이련만 도무지 목수 일에 솜씨가 없어 거울이나 액자를 달려고 못 하나를 치다가도 예사로 손톱을 찧는 열찬씨를 보고
“보소, 정 안 되면 내려오소. 못 하나 박으려다 손톱 찧는 거야 또 그렇다 치더라도 뒤로 넘어져 뒤통수 박살날까 봐 내가 더 걱정이요.”
하면서 부엌살림을 다시 닦아 찬장에 넣거나 옷장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망치를 받아들기 예사였다.
“세상에 복도, 복도 무슨 이런 기막힌 복이 있노? 그놈의 연애편지 하나 잘 쓰는 재주에 넘어가고 보니 잘 하는 기 하나라면 못 하는 것은 열두 개도 넘는 사람이 아이가? 그저 돈 안 되는 일만 골라 술 먹고 책 읽고 글 쓰고 공부 잘 하는 것 말고는 뭐 할 줄 아는 기 있어야지. 그렇다고 인물이 좋나, 피부가 희나, 손끝이 야무나, 밥을 깨끗이 묵고 옷을 다담시리 입나, 마누라 위할 줄을 아나?”
이렇게 자탄을 하는 영순씨에게
“허허, 이 사람이? 내 이래 봐도 아무 거나 당신이 해주는 음식이면 뭐든 잘 묵지, 아무 데나 엎어져도 등더리만 땅에 닿으면 잠 잘 자지. 마누라 애끼고 아아 좋아하지. 거기 다 어데고? 당신은 꼭 밥도 잘 안 묵고 깨작거리고 잠도, 옷도 다 까다로운 남자하고 살아봐야 알겠나? 평생 술 한 잔도 안 하고 6시 땡, 하면 퇴근해서 방바닥이나 가구에 먼지 한 알이라도 안 앉았는지 검사하고 잔소리나 늘어지게 하는 멀끄디에 홈파는 남자하고 말이야?”
“하여간 말은 비단이야. 당신이 뭐 말은 그렇지 아는 보기를 뭐 봐준 기 있다고? 술이 떡이 되서 한밤중에 들어와서는 실컷 잘 자는 아이를 놀아준다고 깨배가지고 칭얼거리고 울면 다시 슬쩍 밀어주고 코를 골며 자면서.”
“그래도 내가 맨들기는 잘 맨들었다 아이가? 그라이 아아 둘이 공부도 잘 하고 성격도 참하고 말이다.”
“택도 없는 소리, 당신이 술 채서 대충대충 뿌린 씨를 내가 잘 거두어 공을 들여 그렇지. 그러니까 씨가 좋아 그런 기 아이고 내같이 밭이 좋아 그렇단 말이지.”
“에라이, 지 밭이 좋다고 지 자랑하는 사람은 내 첨보네.”
하며 입씨름을 했지만 그때마다 고향친구, 조기축구회의 회원, 사촌처남을 비롯한 솜씨 좋은 원군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해결해주었고 사무실의 이사는 일찍 주사승진을 한 바람에 무얼 들어 나르고 정리하기보다는 부하직원들의 술밥이나 챙기면서 넘어갔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전기를 겁내는 열찬씨를 일부러 겁주러하기라도 하듯 세탁기, 냉장고, 커피포트, 오븐, 헤어드라이기를 비롯한 가전제품은 물론 컴퓨터, 프린트기, 복사기, 문서세단기 등 한층 더 힘든 전자제품이 쏟아지다 못 해 현관문의 자동키처럼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새로운 애로사항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사무실이사를 하느라고 짐을 꾸리는 내내 희한하게도 열찬씨보다도 더 손이 굼뜬 조명순세외수입계장이 직원들이 모두 먼지를 흠뻑 덮어쓰고 책걸상을 옮기고 묵은 서류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고
“옳지 그래. 지출서류나, 결손, 감액근거가 아닌 일반과세자료나 영수증종류는 가급적 폐기처분하고 갑시다. 공무원들이 혹시나 하고 생각 없이 처박아놓은 서류 중 나중에 단 한번이라도 들여다보는 기 어데 10%나 되던가? 그저 과감하게 버리세요.”
멀뚱히 바라보며 지켜선 열찬씨가 그저 입 부조나 하는데
“과장님, 새 청사에 이사 가면 제 자리는 볕 잘 드는 따신데 주이소.”
그 북새통에 뜬금없는 부탁을 하는지라
“그 기 어데 마음대로 됩니까? 사무실이야 일 바쁜 직원들과 찾아오는 민원인이 우선이지. 당연히 볕 잘 드는 데는 민원직원 배치하고 우리 같은 과계장은 뒤로 빠져야지.”
금방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참았다. 나이가 영순씨 또래라 어쩌면 벌써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프다는 폐경기가 온 것인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송도해수욕장 뒤편인 송도곡각지 언덕아래 아직도 옛 어촌의 흔적이 남아있는 조그만 초가집에서 어부의 맏딸로 태어났다며 지나가다 가끔 자신의 친정집을 손짓해보이던 그녀는 여중과 여고를 대신동에 있는 부산 최고의 명문에 다녔다고 했다. 그러나 그 외모나 행동거지가 도무지 세련된 도시의 엘리트나 멋쟁이기 보다는 어디 하나 매끄럽거나 부드럽지 못 하고 그저 뻣뻣하고 거친 농촌출신 열찬씨처럼 어쩐지 여전히 바닷가에서 조개를 잡고 미역을 따고 고무대야를 타고 헤엄을 치는 어부의 딸을 조금도 면치 못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책걸상, 캐비닛 같은 큰 짐과 함께 박스에 넣은 서류를 담은 짐이 용역회사의 차로 새청사로 옮겨지자 제각기 긴 짐을 푸느라 정신이 없고 열찬씨도 점심시간에 잠깐 빛남출판사로 들려 수필집 최종 편집 안을 확정 시키자는 성수자 시인의 전화를 받고 조금 일찍 사무실을 나서는데 한나절 내내 이삿짐에는 손을 안 대고 열찬씨 옆에 섰던 조명순 과장이
“과장님, 화장실은 어데로 가면 됩니까? 새청사라서 아직 물도 안 나오고...”
별 희한한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보소. 조 계장님, 내가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여동생 오줌 누이듯 조 계장 화장실 안내나 하란 말이요? 가까운 식당이고 다방이고 아니면 병원이나 가겟집이라도 가서 잠깐 양해를 얻고 가면 될 일이지. 거, 참.”
말을 하고보니 서로가 민망한지라 고개를 돌렸다.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도 중앙동에 내려서 빛남의 3층 계단을 오르면서도 고소를 금치 못 하는데
“야아, 이거 가열찬시인 수필 좀 봐! 이거 장난이 아니네. 차라리 시보다 낫겠네.”
“아, 그거야 부산일보에 살롱 연재할 때 이미 소문난 거 아이가?”
서규정 시인과 이상개 시인이 주고 받는데
“야, 이것 좀 봐라. 술꾼이 해장국으로 먹는 콩나물국의 맛을 우짜면 이렇게도 잘 묘사했나? 지나 내나 알아주는 술꾼이라서 그런가?”
한 살 아래라 술친구로 지내는 권경업 시인이
“자, 함 들어보소. 짧으니까 끝까지 읽어볼 테니까.”
하는지라 차마 들어가지도 못하고 창가에 서서 담배를 피는데
콩 나 물
매일 술을 마시게 된다. 잦은 회의와 회식 뒤에는 으레 술자리가 따르고 밤늦게 취해 들어오는 일이 버릇이 되겠다 싶어 모처럼 일찍 집에 들어오는 날에는 고향친구나 또 다른 누군가가 찾아와서 끝끝내 취하고 만다.
아내는 해장국 끓이기 선수(選手)다. 이 세상 술꾼의 아내치고 해장국 못 끓이는 사람 뉘 있으랴만 일곱 살 아래의 내 아우는 한 번도 해장국을 못 얻어먹는 모양이니 아내와 나는 해장국 끓이기의 연령하한선(年齡下限線)에 걸린 마지막 해장국선수요, 수혜자(受惠者)인 셈이다. 그러나 해장국 끓이기란 속 끓이기란 생각이 들 때마다 아내가 불쌍해진다.
시래기, 동태, 북어, 재첩 국에다 재료가 마땅찮으면 배추김치를 풀고 멸치 몇 마리 넣은 얼얼한 일품의 국을 끓이는데 그보다는 순수, 투명한 콩나물국이 백미(白眉)다.
콩나물국은 왜 그리도 시원할까?
첫째는 하얗고 투명한 동체(胴體)에 초록빛 머리 하나, 꽃피거나 열매 맺기를 기대하지 않는 무욕의 재료일 것이다.
두 번째는 솜씨이다. 콩나물 한 줌, 소금 한 줌, 물 한 줌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시원한 국물은 4분 음표(♩)나 8분 음표(♪)가 악보처럼 조화(調和)를 이룬 예술품이니 내 아내는 대단한 행위예술가인 셈이다.
콩나물국을 먹는 아침마다 나는 회한(悔恨)에 빠진다.
그릇 속에 엉긴 콩나물 하나하나가 갑자기 살아있는 물음표(?)가 되어 내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당신은 왜 날마다 술을 마시는가? 무엇이 당신을 술 마시게 하는가? 어제는 왜 또 그렇게 고주망태가 되었는가?
해만 설핏하면 서글프고 허전해지는 소시민의 외로움을 나는 설명할 길이 없어 후룩후룩 국물을 들이킨다. 머리도 꼬리도 끊어진 콩나물대가리들이 말없음표(...)로 남는다.
“히야, 좋구만. 우리 오늘은 점심으로 콩나물 해장국이나 먹으러 갈까?”
“좋지. 혹시 한길에 목 여사님 나왔는지 이상개 선생님, 전화 한 번 넣어보지요.”
“그래 보까?”
비로소 담배를 끄고 들어가려는데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