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숨을 푹 쉬면서 안방으로 열찬씨를 끌고간 영순씨가
“지금 정석이는 지 방에서 슬비하고 도연씨는 슬비방에 누웠다.” “누웠다니? 애비가 둘오는데 나와 보지도 않고?”
“아이고! 내가 마 기가 차서...”
억지로 침대에 열찬씨를 앉히고 영순씨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녁 6시 반에 셋이 만나 저녁을 먹고 시내를 한 바퀴 돌며 자갈치에서 술이라도 한 잔 하려는 계획이었다고 했다.
“아, 정석씨!”
“예, 매형!”
서로 손을 내밀며 인사를 하는데 매우 반갑고 흡족한 도연씨와 달리 정석이의 얼굴이 영 어두워서
“석아, 니 어데 아프나? 얼굴이 와 그렇노?”
“아, 아이다. 누나를 하도 오랜만에 봐서 그렇다 아이가?”
하며 그때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삼겹살집에서 고기를 굽는데 예의상 어린 자신이 가위와 집게를 잡아야함에도 벌컥벌컥 소주만 들이켜고 안주도 잘 안 먹는지라
“야가 와 이라노? 정석아 니 좀 천천히 마셔라.”
제 누나가 통사정을 해도 그냥 묵묵히 술만 마시더니
“정석씨, 술이 고팠나? 그래도 좀 천천히 마시지. 그라다가 속 아플 긴데.”
도연씨가 걱정을 해도 또 묵묵히 술잔만 비워 어느 새 소주병이 세 개나 바닥이 나자
“안 되겠다. 이라다가 초저녁에 술 취하겠다. 고만 묵고 바람이나 좀 쐬자!”
슬비의 제안으로 자갈치바닷가를 한참이나 걷다가 곰장어 골목이 나오자
“누나야, 여서 딱 한 잔만 더 하자.”
바라보는 정석이의 눈빛이 몽롱해 슬비가 망설이는데
“그럼. 간단히 한 잔 더 해야지. 첫 만남에 어데 삼겹살 하나로 양이 차나? 회나 곰 장어 같은 해물도 맛을 봐야지.”
도연씨가 열찬씨를 첨 만났던 제주집으로 가서
“아저씨,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자 주인사내는 그냥 멀뚱히 쳐다보는데
“아, 우리 이동장님 사위된다는 사람이구나! 오늘 보니 인물이 더 훤하네.”
하며 탁자에 물병과 컵을 놓으면서
“그새 식을 올렸는가? 오늘은 각시하고 처남도 같이 왔는가베?”
정석이를 쳐다보며
“희한하게도 동장님하고 판박이네. 누나도 많이 닮았네.”
하며 뜰채로 곰 장어를 건지는데
“저기요. 아주머니, 우선 맥주라도 한 병 주세요.”
정석이가 또 벌컥벌컥 술을 마셔
“야야, 좀 천천히 묵지.”
슬비가 걱정이 가득한데
“술 먹고 안주 먹고 뭐 차례가 있나? 닥치는 대로 먹으면 되지.”
이번에는 소주를 한 컵 따라 맥주 컵에 부어
“자, 건배합시다. 누님 축하합니다!”
하고 한참이나 뜸을 들여
“축하합니다!”
도연씨의 들여다보는데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아
“석아, 니 와 그라노?”
영 못 마땅한 슬비와 잠자코 곰 장어만 굽는 도연씨와 셋이 술잔을 돌려 또 소주병 셋이 바닥에 나뒹굴자
“아저씨, 여기 화장실은 요?”
희한하게도 아직 백 원짜리 동전을 내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공중화장실의 표를 받아 주인아저씨의 안내를 받아 화장실에 갔는데 한참이나 시간이 걸려
“도연씨가 함 가보소.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쟤가 평생 저런 취한 모습을 안 보였는데 외국 가서 무슨 일이 있었나...”
걱정이 가득한 슬비가 도연씨를 보내는데
“아이 씨!”
비틀거리며 돌아오던 정석이가 도연씨를 빤히 올려다보더니
“아이 씨!”
사정없이 이마로 도연씨의 옆구리를 들이박아 둘이 나뒹구는데
“정석아, 석아! 니가 와 이라노? 와 이라노?”
놀란 슬비가 다가가 겨우 둘을 일으키는데
“아이 씨!”
이번에는 겨우 일어서는 도연씨의 턱을 사정없이 들이받는 것이었다.
“와이라노!”
깜짝 놀라며 얼굴을 감싸는 도연씨를 보고
“도연씨, 괜찮아요?”
이 쪽 저 쪽을 쳐다보는 슬비가 울상이 되었는데
“총각이 많이 취했네.”
주인아저씨, 아줌마까지 가세해 겨우 떼어 말리니 도연씨는 입술이 터져 피투성이가 되고 정석이는 제풀에 퍽 쓰러지면서 바지가 쓸려 터져버린 무릎에 역시 피가 흥건했다.
“아이구! 우짜꼬?”
눈물이 흥건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슬비를 보고 어느새 택시를 잡아온 아저씨가
“인자 택시만 태우면 총각은 잘 겁니다. 조심해서 가이소.”
하고 쓰러진 정석이를 차에 태워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야들로 온 저녁에 우째야 되겠노? 당신이 좀 알아서 처리하고.”
아직도 화가 안 풀린 영순씨에게
“보자아-.”
미간을 찌프리고 한참을 생각하던 열찬씨가
“일단 신평 도현씨 집에 전화는 해야지.”
“왜? 집에서 기다릴 낀데.”
“우선 얼굴이 엉망일 끼고 술도 취하고 기분도 엉망이라 보내기가 좀 그렇다 아이가?”
“그람 같이 재운단 말이가?”
“아이지. 술 챈 두 남자는 그대로 두고 슬비만 안방에서 당신이 데리고 자면 되지. 나는 거실에 자고.”
해서 슬비를 시켜 신평에 전화를 해서 처음 만난 처남남매간에 술자리가 길어지고 분위기도 좋아 나중에 정석이방에서 같이 잔다고 연락을 하고 다들 제방으로 들어갔는데 한참이 지나
“당신 안자고 뭐 하요?”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걸 듣고 영순씨가 나 오디니
“아이구, 저 놈의 술. 이적지 두 젊은 사내들 처리하고 나니 가리느까 당신은 와 또 술잉교?”
“그래 말이다. 나도 마음이 허전하기도 하고 뒤숭숭하기도 해서 말이야.”
벌써 김치 안주로 소주를 반 병 가까이 마신 열찬씨와
“걱정 말고 가서 자소. 자고 나면 뭔가 해결책이 나오겠지.”
“해결은 무슨 해결? 맨 정신으로 연구해도 생각이 날 똥 말똥 일긴데 저렇게 술만 마셔서...”
“아이다. 내게 술, 아니 소주는 단순한 술이 아이고 밥이고 약이고 길이고 살아가는 동력이 아니던가?”
“아이구. 말이사!”
“그 기 아이지. 내가 살아가면서 난관에 부딪혔을 때, 가족이나 주변사람과 갈등에 부딪혔을 때, 또 업무상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시를 쓰고 연애를 하고 하다 못 해 당신을 꼬실 때도 오로지 소주의 힘으로 해낸 것이 아니던가?”
“아이구, 또 시작이네. 시작!”
이렇게 한참이나 입씰레기를 하다 잠이 들었다.
이튿날 거실소파에서 일어난 열찬씨가 한참이나 곰곰 생각하더니 영순씨를 불러
“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당신하고 슬비하고 여자 둘은 가만 집에 있거라. 내가 완전히 사태를 수습하면 전화를 할께. 그 때 나오너라. 같이 밥이나 먹게.”
하고는
“정석아, 아들 니는 아비 온 줄도 모르고 이적지 자나? 빨리 안 나올끼가?”
일부러 문을 쾅쾅 두드리고
“김 서방, 자네도 나오너라?”
좀 약하게 문을 두드리니
“아버지!”
얼굴이 퍼석퍼석한 정석이 민망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고
“어르신!”
입술에 피딱지가 앉은 도현씨도 나왔는데 다행히 큰 상처는 없었다.
“자, 우리 집 남자 셋이 같이 나가보자. 사내들끼리 할 예기도 있고.”
하면서 현관을 나오니 둘이 주춤주춤 따라 나왔다. 아파트 뒤의 숲이 우거진 계단 길을 오르는데 술이 덜 깬 정석이가 격렬하게 기침을 하는 바람에 한참이나 기다려 도로로 나와 연제예식장 맞은편 대구탕집을 향해 한참이나 골목길을 걷다 문득 현대탕이라는 목욕탕간판이 눈에 들어오는지라
“우리 셋이 목욕이나 하자. 남 대 남으로 화끈하게 속마음도 털어놓고.”
하면서 계산을 치르고 들어가니 이직도 쭈뼛쭈뼛한 둘이 열찬씨는 물론 자기들끼리도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서 탈의를 해 삼각형의 구도로 옷장을 차지하자
“간단히 샤워를 하고 둘 다 탕 속에 들어오너라!”
하고 온탕에 들어가 한참을 기다리니 둘이 차례로 들어왔다. 한참동안 눈을 지그시 감고 미동도 않던 열찬씨가
“봐라, 정석아!”
아들에게 눈을 맞추며
“니 너거 매형 될 사람이 영 맘에 안 들더나! 그래서 저렇게 묵사발로 맨들었나?”
“아, 아입니다.”
황급히 눈을 내려 까는 정석이를 보며
“김 서방!”
“예, 어르신.”
“자네도 처남 될 사람을 보니 영 실망이고 정이 안 가나?”
“아, 아닙니다.”
역시 눈을 내려 까는 지라 다시 한참이나 뜸을 들여
“그라면 뭐 때문에 그래 치고받고 싸웠노? 첨 만난 사이에 무슨 묵은 감정이 있는 것도 아이고?”
“...”
“...”
“다시 안 볼 사이도 아이고”
또 둘 다 묵묵부답이라 다시 한참이나 뜸을 들여
“아, 알았다. 그렇구나!”
갑자기 신통한 생각이라도 난 듯
“자, 잘 들어봐라. 나도 젊어서부터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기도 하고 술도 많이 먹어보고 싸움도 많이 해 봐서 알 듯도 하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정석아, 니 누나가 시집간다카이 많이 섭섭하더나?”
“...”
“그래서 한 잔 먹고 쳐다보니 매형 될 사람이 누나 훔쳐가는 도둑놈같이 보이더나?”
“...”
“김 서방, 잘 들어봐라! 자네도 단 두 남매가 자라니까 많이 느꼈겠지만 태어나서 20년 이상 피차 남매이자 친구이자 유일하게 가깝게 대하는 이성으로 살아온 사이에 갑자기 하나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낯선 사람이 나타나서 데리고 간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어떻겠노?”
“...”
“거기다 술이 떡이 돼서 이제 우리 누나는 우리 식구가 아니다. 저 처음 보는 남자가 매가 병아리 채가듯 채가는 구나 생각이 들면 어떻겠노?”
“...”
“그러니까 피차 아무 감정도 없이 아주 자연스러운 발상으로, 지극히 인간적인 이유로 생긴 일이다! 둘이 다 동의하제? 혹시 질문이나 불만 있나?”
마치 논산훈련소 조교처럼 눈을 한번 붉힌 뒤
“자, 악수해라! 어젯밤엔 아무 일도 없었던 거다. 이 애비도 본 것도 들은 것도 없다. 알았제?”
두 사람에게 악수를 시키고
“먼저 나갈께. 대충 씻고 퍼뜩 나온나!”
하고 옷을 갈아입으니 어느 새 두 젊은이가 옆에 서는지라
“가자!”
한참이나 걸어 내려가 대구탕 집에 자리를 잡고 영순씨에게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해장하러 왔다. 당신도 슬비 데리고 오소.”
하고 대구탕 다섯을 시키니 음식이 나올 때쯤 도착해 나름대로 다들 속을 다스리느라 훌훌 국물을 떠 마시는 사이 차츰 영순씨와 슬비, 두 아낙도 얼굴이 풀리며 자연스레 이야기가 오고가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려는데 먼저 자신의 카드를 내민 영순씨가
“당신, 능력 있네. 멋져. 장인어른 될 자격이 충분하네.”
하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