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488)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29장 딸을 보내며⑤
대하소설 「신불산」(488)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29장 딸을 보내며⑤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3.06.07 08:00
  • 업데이트 2023.06.05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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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딸을 보내며⑤

기상천외한 부탁을 하는 표정이 너무나 심각해

“같이 자식 키우는 마음이야 똑 같지요.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눈을 질끈 감고 기꺼이 승낙하며
 
“그런데 단 한 가지 약속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무슨 약속인데요?”
“이 시가 절대로 어디에서 누가 준 것이 아니고 지점장님 스스로가 지은 것으로 절대 지은이를 발설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면서 비로소 술을 따라 권하기 시작했다.
 
 
 
일주일간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시집으로 떠나는 날
 
“신평이라면 정책이주지역으로 우리가 살았던 연산동 1공구처럼 판잣집이 다닥다닥한 데다. 3층 건물이라고 절대로 큰 기대는 하지마소. 보나마나 시장골목에 시멘블록으로 지은 좁다란 집일 끼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는 말처럼 너무 실망할까 봐 영순씨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영순씨의 자동차로 평생처음 상객으로 나서는 백찬씨와 함께 출발했다. 원칙은 바깥사돈과 수행자인 대반이 가는 것이 관례지만 모친이 매사를 주관하는 사돈댁을 배려해서 영순씨도 같이 가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허술하고 좁은 1층은 가게로 세를 내고 방 두 칸의 2층이 살림집이었다. 바깥사돈이 심신이 다 온전치 않아 안사돈과 외삼촌내외와 간단하게 수인사를 하고 큰상을 받아 식사를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딸을 주셔서.”
 
딱 한마디 덕담을 하고는 대화가 끊어졌다. 안사돈은 그렇다 치고라도 외삼촌 내외도 과묵한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백찬씨가 묻지 않는 말에 스스로 이야기를 꺼낼 사람도 아니었다. 간단히 술 몇 잔을 마신 열찬씨가 슬그머니 일어나자 사람들은 화장실에 가는 줄 알고 별 반응이 없었다. 신발을 신고 시장골목을 한참 걸어가던 열찬씨가 공중화장실이 아닌 주차해 둔 승용차를 향해 가며 영순씨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나오소. 집에 가자!”
“아니, 와 그라는데? 사돈한테 인사도 없이.”
“인사는 당신이 적당히 하고.”
전화를 끊은 지 얼마 안 되어 영순씨가 걸어오며
“당신이 와 그라는지 인자 알겠네.”
 
영순씨가 애서 담담한 척 말했다. 2 년 전 막내처제 영아씨가 시집갈 때 상객으로 간 열찬씨가 명장동 언덕배기 허술한 연립주택 앞에서 손을 흔드는 처제를 두고 오는 것이 안타까워 오후 내내 눈물을 질금거리며 슬비가 시집갈 때는 절대로 하직인사를 않고 올 것이라고 한 말을 기억한 모양이었다.
 
“당신도 많이 섭섭하제? 집도 허술하고.”
“마, 개안타. 당신이 미리 이야기해줘서.”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이는 목소리가 울먹울먹했다.
 
 
열찬씨내외에게도 신혼의 단꿈에 빠진 딸아이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봄이 찾아왔다. 사무실은 여전히 평온했고 힘든 일이 없으니 술 마실 일도 적어 퇴근시간마저 빨라졌다. 그러나 입춘이 지나 해가 점점 길어져 아직도 석양이 비쳐드는 아파트에 들어오면 이제 아들도 딸로 아무도 남지 않고 단둘이 버려졌다는 느낌마저 들어
 
“그 참, 옛날 사람들이 아이를 많이 낳은 아유를 알 것 같네. 한 둘이 출타하거나 출가해도 연방 다른 자식이나 손자손녀가 태어나 심심하거나 외로울 일이 없었을 테니까.”
“내가 젊어서 누구를 따라 점집에 따라갔는데 그냥 구경만 하는 나를 보고 명도할매가 니는 마흔 살만 되면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고생길이 끝나 편안한 노후가 몇 십 년이나 이어진다 카디마마는 서른아홉 되던 해에 당신이 사무관 되고부터는 내가 큰 걱정이 없이 조금씩 모으고 살았는데 쉰도 안 된 이 나이에 벌써부터 우리 둘이 이렇게 속닥하게 살게 될 줄은 몰랐제?”
 
하면서 혹시 슬비네는 퇴근을 했는지, 저녁은 먹었는지 궁금해 죽다가 전화가 오기라도 하면 하루사이에 무슨 궁금한 일이 그리도 많은지 어제도 그제도 했던 빤한 이야기로 3,40분을 소비하기가 예사였다.
 
딸네 집이 이사할 때 친정아버지가 가면 딸이 못 산다는 말 때문에 여태 못 가본 학장동의 아파트에 들렀을 때였다.
 
“아...!”
 
저도 모르게 열찬씨의 입에서 감탄이 나왔다. 본래부터 집을 꾸미거나 옷을 잘 입거나 귀금속을 몸에 부착하는 일에 관심이 없어 영순씨로 부터 이건 숫제 촌놈이 아니라 원시인이라는 소리를 듣던 열찬씨의 눈에도 이건 뭔가 단순하면서도 밝고 편안한 새로운 느낌이었다. 일제시대의 동경유학생들이 쓰던 <모던>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이구나 싶은데
 
“와요? 좋응교? 이 훤한 집이 바로 당신 딸네 집 아잉교? 내사 신혼생활을 단간셋방에서 당신 말하는 횃대 보는 아닐지라도 옷장이 없어 벽에 못을 치고 걸고 살았는데 딸이라도 이만큼 사는 걸 보니 눈물이 나게도 좋네. 당신은 안 그렁교?”
 
“...”
 
쇼파에 앉아 자기네 것보다도 더 크고 세련된 TV, 세탁기, 냉장고를 둘러보다
 
“야들 가전제품이 우리 집보다도 더 크고 신식이네?”
“그거사 그래야지. 그럼 당신은 아아들이 우리보다도 못 하게 지지리 궁상으로 살아야 되겠능교?”
 
하다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데 밥 먹는 장소와 식기만 바뀌었지 모든 반찬이 아침에 집에서 먹던 그대로였다. 직장을 핑계로 어미에게 의지하는 자체를 영순씨가 즐기는 것인지도 몰랐다.
 
 
주말에 친정이라고 주공으로 찾아와 저녁을 먹고 가기도 했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금요일오후에 열찬씨가 전화를 걸면
 
“아빠, 오늘 곰장어 사줄라꼬?”
“오늘은 대신동 정원집에 로스구이 사 줄라꼬?”
 
반색을 하며 영순씨까지 불러 저녁을 먹기도 했는데 말은 그렇게 하고서도 계산은 서로가 반반정도씩 했다. 딸이랑 사위랑 맛있는 저녁을 먹고 승용차로 고가도로를 지나오며 화려한 시가지의 불빛과 뱃고동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는 차분하게 갈아 앉은 밤바다를 보며
 
“여보, 우리가 정말 이렇게 잘 살아도 되는 걸까? 나는 마 꿈속을 거니는 것 같다.”
 
영순씨가 행복에 젖기도 했다.
 
 
주말이면 주로 등산으로 시간을 때우는 편이었다. 새로 결성한 여보산악회회원들과 때로는 여보산악회가 생기기 전에 최현조씨내외가 참여했던 일산산악회의 멤버로 합천의 가야산, 함양의 황석산, 거창의 기백산, 금원산등 주로 서부경남의 명산을 타기도 했지만 어떤 때는 열찬씨와 금찬씨 둘이 가벼운 산책삼아 배산이나 황령산을 오르기도 했다.
 
도시락이나 김밥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하산길 주변에서 닭볶음탕이나 칼국수를 사먹고 전통찻집이나 커피숍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내는 것을 영순씨가 무엇보다 좋아했다. 아마도 그렇게 사는 것이 자신의 삶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느낌을 주는 모양이었다.
 
 
슬비가 쓰던 방을 정리해 열찬씨가 평생을 열망했던 서재를 만들기로 했다. 서구청에 민원대나 책걸상 같은 사무용품을 전문으로 제작하는 업체에 연락을 하니
 
“기왕 맘먹고 서재를 꾸민다면 올곧은 선비정신과 깔끔한 지성미 중후한 인간미가 풍기는 브라운계통으로 일습을 갖추면 좋을 겁니다.”
 
하고 가로세로 방의 크기를 묻더니
 
“동쪽 창문을 향해 책상을 놓고 7개의 서가를 빙 둘러 놓으면 멋진 서재가 되겠네요. 방 입구의 무슨 재(齋)니 무슨 헌(軒)이니 하는 서재 이름을 현판으로 달면 한층 멋이 풍미가 나고요.”
 
서재께나 꾸며온 듯 말했다. 영순씨와 의논 끝에 슬비가 중학교시절부터 쓰던 조그만 책상을 꺼내고 두꺼운 갈색 목재의 은은한 느낌의 책상에 허리가 편한 <듀오>라는 철재의자도 넣고 7개의 서가를 넣으니 한방 가득 은은한 주황빛이 감돌았다.
 
슬비가 보던 책 중에 학교의 교지(校誌)나 졸업장, 성적표등은 따로 포장해 제집으로 보내고 여태껏 침대 밑과 다용도실의 구석구석에 라면박스에 담겨 몇 년, 또는 몇 십 년씩을 묵은 헌책들을 꺼냈다.
 
근간에 지하철에서 읽던 문고판과 여러 문인들이 보내준, 시집, 수필집에 동인지들과 사무관시험공부들 하던 교재가 쏟아지고 야간대학시절 푼돈을 아껴서 산 현대문학고본도 100여권이 뽀얀 먼지를 덮어쓰고 나왔고 <비오는 날의 연가>를 비롯한 네 번의 시집과 수필집 <달팽이와 부츠>도 몇 뭉치씩 나왔다.
 
더욱 새삼스러운 것은 한갓진 버든마을의 여드름장이 소년으로 저녁마다 순영씨 생각에 가슴을 울렁이며 들길과 갱빈을 걸으며 강 건너 어음마을로 길게 늘어선 가로등 불을 바라보며 화려한 도회와 황홀한 미래를 꿈꾸던 시절에 읽던 김동리의 <황토기>, 교회에 다닌 흔적인 헨드릭 반 루운의 <구약성경이야기>, 신석정의 <촛불>, <가람시조선>, 신지식의 <갈매기의 집>등 그 꿈의 바탕이 되어준 책들이 나온 것이었다.
 
거기다 중고등학교시절에 잉크를 찍어 펜으로 쓴 짧고 유치한 단편소설습작들 100편이 기록된 10여권의 대학노트, 백골부대 철책선 안에 군견(軍犬)대 파견을 나가서 여러 권의 대학노트 에 이어진 장편소설 한 편도 나왔고 더더욱 순영씨에게 보내려고 썼다 보내지 못한 연애편지가 가득한 노트까지 나왔다.
 
대충 장르별로 나누어 책장을 정리하던 열찬씨가 고개를 갸웃하며
 
“이상하다...”
 
여기저기 헌책무더기를 뒤지다
 
“당신 혹시 내몰래 책을 버린 기 없나?”
 
정색을 하고 묻자
 
“내가 버리긴 뭘 버려요? 내가 뭐 당신형수 같은 줄 아능교?”
 
하면서도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열 번도 넘는 셋방을 옮기면서
 
“한번 읽어봤으면 됐지, 귀신 나올 것 같은 헌책을 자꾸 모으면 우짜능교?”
 
연탄창고나 주인집 마루 밑에 나뒹구는 박스를 보고 혀를 차다 제대로 포장이 되지 않거나 누렇게 변색한 종이뭉치를 가끔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짐작은 하면서도 차마 내색은 못 했다. 그나마 영주의 형수가 그저 책이라면 원수처럼 이를 갈고 형님이 돌아가시자말자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재깍 고물장수에게 주어버린 것과는 달리 영순씨는 포장이 안 되거나 아주 험한 것만 다른 쓰레기와 함께 슬쩍슬쩍 버리는 것만 해도 다행은 다행이었다.
 
평이한 내용이지만 중국사개략을 파악하기에 가장 좋아 나이 들면서 표지가 닳도록 읽은 3권짜리 <이야기중국사> 상중하중 가운데 중만 한 권이 남은 점, 2000년 새 족보를 만들고 참고자료 구 족보 한 보따리가 없어져 난리법석이 난 일을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이리저리 이사를 할 때 종이뭉치쓰레기와 함께 슬쩍슬쩍 몇 뭉치 헌책을 버린 것 같아 종내 아쉽지만 흔쾌히 서재를 만들어준 아내에게 따지기도 무엇해서
 
“아이구, 답답해라! 누렇게 곰팡이 피고 냄새 폴폴 나는 헌책일수록 비싸고 귀한 건데 당신은 그저 세상만사를 외모만 보고 조금만 지저분하면 숨넘어갈 듯 내버리니 뭐 남는 게 있나?”
 
참고 참다 기어이 한마디를 뱉는데
 
“아이고 이놈의 집구석은 오나가나 책판이다. 이렇게 책을 박스박스 싸놓지 말고 돈을 그 반에 반이나 쌓아놓지.”
 
한숨을 쉬는 영순씨에게
 
“하여간 인자 더는 내버리지 마소.”
 
하고 아직 책장의 절반에도 책이 차지 않는지라 종이쓰레기에 책을 함께 배출하는 목요일아침에 일찍 일어나 아파트를 한 바퀴 빙 돌며 버려진 책을 뒤져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입문>, 찰스다윈의 <종의 기원>, 고은의 <화엄경>등 제법 귀한 책을 비롯해 그간 이리저리 구해 읽기는 해도 비싸서 살 엄두도 못 냈던 <삼국지>, <수호지>, <한국단편문학선집>등 여러 질의 전집도 수습하고 하루는 27권짜리 <동아대백과사전>을 발견해
 
“심봤다!”
 
소리치며 전화로 영순씨를 불러 개선장군처럼 트렁크와 뒤 칸 가득 싣고 와 서가를 채우니 갑자기 서재전체가 그득한 느낌이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