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2호-서평】 시간의 우물과 시심의 수맥 - 최영호
【장소시학 2호-서평】 시간의 우물과 시심의 수맥 - 최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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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6.09 11:31
  • 업데이트 2023.06.11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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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우물과 시심의 수맥

- 김영화 시집, 『코뚜레 이사』·차수민 시집, 『꽃삼촌』

 

최 영 호

 

희망으로 미래의 기억을 만드는 시의 깊은 감각은 멀리서 오고 있는 아름다운 삶을 지금 인간의 육체 속에 구현한다.

- 황현산

 

1

시는 위로만 하려고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고통으로 상처받고 타버린 삶의 재를 보관하는 것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기리기 위함이다. 남아 있는 자에겐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고통 속에서도 그 존재가 진정으로 꿈꾸고 추구하던 미래의 삶이다. 시는 남은 재가 아닌 그때 지폈던 불꽃을 생생히 지키며, 이를 삶의 희망으로 다시 타오를 수 있게 하는 데서 시의 응집력과 뚜렷한 의미를 제시한다.

무슨 초월적 존재나 난데없는 영웅주의를 찾자는 게 아니다. 괴로움과 슬픔을 위로하는 따뜻한 말의 가치나 소중함을 멀리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때의 상황적 진실을 보는 우리의 내면적 세계에 송곳처럼 예리하고 포괄적인 안목을 갖추자는 얘기다. 타인의 위로는 상대가 겪은 고통스런 시간의 자취, 슬픔에 겨워 흘린 눈물의 깊이까지 가 닿을 수 없어서 그 여운이 오래가지 못한다. 무너진 삶을 다시 시작하는 사람에겐 반드시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적극적으로 숙고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특히나 현실을 보며 상처받은 진실에 맞서는 시인이라면 잠재된 의미 영역의 탐색뿐만 아니라 타고 남은 재에서 발견한 희망의 불씨를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를 성찰하는 일이 어떤 설명보다 앞서 존재한다.

고통을 반추하는 시간은 괴로움의 강도나 눈물 자위만 숫자로 따지는 시간과는 다르다. 숫자 너머에는 ‘사람’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생각하고 반성하고 기억하고 회상하는 일을 디딤돌로 시계 바깥의 시간, 자신과의 관계로 맺는 카이로스의 시간 속으로 자율적 탈주를 감행하는 시간이다. 타인이 함부로 강요할 수 없는 시간인 동시에 뜻밖에 주어진 상황에 대한 냉철한 인식, 그 고통의 뿌리에서 시작해 함께 누릴 희망과 대화하는 시간이다. 이런 방식으로 삶을 천착하는 시간은 상처를 단순 치유하려는 보호복이 오히려 더 거북할 수 있다. 자기 정체성을 벼리고 메마른 고립 속에서도 존재적 의미를 꺼내려면 고독할 수밖에 없다. 고독은 외로움과 다르다. 외로움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긴다면, 고독감은 자기와의 관계에서 ‘나와야 한다.’ 고독감은 견디는 삶, 자기가 품은 생각을 뒤쫓으며 ‘거리를 두고’ 그 삶의 의미를 생각하고 겹겹이 쌓인 시간 속으로 진입하는 행위다. 삶에서의 의미는 순간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의 시간이 성찰로 만나는 시간의 우물에는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 둘 모두 녹아 있다. 이 물이 우리 삶에 다시 흐르면 과거의 순간들이 달리 해석되고, 고였다 다시 흐르면 약동하는 생명성과 다양한 시적 영감의 발생 조건이 된다. 그 여파는 우리 삶에 불연속적 충격으로 확산된다. 2020년 6인 공동시집 『양파집』을 출간한 바 있고, 이번에도 같은 시기 같은 출판사에서 펴낸 김영화의 시집 『코뚜레 이사』, 차수민의 시집 『꽃삼촌』은 응집된 시간의 우물과 시심의 복잡한 수맥이 흐르는 곳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2

대체로 사람의 기억은 삶이 머무른 시·공간과 분리될 수 없다. 또 체화된 기억이 호출될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시간 순서가 없다. 현실에 발을 딛고 미래의 시간을 앞당겨 살지만, 기억은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무질서하게 튀어나온다. 아무런 계기도 없고 뒤죽박죽일 리는 없지만, 도대체 삶에 물든 기억을 시인은 어떤 상황에서 호출하고 어떻게 재현하는 것일까?

축적된 기억은 한 존재의 고유한 의식 과정의 산물이다. 그래서 기억에 투영된 의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김영화의 시 「낙동탕」은 여러 서로 다른 기억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강을 이룬다. 동서고가도로를 지나던 시인의 시선에 ‘낙동탕’이란 글자가 꽂힌다.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기억 저편의 삶으로 눈길이 옮겨지고 뇌 속에선 메아리치는 존재들이 하나 둘 호출된다.

 

낙동탕에 가면/강 닮은 얼굴들이 허리를 풀고 누웠겠다/피혁공장 김 주임과 스물일곱에/신접살림 차린 총무과 미스 진 언니/매운 가죽내도 슬며시 탕에 녹여 넘기고/이십 년 분할로 장만한 아파트에서 새로 배운/서각도로 장승 긁고 있을까/새벽시장 한복집 영진 오빠도 밤새/아파트 경비 서고 퇴근길/한 땀 푹 흘리고 가겠네

- 「낙동탕」 가운데서

 

삶이 깃든 공간은 시인 혼자만의 시간일 수 없다. 같은 공간에 살던 존재들과 함께 나눈 공동의 시간이다. 시인의 시간도 그 일부다. 다만, 동일 공간에 깃든 시간의 깊이는 서로 달라서 동일성의 비동일성의 시간이 되고, 여러 것들과 혼성된 시간이다. 그러나 함께한 그때 그 존재들도 시인의 기억에 오롯하게 등장하는 것처럼 ‘지금 거기’ 그대로 머무르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들의 있고 없음과는 무관하게 살아 있을지 모른다. 낙동탕이란 글씨에 시선이 꽂히는 바로 그 순간 시인의 삶 속에 펼쳐진 파노라마처럼. 그것도 아주 생생하게.

김영화 시의 기억에 응집된 시간은 행위 주체가 부재로 존재하면서도 공간적 관점에서만 생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러 겹의 시간적 층위에 산재해 있고, 각별한 정서적 공감으로 직조되어 있다. 망막 너머로 시선이 옮겨질 때 놀랍게도 이들은 부활한다. 부재로 존재하는 이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질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 모두 순수하거나 순백의 영혼이란 얘기가 아니다. 그보다 그 존재들의 서로 다른 삶을 시인이 온전히 받아들였다는 것이고, 그들에게 비친 시인의 존재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다. 다름을 차별로 인식하지 않고 차이를 부정하지 않은, 김영화 시인의 포용적 삶과 타인에 대한 신뢰가 만든 시간의 우물이다. 길든 짧든 일정한 삶이 투영된 시간은 나름의 이야기를 갖는다. 이런 이야기는 외부의 바라보는 시선으로는 회상하기 힘들다. 특히나 자기만의 방식과 경험에 기초하여 부당하게 일반화하면 이야기의 고유한 특성이 사라진다. 김영화의 시는 어떤 상황이든 밖에서 안을 보지 않는다. 그보다 안에서 더 안쪽을 주시하고, 깊은 마음에 여울지는 삶의 안과 밖을 동시에 주시한다. 같은 시간에 투영된 이야기가 다양하고 풍부한 이유는 여기에 있고, 몇 마디 시어에 응축된 삶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도 그래서다. 이것은 그들과 허물없이 맺은 밀접한 관계에 기인된다. 그렇지 않다면 목욕탕에 들어와 몸을 씻고 찜질방에 누워 하루를 마무리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강 닮은 얼굴들이 허리를 풀고 누웠겠다”고 갈무리할 수 있겠는가! 다들 한 곳에 누웠지만 각자 주어진 자신의 하루를 어떻게 살았는지를 시인은 익히 알았기에 가능했다.

물론 김영화의 시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시인의 생활양식, 그리고 세계관이 꼭 일치해서 이런 시적 표현이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시인의 내면 풍경 가운데는 전혀 낯모르는 존재들과 만남에서도 타인과의 공감어린 삶이 곧잘 제시된다. 시·공간의 경계를 넘어 출몰하는 사람들은 가끔은 시인의 일상사에도 나오고 먼 유년 시절의 삶에도 등장한다. 시장 한 구석에 좌판을 깔아놓고 졸거니 깨거니 하며 장사하는 주인 곁을 지나치던 시인에게 “덥석 못난이 사과 한 봉지”(「그 여자」) 들려준 시장의 아주머니, 어릴 적 엄마가 들려주고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그 문둥이가 떡하니 앉아 팥죽을 먹고”(「오월 팥죽」) 있었다던 문둥이는 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탯줄이 없다면 우리로선 전혀 알 수 없다. 게다가 이야기로 재생되는 필연적 환영이 없다면 거의 만날 수도 없는 존재다.

그런데 낯모르는 사람도 자주 나오지만, 김영화의 시에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람들도 여럿 있다. 그들 대부분은 죽음과 밀착되어 있다. 누구든 태어나면 죽기 마련이다. 예외는 없다. 사정이 이토록 엄중하다지만 죽음을 자기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김영화의 시는 죽음의 그림자가 일상사처럼 따라다닌다. 시인이 죽음과 남모를 관계가 있거나 삶의 일정 부분이 죽음에 노출되지 않았다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태어남과 죽음은 살아 있는 존재라면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일방통행식 통과의례다. 그 시작과 끝은 이미 정해져 있고 함부로 되돌릴 수 없다. 삶과 죽음에서 본질은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사느냐다.

놀랍게도 김영화 시인은 죽음을 아주 일찍부터 만난 듯하다. 남들은 듣기만 해도 무섭고 두렵던 죽음을 시인은 기구한 운명처럼 듣고 자랐다. 그중 하나가 “고작 열두 살”(「태균이」)에 숨을 거둬 어른들이 “돌무덤”(「태균이」)이 될 거라고 한 태균이고, 다른 하나는 나이 다섯 살 때 겁먹은 삼촌 대신 사할린으로 끌려갔다가 유골로 돌아온 “아버지 이경갑”(「귀향」)이다. 실제로 ‘태균이’가 시인의 친한 친구였는지, ‘아버지 이경갑’이 시인의 친부였는지, 호구조사식 존재 확인은 김영화의 시가 겨냥하는 목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죽음이 시인에게 각별한 삶의 중력으로 작용한 점이다. 사느냐 죽느냐를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지만, 그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지점에서 운명적 삶을 살다간 존재들의 흔적이 도리어 자신의 삶을 받쳐주고 있다는 데 주목했다.

 

오 년 내내 결석과 입원이 잦던 아이는/부산 큰 병원에서 수술하고도 기운을 못차렸다/방과 후 숙제를 들고 가면 친구가 그리워/무언가 자꾸 물었다/가슴까지 꺾인 목 고개를 베개 탑에 파묻고/가까스로 가지색 입술을 달싹거리면 겨울바람 소리가 났다/고작 열두 살

- 「태균이」 가운데서

 

사할린 최북단 치욕의 나날/해방된 줄 모르고 살아/목숨 부지하다 끝내 놓은 숨길/뿌리내리지 못했던 주검/옛 소련 처음/유골로 반출 허가받아/마흔아홉 아들 품에 안겨/돌아왔다/서울올림픽 끝난 이듬해였다

- 「귀향」 가운데서

 

김영화의 시가 재현하는 죽음은 삶과 죽음이 별개로 구분되어 있지 않다. 그 죽음은 삶과 함께 머무르는 죽음인 동시에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일시적 죽음과는 다른 모습이다. 기이하게도 깊은 슬픔으로 칩거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죽음은 스스로를 조율하며 살아 있는 삶을 떠받쳐 주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가 그 죽음의 그림자를 덜어내고 지속가능한 삶으로 연결시키는 장면은 죽음이 삶과 동떨어져 있다거나 전혀 낯선 세계로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가 보기에 진짜 죽음은 언제나 살아 움직이는 삶과 이어질 수밖에 없다. 즉,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역시 삶의 새로운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서른 몇 즈음/물레로 손수 삼아/두 벌 지어 /한 오십 년 모셨다가/아버지 태워 보내고/장롱 속에 남긴 한 벌/무술년 한더위에/자락 이어/내 이불 만드셨다

- 「삼베」 가운데서

 

생로병사, 관혼상제는 살아 있는 존재가 비껴갈 수 없는 일련의 통과의례다. 각각의 의례는 흐르는 시간이 창출해낸 격식을 따른다. 타자가 개입할 수 없는 기쁨과 슬픔의 변증법인 죽음은 다른 격식보다 그래서 더욱 엄숙해야 한다. 죽음의 격식은 우리 자신으로의 안락한 복귀, 자기 안에서의 만족을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들고, 그것과의 확실한 결별을 선언한다. 우리가 가졌던 것, 누리던 것, 품었던 것 모두와 이별하는 과정이 죽음이다. 현존재의 우월적 욕망을 냉엄하게 차단시키는 죽음을 자기 시의 안받침으로 삼는 김영화의 시는 죽음이 삶의 다른 모든 순간들과는 단절시키지만 이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에게는 차원 다른 시간, 차원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한편, 죽음의 고통은 현존하는 삶을 정화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병석의 어머니가 정월 대보름에 한지 태워 간절히 빌던 소원(「소지」)도, 세상에 공연한 목숨은 없다(「효도」)는 경고도, “부어오른 음경을/쉰 넘은 딸 앞에 드러낸 채”(「호스피스 병동」) 울부짖는 사내의 바싹 마른 체념도, 아들 일곱 살에 청상된 어머니가 늘 아들 무서워하며 살다가 팔십칠 세로 임종하자 그 성질 사납고 두렵다던 아들이 달려와 “엄마 엄마 아기처럼 울었다”(「울음」)는 그 울음 모두 죽음을 통해서만 끌어내 보여주는 삶의 뿌리다. 김영화의 시는 시간의 우물 가장 아래 놓인 죽음을 잊지 않는다. 삶과 함께 기거하는 죽음을 늘 자기 곁에 두고 기억하는 시인이기에 ‘적어도’ 자신이 살아온 나날의 삶이 ‘쓰레기’가 되는 것을 경계하고 관념이 부추기는 비약을 주시한다. 이는 현재 살아 있는 경험이 순전히 자기만의 것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또 하나의 시도다. 김영화 시인이 시화화 하는 죽음은 우리를 초월하는 시간의 계시인 동시에 축적된 시간의 우물처럼 성격상 언어화하기 쉽지 않은, 우리의 불연속적 삶의 의미를 이어주는 연결성과 응집성을 함께 갖는다.

 

산다는 것은 쓰레기를 만드는 일/먹고/마시고/입고/쏟고/뱉고/목구멍에서 항문까지/정수리에서 입술까지/쓰레기나 남기는 것이 삶은 아닐진대/오늘도 쓰레기를 자정까지 흘렸다/한 오십 년 흘린 쓰레기/한 바퀴 돌아 쓸어 담을 시간은 남았기나 한가/그늘에 널어 말린 심장에 북소리 난다/퍽퍽

- 「쓰레기」 가운데서

3

차수민의 시는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물음 하나를 떠올려준다. ‘시심을 촉발시킨 수맥’에 관한 물음이다. 원래 수맥은 한 갈래가 아닌 여러 갈래 물줄기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삶은 탁 트인 벌판을 걷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시시콜콜한 것들이 가득하고 온갖 것들이 즐비하며 걷다가 멈춘 곳마다 유독 그 자리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과 그 너머까지는 짐작할 수 있으되 벌판 전체는 다 볼 수 없고 길 아닌 길을 걸으면서도 보이지 않고 만져질 수도 없는 기쁨과 슬픔을 계속 만나며 걸어야 하는 곳이 삶이라는 벌판이다. 이런 우연성의 중첩된 시·공간에서 차수민의 시심詩心은 느릿느릿 이동하고, 과정마다 시·공간과 접점을 이루어 흥미롭게 표출된다.

 

시를/왜 써야 하는지 물었다/그는 조용히 찻잔을 들어/보이는 대로 말해 보라 했다/찻잔은 하나인데/모두 답이 달랐다/이제 삶을, 사랑을 묻지 않는다/지금 나를 묻는다.

- 「시인의 말」

 

「시인의 말」에 적은 “지금 나를 묻는다”는 차수민의 시를 읽는 길잡이 문장이다. 차수민의 시에 드리운 시심의 수맥水脈, 시심의 발원지로 들어가는 통로다. 가는 물줄기가 흐르다 고이면 우물이 되고, 그 우물의 발원지를 따라가 보면 보일 듯 말 듯한 샘과 만난다. 하지만 가늘고 여린 샘물이 어엿한 우물을 이루기까지는 지난한 시간의 흐름이 필요하다. 땅에서 솟은 물이 흐르다가 스몄다가 다시 흐르기를 수없이 반복해야 우물물로의 변형이 가능하다. 두레박을 내리거나 펌프질을 해서 길어낸 우물물에서는 물의 발원지를 찾기 어렵다. 알 수 있는 것은 물의 탁도와 물빛 정도다. 물맛은 눈으로 물을 보면서도 알기 힘들다. 촉각, 시각, 청각, 후각 등을 총동원해도 쉽지 않다. 미각만 감지할 수 있는 것이 물맛이다. 차수민 시의 수맥은 어떤 물맛을 지니며 그 물줄기는 자기 삶과 동일한 비례관계를 갖고 흐르는 것일까.

차수민의 시심은 어릴 때부터 수맥이 형성된 듯하다. 열다섯 살 나이에 평상에 누워 초승달 곁에 뜬 별을 보며 “밤하늘 당겨 덮었다”(「별에 바치다」)는 시적 표현에서도 알 수 있다. 그의 시심은 세심하면서도 품이 너른 감수성을 지닌다. 물론 이것을 당시 시심 전체로 보긴 어렵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그의 삶에 물들었는지는 나고 자란 고향 고성에 대한 애향심만 봐도 ‘조금은’ 알 수 있다. 자기 삶이 깃든 시·공간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는 증거다. 낱낱을 말하지 않아 짐작만 할 뿐이지만, 시인이 과단성 있게 “고성 사람이 고성을 몰라/모르면 고향을 뺏기는 거지”(「대포」)라고 할 정도로 고향사랑을 자기 고백에 가까운 시로 썼다면, 까닭 없는 발로라고 보기 어렵다. 우리나라 답사문화의 붐을 일으킨 한 마디, ‘알면 아는 만큼 보이고 사랑하면 진짜로 보인다’는 유행어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를 통해 접한 바 있으나, ‘모르면 빼앗긴다’는 옹골찬 역설은 구체성 없는 논리적 비약임에도 말을 한 시인의 심연을 엿보게 한다. 아마도 시인과 같은 지역사람이면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이를 단초로 시인의 시심으로 돌진할지 모른다. 시인은 왜 이런 무지막지한 주장을 대담하게 드러낸 것일까? 시인의 치기어린 고향사랑인가, 아니면 믿거나말거나 식의 응집된 자부심인가?

얘기가 나왔으니 살짝 더 살펴보자. 사람마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을 아끼는 것은 차수민의 경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느 지역이든 자기 고장의 애향심은 없지 않지만, 그것이 하루아침에 생길 수는 없다. 역사적 전통이 있다는 곳일수록 나름의 구심점이 있다. 그 구심점이 지역의 공동체 의식을 결집시킨다. 그런데 지역사랑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문화적 정체성은 딱히 시·공간 자체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람’에게 추수될 때가 많다. 사람에게 지역 정서가 깃들고 스며들 때 오래도록 잊히지 않고 세력도 강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차수민의 시는 이런 강한 애향심을 뒷받침해 줄 구체성은 잘 안 보인다. 왜 그럴까? 시집을 통독하다 보면 하나 집히는 데가 있다. 그것은 다른 형태로 표출된다. 어떤 상황적 긴박감 속에서도 자존감을 잃지 않는 시인의 품안에 투영된 삶의 태도다. 고향사랑과 동일한 모습은 아니지만, 비장소성의 불연속적 차원에서 배태된 시인의 삶의 태도는 고향 고성이 다른 곳이 아니면 다른 곳에선 얻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일명 잠꼬대 사건이 담긴 시에서 시인의 이런 자존감의 일단이 목격된다. 가난하던 중학교 시절, 시인은 약방도 없는 시골의 보건소장 집에 얹혀살았다. 그때의 일화를 적은 시다.

학교에서 반공 교육을 받은 날/꿈을 꾸었다/총칼을 어깨에 멘 나는/잡히지 않는 빨갱이 이름을 외치며/뒤쫓다 멀어지자/철컥철컥 자물쇠를 따듯/있는 욕을 다했다/-(줄임)-/어젯밤/너를 깨워/당장 네 집으로 보내고 싶었다

- 「고맙습니다」 가운데서

 

꿈속에서 욕을 얻어먹는 ‘빨갱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어린 시인을 보살펴주는 보건소 소장이다. 학교에서의 강도 높은 반공교육 탓인지 돌봄과 배려 속에서 사는 어린 시인의 꿈속까지 그 환영이 겹쳐져 엄습한다. 사람의 뇌에서 의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고, 그 비밀을 밝히려는 뇌 과학과 심리학의 구분은 첨단과학시대인 지금도 불명확하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알면서 그러는지 진짜 모르고 그런지, 곧이곧대로 들은 보건소장과 꿈속 잠꼬대를 한 어린 시인 간에는 묘한 사건으로 나타난다. 보건소장으로서는 간밤에 일어난 일을 캐물을 수도 없는 처지여서 난감하고, 어린 시인으로서도 꿈속에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 사실대로 실토하자니 보건소장의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어 난감하고, 아니라고 하자니 이를 들은 보건소장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라 당혹스럽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더 많은 말을 하는 셈이다. 거짓과 진실 구분도 아니고, 겸연쩍지만 꿈과 현실 사이의 어긋남을 차수민은 또박또박 시로 적는다. 바로 이런 시적 태도에서 우리는 그의 시심의 일면을 읽는다. 여리지만 고집스럽고 세심하지만 강한, 그 시심 말이다.

엄격히 말해 사람 사는 데는 이상적인 삶의 조건은 없다. 잘 사는 사람도 이삿짐을 꾸릴 때 보면 구질구질하듯 모든 것이 다 갖춰진 삶도 오해를 불러내는 일이 가득하다.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듯한 사건도 여럿 생긴다. 차수민의 시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상사를 관찰하는 데 예민하다. 이를 시험적 상황 인식으로 간주하기엔 시인의 자의식이 남다르다. 실제로 모든 사건은 전체적으로 보면 어떤 과정의 일부이고, 하나의 사건은 왕왕 다른 사건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직면하는 과정으로서의 사건 자체가 최초의 사건일 때도 있지만 그것 자체로 지나치게 극적인 것이 아닌 한, 그 순간만 포착해서 시로 쓰기란 해당 사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과단성이 있지 않으면 어렵다. 다시 말해 예민한 관찰력 없이는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얘기다. 시인이 자기 나이를 훌쩍 뛰어 넘어 “이녁/하늘살이는 어떻소/내는 아무 생각도 없소”(「할미꽃」)라고 읊조리며 내뱉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할머니로 빙의한 시인이 할머니의 속마음을 시로 적는 데는 제3자적 관찰자 경험만으로는 곤란하다. 채울 수 없는 애달픔이 고스란히 전달되지 않아서다. 할머니의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들어줄 상대도 부재로 존재한다. 이를 감안하면, 시인의 시심에는 상징적 목소리까지 포함된 듯하다.

본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는 행위 이전에 우리는 보고 있는 주체가 어딘가에 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보기 위해 행위를 멈춘다는 얘기가 아니다. 행위 주체자의 관점을 말하는 것이고, 그의 견고한 입장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아무리 친밀한 사이라도 보는 행위 속에서 만나면 저절로 방해받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관이 나오게 된다. 차수민의 시 「꽃삼촌」은 겉보기엔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데 지켜보는 내내 가슴 아픈 사건, 수없이 시간이 흘러도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건이 우리 곁에 엄존한다는 것을 묘파한다.

 

왼 얼굴 목으로 꽃이 핀/외삼촌/어쩌다 엄마 찾아와/정지에서 만나곤 인사도 없이 가시더니/붉은 꽃 떨어졌다고/쪼그리고 앉은 솥단지 운다.

- 「꽃삼촌」

 

단 여섯 줄 밖에 안 되는 짧은 시다. 하지만 행간에 흐르는 시간의 무게는 깊고 무겁다. 겉보기엔 텅 빈 시골집 풍경이다. 거기에 외삼촌, 엄마, 그리고 두 사람을 지켜보는 시인, 도합 세 명만 있다. 그런데도 시·공간은 팽팽한 긴장, 고요한 분노, 슬픔의 애환이 지배한다. 누가 누구를 탓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안다. 비가시적인 상황이고 순간적인 현상이지만, 시인의 시심은 시간의 연결된 의미를 단번에 알아챈다. 시인의 시선은 외삼촌의 “목으로 꽃이 핀” 그 꽃만 보이고, 왔다가 간 외삼촌의 사라진 자취만 깃든다.

세상에 사람의 목까지 차오르며 피는 꽃이 있을까? 없다. 그 꽃은 꽃으로 비유된 신체적 흔적이거나 분노다. ‘지울 수 없는 흔적’이다. 이런 상처와 흔적을 몸에 지닌 외삼촌이 ‘어쩌다’ 엄마를 찾아왔다가 가는 것은 순간적인 행위지만 돌발적인 행위가 아니다. 알려진 상황이거나 알려지지 않은 상황, 시인의 눈엔 이 둘의 의미와 수수께끼가 혼재된다. 외삼촌의 ‘붉은 꽃’과 엄마의 ‘솥단지’ 울음은 둘 다 시간의 흐름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시인의 시심은 바로 이 지점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시심의 깊이는 조용한 분노와 침묵의 긍정, 만나고 이별하는 외삼촌과 엄마의 눈길 속에 있다. 그래서 이를 시로 적은 시인의 시심은 눈으로 보는 그 어떤 이해보다 정확하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이 시의 모호성이 태어난다. 시인이 상황을 보는 순간과 상황을 시로 적은 순간을 우리가 바라보는 순간, 그 사이의 심연에 시적 모호성이 놓인다. “붉은 꽃 떨어졌다”는 시적 의미가 모호한 것도 그래서다. 외삼촌과 엄마 사이에 놓인 혈육의 단절을 의미하는지, 차마 서로 말하지 못할 비극적인 그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인의 시심은 말하지 않고 품에 안고 있다.

확실성은 순간적일 수 있고, 의심은 지속을 필요로 한다. 시심이 그 상황적 의미를 알아채는 것은 그 둘로부터 생긴다. 외삼촌의 방문 순간은 시인이 그 순간 속에서 시간의 지속성을 감지할 수 있을 때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시를 통해 숨겨진 의미를 생각할 때 우리는 이미 그 위에 엄마와 외삼촌 사이에 흐르는 시간의 과거와 현재를 덧붙여 읽을 수 있다. 시로 적힌 순간과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을 한꺼번에 읽어야 하는 것은 사실 시 읽기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설명도, 어떠한 줄거리도 나오지 않는 평범한 광경에서 ‘생생한’ 느낌을 갖게 하는 시라면 그 시심의 발원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시심을 ‘포괄적으로’ 찾고 싶어 할 듯하다.

 

시줄이 엉키는 밤/별이 총총한데/내 머리 어느 낱말밭에서/시서리를 해야 하나.

- 「시서리」 가운데서

 

시쓰기에서 눈치코치애살은/낯설게 하기, 비틀기, 경계 밀당 따위/시가 내게 어려운 이유다.

- 「눈치코치애살」 가운데서

 

차수민의 시심은 여리지만 건강하다. 살아 있는 경험이 깃들고 스며든 시심이다. 가난이 배움에 대한 열정을 가로 막아도 배운 만큼의 지식을 세상에 펴고 싶은 열망까지 차단할 수 없다(「올챙이의 꿈」). 더욱이 나이가 들어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여럿 목격하면서 어릴 때 누군가로부터 도움 받은 체화된 고마움이 생각나고 자신도 모르게 싹튼 사람에 대한 애정과 보살핌의 소중함에 이끌려 전문 지식은 다소 부족하지만 관련 분야를 찾아가 봉사하고 싶은 뜻을 폈다가 자격증 여부로 거부된다고 하더라도 그런 거부의 손짓 때문에 자신이 지닌 본능과 자존감까지 정신적 외상을 입지는 않는다(「가로등」). 어렵던 성장기 시절, 주간엔 일을 하고 야간엔 공부하는 딸이 회사에 낼 주민등록등본을 후문으로 넣어주고 떠나는 아버지의 ‘빼입은 양복’보다 시인은 뒷굽이 닳은 아버지의 신발에 먼저 시선이 꽂힐 정도로 눈썰미가 깊고(「구두 뒤에서」), 전매청 담배 차를 몰며 조합비까지 받는 기사님이 고향 내려간다는 말을 듣고 차비랑 챙겨주는 마음보다 역도 선수 출신의 그의 ‘뭉툭한 손’에 더 눈길이 간다(「박 기사님」). 이런 시인의 시심에는 유년의 살가운 존재들도 불균일한 형태로 함께 살아 있다. 없는 살림에 어머니로부터 받은 촌지를 되돌려 준 “누운 밤 벌떡 일으키는/그런 선생님”(「구속」)도 있고, 졸음에 겨워 방아 찢는 토끼도, 중간고사를 앞두고도 야간 일 때문에 잠을 청하는 잠순이도, 아버지상을 치른 방은이를 위로하러 와서 삼겹살 앞에서 등록금 걱정을 함께 하는 순옥, 진영, 정미도 모두 한 존재로 동일화되어 있다.

힘든 성장기의 삶 저변으로부터 저절로 밀려나오는 성정을 붙들고 살면서 삶의 연속된 경험에 내장된 시심을 끌어내어 시로 쓰는 차수민의 시가 왜 모호할 수밖에 없는데도 시심의 방향이 갈수록 더 자기 자신을 향해 깊어지고 있는지는 주목해 볼 일이다. 그것은 그의 시심이 단지 직관적이고 순식간에 이루어지지 않은 탓일 수도 있고, 선천성 외로움이 어릴 때부터 몸에 베어든 탓일 수 있다. 그래서 차수민의 시심이 점점 더 자기 삶 안쪽으로 깊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마루 구멍 사이로 한숨이 샌다/걸터앉으신 어머니//갓 태어난 니를 방구석에 밀치고 내 몰라라 내 몰라라/한참을 지나 들쳐 보니 눈알이 초롱한기라/죽었으모 몰라도 그래 젖 물리가 이리 안 컸나/참 서운할 뿐했다/딸 셋 내리 낳고/일곱 해나 가서/생긴 니가 아들일기라 믿은기라//그래가/그랜기라.

- 「괜찮아예」

 

4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다녀야 하는 시대다. 마스크 착용 허용범위가 조금은 풀렸지만 변종 바이러스가 언제 또 급습할지 모를 일이다.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마스크를 벗으면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했고, 보이지 않는 것이 세상을 휘어잡는 시대였다. 변신의 변신을 거듭하며 숙주를 찾는 바이러스는 생물학적 경계를 넘어 전 지구적 경계도 허물었다. 고통과 죽음이 만연한 가운데서도 우리의 삶은 멈출 수 없다. 코로나19 이전 삶을 바라지만 돌아가긴 힘들고, 돌아가더라도 예전처럼 살기 어렵다. 코로나19 이후의 삶이 어떻게 도래할지는 시쳇말로 ‘겪어봐야 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생존을 위한 정보를 나눈다. 관혼상제의 불참에 대한 아쉬움도 정보통신기술(ICT)을 통해 전한다. 우리가 축적한 각종 리츄얼(의례)이 사라지고 있다. 사랑하던 사람이 죽을 때 갖는 애도는 단순한 의례가 아니다. 고인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슬픔이 밀려오면 그 슬픔에 응답해야 삶의 시간으로 복귀할 수 있다. 일상적 삶으로 돌아오는 통로가 막히면 언제까지 슬퍼해야 하고, 언제 다시 일상을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한편에선 가능한 많이 접속(connect)하라고 하고, 다른 한편에선 가급적 접촉(contact)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차단한 세상을 보이지 않는 것이 다시 열어야 할 때다. 사랑의 힘과 세계적 연대(solidarity)가 절실하다. 사랑도 바이러스처럼 보이지 않고, 연대도 보이지 않는 결속이다. 지난 70여 년에 걸쳐 개발된 것도 빠르다는 백신(vaccine)이 불과 3년 만에 나왔다. 기적 같은 일이 사랑과 연대의 힘에 의해 이루어졌다. 단기간의 코로나 백신 개발은 우리가 뭉치면 초유의 일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 전무후무한 사례다.

그래서 시는 더욱 위로만 하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삶에 투영된 살아온 시간 너머의 시간을 반추해 봐야 한다. 서로 다른 시간끼리 부대끼며 견뎌낸 시간이지만, 거기엔 이질적인 것이 이합집산 되어 같은 것 속의 다른 것들이 중첩되어 깊이 숨겨져 있다. 김영화의 시와 차수민의 시는 삶의 이합집산과 중첩된 현존 사이에서 각자 선택한 순간을 기억하고 이를 미루어 추체험하며 경험과 언어, 사고와 현실에 비례해 자신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들려준다. 멀리 있는 죽음도 가까이 있는 것처럼 받아들였고, 체화된 유년의 삶에서도 생동감을 불러냈다.

그러나 시간의 우물이 한 줄기 물로만 이루어지지 않듯이 하나의 장소도 하나의 관계로만 형성되지 않는다. 곳곳의 물이 흘러든 것처럼, 그 장소는 나와 관계 맺은 시간들이 층층이 누적되어 있다. 나와 관계 맺은 시간, 즉 재구성된 나만의 시간은 시시각각 탈바꿈되고 있다. 미리 설정된 형식적 틀로는 이런 시간의 우물은 창조될 수 없다. 문학의 장소는 같은 공간도 다르게 보게 만든다.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자기만의 시간이 이 공간을 지배한다. 크로노스의 시간과는 달리 나와의 관계 속에서 재구성되는 카이로스의 시간은 내가 발견한 시간이다. 김영화의 시가 재현한 시간의 우물은 같은 죽음을 보면서도 다른 죽음을 연상시키는 시간의 축적이고, 동일성의 비동일성의 세계로 우리를 다시 풀어놓는다.

엄밀히 말해 문학의 장소는 비장소성의 장소다. 기억 저편의 세계를 바로 우리 눈앞에 펼칠 수 있고, 손을 뻗치면 금방이라도 닿을 듯해도 잘 잡히지 않는 장소다.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이루어진 자기만의 장소, 즉 문학의 장소는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이 글로 재탄생시킨 장소다. 이런 비물질성의 장소, 삶 속의 삶의 장소에 차수민의 시는 시의 촉수를 펼친다. 거친 판단이지만, 차수민의 시는 여리지만 강인한 시심으로 재구성된 원초적 그리움의 표현이다.

김영화와 차수민의 시의 유일하게 ‘올바른’ 해석이란 없다. 두 시인의 시에는 보이는 시간 너머 수많은 이야기가 가득하다. 보이지는 않지만 체화된 이야기를 외면할 수 없는 시인의 시는 위로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이야기 하나하나에 실린 삶의 흔적과 무게는 현실을 해체/재구성하는 바탕이 되어주고, 비가시적인 기억까지 현실로 끌어낸 후 미래의 기억으로 풀어놓는다. 이런 과정이 두 시인에게 시로 찾아와서 시간의 우물이 되고, 시심의 수맥을 만든다.

그러나 김영화 시가 말하는 우물의 형상이나 깊이, 차수민 시의 시심의 수맥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아직은’ 불명확하다. 단지 자기 주변의 일을 정리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이들의 시는 시적 감동의 폭을 넓힐 수 없다. 또 구체성을 갖지 못한 채 심연에 저장된 이미지만 늘어놓는 시는 마치 암호화된 메시지 전달인 양 취급될 수 있다. 시적 현상의 신비를 푸는 식의 시 쓰기가 시의 길을 확장하고 주어진 상황 너머의 지향점을 노정하진 않는다. 비록 포괄적인 독법이지만 시인 자신의 시적 경험을 빌어 우리가 공유해야 할 삶의 현실적 의미를 발견하고, 같은 것과 다른 것의 동시존재성의 관계를 찾아내는 것 또한 시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타인의 고통을 대신 울어주는 것은 외면할 수 없는 시의 임무지만, 고통만 얘기하고 반복해 상처만 들려주는 것으로는 시의 위업을 드높일 수 없다. 고통으로 상처받고 타버린 삶의 재를 보관하기보다 그 고통을 감내하며 살았던 존재가 남긴 불꽃을 생생하게 지키고, 지금의 우리 삶의 희망으로 다시 타오를 수 있도록 해야 시의 위력은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

글을 맺으며 한 가지 덧붙인다. 시의 바탕인 의식과 시심이 원래 모호하고 복합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함께 고민해 봤으면 한다. 최근 의학계에서 각광받는 뇌 과학 연구에서도 의식의 문제는 쉽게 풀지 못하고 있다. 과학의 최신 성과와 진화적 관점을 중시하는 철학자이자 인지과학과 생물철학의 세계적 선구자인 대니얼 데닛(Daniel C. Dennett)의 주장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우리 뇌에서 의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부터 우리는 아직 모른다고 한다. 누가 뭐래도 인간의 의식은 분명 놀라운 현상이 아닐 수 없는데, 그 의식이 난데없는 직관의 소산일 수는 없지만 무언가 의식을 이루는 구심점은 있다고 한다. 다만 그것이 우리가 ‘미리’ 규정하는 ‘어떤’ 의식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을 ‘환상의 메아리 이론(fantasy echo theory)’으로 설명한다. 대니얼 데닛은 의식은 이미 우리가 규정한 개념에 따라 낱낱의 것이 쌓여진 게 아니라 우리의 뇌 전체에 메아리치는 어떤 정보나 표상이 뇌 속에서 울려 퍼지는 바로 그 시점에서의 의식이고, 궁극적으로는 다양한 진화적 알고리즘에 의해 형성된 최근의 결과물이자 다분히 생물학적 현상이란 것이다.

이런 과학적 관점을 따르면 지금껏 인간의 의식은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는 내밀한 속마음이란 주장은 도리어 의식의 실체를 밝히는 데 걸림돌이 된다. 하지만 과학자들과 달리 시인들은 이런 응집성과 복잡성의 의식 세계를 자기만의 선택적 탐색과정으로 접근하여 미분화된 의식의 비밀을 찾아내고, 이를 단초로 시적인 삶의 본질을 규명한다. 세상에 인간만 신비로운 존재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시인들은 의식과 영혼이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즉, 내가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내가 어떤 의식을 지닌 존재인지, 그 복잡한 비밀을 풀어낼 자기만의 방식으로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 첨단과학시대에도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사는 시대다. 이런 가운데도 시인들은 시간의 기억과 통찰된 시심을 시적 직관으로 전환시켜 사람들이 추구하던 세계의 어떤 가능성을 각자의 실천적 의지 안에서 보이는 것 너머의 희망의 길을 찾고 있다. 김영화, 차수민 시인의 시가 자기 삶에 투영된 내밀한 시간과 시심을 추적하는 것도 그 일환일 것이다. 우리의 의식적 경험은 세상에서 가장 친숙하고 신비롭지만 모호하고 복잡하다. 그런즉 우리가 의식보다 더 직접적으로 아는 것은 없지만 의식을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모든 것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는 여전히 숨겨진 프런티어다.

두 시인의 시집을 따라 읽으며 떠오른 간단한 상념 하나로 짧은 시평을 접는다. 나무 한 그루 옮기는 데도 나무만 달랑 옮기지 않는다. 뿌리에 주렁주렁 옛 흙이 묻어 있다. 그래야 그 나무가 산다. 자라던 토양에 움텄던 흙은 뿌리가 기억하는 생명의 토대다. 새로운 땅도 뿌리가 기억하는 생명의 시간과 어우러져야 보이는 것 이상의 응집력을 회복할 수 있다. 통합생태학 차원에서 보면, 살아 있는 것은 그 살아온 과정마다 우리의 시선을 초월하는 비가시적 프런티어를 품고 있다. 만약 이런 비가시적 프런티어의 일부를 찾는다면 우리는 그 다음 순서를 생각할 것 같다. 이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시간의 연속성을 외면하고 그것만 싹둑 잘라낼 재간이 있을까? 있다면, 그 출발점부터 들려줄 수 있을까? 그것이 어떻게 싹터 자랐고, 순간적으로 어떤 사건과 연결되어 가슴과 뇌리에 벅차올랐는지, 단면이라도 잘라서 보여 주면 충분할까? 찾아지고 느껴지고 벅차오르고 그 장구한 흐름을 자를 때 드러나는 것이라면 누가 뭐래도 그것은 내면의 응집된 모습과 집념어린 탐색의 합치된 공동산물일 텐데……. 어떻게 그 관계의 전체상을 재구성할 수 있을까?

 

최영호 | 해군사관학교 명예교수ㆍ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자문위원. sealiter5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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