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 혼사가 이루어졌는데 새 색씨가 처음 시가에 오던 날
“아이구, 신부가 와 저렇노? 작아도 너무 작다.”
“키 작은 사람이 얼굴은 야무지게 생기는 법인데 조막만 한 얼굴에 눈코도 다 작네.”
마을 아낙들이 혀를 내두르고 벌써 아이가 세 살이나 되는 사촌 제수씨 김해댁도
“아이구, 우리 아주바님 인물 아깝어라! 키도 어째도 덩치도 코도 얼마나 크고 사내다운데 쪽지비를 잡아도 오지기 잡았다.”
하면서 혀를 찼다. 소장사로 돈을 벌어 읍내로 이사 간 웃각단 박두용씨 집을 거저다 시피 헐케 사서 살림집을 차리고 온갖 잡일과 공사판을 기웃거리며 돈을 벌었지만 제 땅 한 평이 없으니 금방 살림이 불어나지도 않고 큰딸 강숙이와 장남 순우가 태어나자 때마침 일어난 중동 붐을 타고 별 기술이 필요 없는 비계공으로 리비아로 돈벌이를 떠났다. 그렇게 한 3년 고생을 하고 돌아온 종찬씨는 그 유명한 마비스안경으로 한 가닥 하고 다녔지만 중동에서 벌어온 돈으로 약간의 땅을 마련하면서 살림 맛을 알고 조금씩 착실해지기 시작해 아들딸 넷을 거느리고 작은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집안에서 내려오는 진장 밭에다 2층집을 짓고 아래채에 소를 먹이며 해마다 재산을 늘리며 이제 버든마실에서 제법 산다는 축에 들고 있었다.

그날 저녁 개금 백병원에 들렀다 퇴근해 뭔가 서글픈 마음에 식탁에 앉아 맥주를 마시던 열찬씨가 지금껏 종찬씨가 살아온 과정을 더듬어보다
“형님이사 인자 우째되든동 아아들 끈이라도 한 둘은 붙이고 가야될 건데.”
혼잣말을 하는 걸 듣고
“보소.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함부로 택도 없는 소리 하지마소.”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단호하게 나오는 지라
“와?”
잔을 놓고 바라보니
“그 날고뛰는 김해형님도 강숙이 중신하다가 망신만 당했다 안 카덩교?”
“참 그렇제.”
오지랖도 넓은 순찬씨가 두 살 아래 종찬씨가 일흔이 되도록 남의 식구 구경도 못 하고 맏이가 마흔이 넘은 자식 넷을 오롯이 데리고 사는 것이 안타까워 어느 음력정초에 친정 곳이자 시가 곳인 언양에 다니러 와서 들려서는
“동생 니도 인자 나이 그만 하면 손자들 안아보는 재미도 누려야지. 내가 중신을 해볼까?”
운을 떼니 두 부부가 아무 말도 없이 얼굴이 벌개지는지라
(옳다. 이 사람들이 언간이 답답기는 답답한 모양이구나!)
쾌재를 부르며
“우리 동네에 단감 밭도 제북 크고 논농사도 있고 단층 슬래브 집도 있는 노총각이 있다. 막내아들로 나이는 마흔 둘이고 팔십이 다된 노모가 지금까지 밥을 해주고 있는데 인자 기골이 약해져서 며느리를 봐야 된다고 노래를 한다 아이가. 살림도 그만 하니 사람만 좋으면 처녀는 몸만 와도 된단다. 언양서 김해까지 길도 그리 멀지 않으니 언제 한번 맞선이라도 보게 하지.”
하는데 묵묵부답이라
“동생, 잘 한번 생각해봐라. 지 자식 아깝다고 설마설마 하고 미루다가 평생 지 물건 돼서 죽을 때도 미생전일 때가 많단다.”
하고 돌아가서는 추석이 지나 모처럼 중매 한 건을 성사시키는 구나, 중신 세 건만 성사시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를 베풀고 간다고 하던데 하면서 잔뜩 기대에 부풀어 진장의 종찬씨 집으로 가서
“동생은 그래 한 번 생각은 해봤나?”
하는데 또 내외가 아무 말이 없는지라
“와? 싫으면 싫다고 안 맞는 조건을 말을 해 봐라. 그래야 내가 총각집에 말이라도 하지.”
따지자 한참 만에
“형님, 집이 김해면 길이 너무 멀어서...”
하는데
“이 사람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내 들으니 강숙이도 운전한다 카던데 언양서 김해한림면까지 차로 한 시간도 안 걸린다. 사람이 무슨 말을 말이 되도록 해야지. 주여!”
안 믿는 집에서는 극히 삼가는 주여! 까지 쏟아내는데
“누님, 마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지요. 내 없는 집 막내이로 태어나 여기저기 떠돌며 늦장가를 들어 여기 널찍하게 집을 짓고 네 자식 놈 하고 아웅다웅 사는 맛을 들인 기 인자 얼마나 됐다고. 해마다 짐승도 늘리고 땅도 늘리고 인자사 마 사람이 사람 사는 것 같은데.”
“이 사람아, 그러게 진작 정신을 차리고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아보지. 나이 칠십이 넘어 마흔 넘는 자식 데리고 그 기 할 소리가?”
버럭 성을 내자
“당장 강숙이가 시집을 가면 월급도 안 들어오고 또 지 에미 소 키우는데 도와줄 사람도 없고 또 소를 팔면 축협에 밀린 사료 값이며 농협에 융자금이며...”
“에라이, 디비 쪼고 있네. 남들은 논밭 팔아 출가를 시키는 판에 너거 내외는 논밭 산다고 마흔 넘은 자식들을 꼽다시 붙잡고 있단 말이가? 아이구, 답답해라. 주여!”
하고 떠난 후엔 아예 진장쪽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했다.
“그 판에 뭐 당신이 중신을 한다고요?”
“그래 마침 맞는 자리가 하나 있어서.”
“남의 말이라 카면 그저 만사가 귀에 솔깃한 덩덕군이 당신 말을 우째 다 믿노? 그래 어떤 자린지 말이나 해보소.”
“그래. 함 들어봐라.”
“당신, 남창에 고사리 뜯으러가서 남창장터에서 국밥 먹은 집 알지?”
“알지. 그 선지국이 시원한 집.”
“그 집에 나와서 심부름하는 나이 든 총각을 알지?”
“본 듯하네 키도 크고 얼굴은 멀끔한데 매가리가 하나도 없어 보이는 총각 말이지?”
“그래. 그 사람이 마흔이 좀 넘었는데 그 국밥집 뚱뚱이아지매 작은아들이란 말이야.”
“그래서 그 노총각하고 우리 강숙이를 중신한단 말이지요?”
“그럼. 우선 그 집 형편이나 들어봐.”
열찬씨가 한창 등산에 빠져있을 무렵 5잡이라고 불리던 김몽룡, 마구로 박춘식, 화장지 박봉록, 유동식씨와 한 달에 한두 번은 대운산에 올랐다. 집결을 노포동지하철종점에서 하다 보니 입산은 늘 서창시장에서 돼지고기삼겹살이나 족발, 횟감 등 안주와 술을 넉넉히 사고 악산으로 유명한 610미터의 대추나무만디코스를 잡았다. 가마득한 발아래 덕계, 서창, 웅촌으로 이어지는 신도시를 내려다보며 들숨날숨 한바탕 곤욕을 치르고 땀에 흠뻑 젖어 만디에 올라 막걸리를 한잔하면 그 시원한 맛이 이를 데가 없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다음부터는 밋밋한 산길을 오르락내리락 한 시간쯤 걸어 대운산정상에 올라 또 막걸리나 커피를 한잔 하고 대운산 2봉을 거쳐 대운암방향의 계곡을 향해 한 시간 쯤 걸어 하늘이 안 보이는 울창한 숲속의 개울가에 앉아 삼겹살을 구워 술을 마시며
대운산에 딱따구리는
참나무구멍도 뚫는데
우리 집에 저 등신은
뚫린 구멍도 못 뚫네
바야흐로 쉰도 고개를 넘어 예순이 가까워가는 중년의 사내들로서는 언제 들어도 의미심장한 노래를 몇 번이나 반복하다 얼큰하게 술이 취하면 으슥한 곳을 찾아 목욕을 하고 상대리주차장으로 내려와 마을버스를 타고 남창역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간혹 버스를 놓쳐 한 30분 걸어서 내려올 때 외갓집이 있는 하대리 음달마을을 지나게 되면
(외숙모는 잘 계실까? 의지할 데가 없어 친정 쪽에 찾아온 아이를 낳아보지 못 해 세상물정을 모르는 밀양이모는 또 그 음전한 외숙모 속을 얼마나 썩일까? 아직도 장가를 못 갔다는 용호, 용현이 두 외사촌동생은 어떻게 지낼까? 그 애들도 나이가 벌써 쉰이 넘었을 텐데...)
하면서도 선뜻 한번 외숙모를 찾아가지 못 했다. 일행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어머니 명촌댁이 친정나들이를 하다 남창에서 손을 다치고 또 그게 덧나 파상풍과 함께 치매현상까지 와서 한밤중에 택시로 모셔가고 몇 년 뒤 세상을 떠났지만 창망중이라 남창쪽으로 연락도 못 하고 또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외숙모를 찾아가 그 때 고생하셨다고 인사를 못 한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남창역에서 열차표를 사고 출발까지의 자투리시간이 또한 그들에게는 너무나 귀한 일탈의 시간이 되었는데 다문 10분이 남아도 슈퍼에서 맥주를 몇 병 사서 마시고 20분이 남으면
“아지매, 국밥!”
하고 소리치면
예순이 다 된 뚱뚱한 주인여자가
“열차시간이 다 됐는데 국밥 식혀서 언제 묵겠노?”
망설이는 걸
“번갯불에 콩 꿉어 묵는다 안 카요? 일단 주기나 주 보소. 시원소주 한 병 하고.”
하면서 허겁지겁 먹고 역전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지만 3,40분 시간여유가 있으면 선지국밥은 국밥대로 시키고 5일장에 횟감을 파는 내외가 토, 일요일에만 활어를 썰어 파는 좌판으로 가서 장터 숭어, 붕장어, 도다리 등을 사서
“회는 역시 국밥집에서 먹어야 제 맛이란 말이야! 한겨울 난롯가에서 선풍기바람 쐬는 기분으로 말이지.”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자주 출입하면서 저들끼리 뚱띠라고 부르는 주인여자와 안면이 붙은 열찬씨가
“이 남창장터에 내가 어른이 되어 술 마시러 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 내가 어려서 외갓집이 있는 남창에 오면 밑에 시퍼런 물이 흘러가는 철까치 위로 걷는 기 겁이 나서 엉금엉금 기면서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하는 이야기를 듣고 뚱띠아지매가
“아재 외가가 어느 마실인데요?”
“하대리 음달마을이고 토박이는 아이고 언양상북에서 이사온 밭전자 전씨지요.”
“아, 음달마실 전씨로구나. 그 노총각이 둘이나 있는 집.”
“아니, 아지매가 그걸 우째 아요?”
“내가 같은 담양전씨라서 좀 관심이 있었지요. 그라고 그 노총각들이 우짜다가 우리 집에 밥 먹으러 가끔 오는데 그 사람들 하고 외사촌고종사촌간인가베요?”
“야.”
하고 말을 튼 뒤
“아지매 올해 몇 인교?”
“갑자기 여자나이는 와 묻능교?”
“우리 외가 택인데 혹시 아나? 내가 이 남창시장에 국밥집하는 여동생이 하나 생길 지.”
하니
“아직 공무원이라면 내 나이가 만만하지 않을 꾸로.”
하고 한참 망설이다
“나는 범띠.”
“에게게. 나는 토끼띤데.”
“거 봐요. 내가 누부야지.”
“...”
“인자부터 배고프고 돈 없으면 누부야소리만 하소. 내 국밥 한 그륵 몬 주겠나? 말만 잘 하면 <시원>아니라 <좋은데이 >소주라도 준다.”
하면서 친해져 열찬씨 일행이 가는 날이면 직접 주방에 들어가 장을 열고
“기분이다. 오늘은 고기가 두 배다. 더 땡기면 이야기만 하소!”
하고 소주까지 한 병 들고 와 부어주곤 했다. 하루는 장난끼가 발동한 열찬씨가
“뚱띠누부야 사장님, 여게 우리 김사장이 어떻소?”
갑자기 김몽룡씨를 가리키자
“어떻기는? 술 잘 묵고 산 잘 타고 사람 좋게 보이지.”
“오호라! 관심이 있단 말이지?”
“그라문 새이 니는?”
“씰데 없는 소리!”
“어라? 아까 산에서 술 묵다가 국밥집누님 소개해주라는 거는 언제고?”
얼굴이 벌개진 김몽룡씨를 바라보며
“뚱띠누부야 들어보소. 이 양반이 조반무시처럼 덩치는 자그만 해도 술 잘 먹고 밥 잘 먹고 일 잘 하고 잠 잘 자고 마누라 좋아하고 간간히 옆집 여자도 잘 쳐다보고 한 마디로 곡식에 제비 같은 양반이지.”
판소리 홍보가의 놀부를 들먹이듯 읊자
“곡숙에 제비가 아니라 나락에 멸구 같은 사람이라도 내 부산아재가 사귀라면 사귀지 말고.”
하고 홀에 왔다갔다하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단 조건이 딱 하나 있지.”
“조건이라니? 새이야, 단디 들어보소.”
하고 김몽룡씨를 쿡 찌르는데
“저 아 말임더. 우리 둘째아들이 벌써 마흔이 조금 넘었는데 아직 혼자란 말입니더. 우리 큰 아 은행에 다니는 놈은 장가가서 아가 벌써 학교에 다니는데 저 아는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자를 사귀지도 장가를 갈 엄두를 내지를 않아요. 나도 나이 육십이 다 되서 어서 둘째 며느리를 봐서 이 가게를 며느리한테 물려주고 싶은데 당최 장개를 가야 말이지.”
간곡한 어조로 바라보는지라
“아들이 장가를 가더라도 가게는 손 떼면 안 되지. 그라면 우리 몽룡이형님, 열찬이형님이 무슨 재미로 대운산에 오겠노? 남창장 국밥집에 뚱띠아지매가 없는데.”
로구로 박사장도 끼어들고
“그래 내가 중신은 연구해보겠지만 며느리 보더라도 가게는 나오소. 나이나 몸피가 인자 한두 해만 더 지나면 딱 명물식당 욕쟁이할매로 어울릴 긴데. 국밥보다 아지매 욕 묵는 재미로 손님들이 몰려들 긴데. 어데 가서 욕하는 연습도 좀 하고.”
열찬씨가 나서자
“야야, 니 중신해 준단다. 어서 뜨신 국물하고 맥주 두 병 내 온너라.”
아줌마가 신명을 내었다.
※ 이 대하소설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