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교수의 머릿속 전시회 : 서울-부산 도보 生覺記 97 - 다 와서 술을 마셨다고?
박기철 교수의 머릿속 전시회 : 서울-부산 도보 生覺記 97 - 다 와서 술을 마셨다고?
  • 박기철 박기철
  • 승인 2023.09.16 04:50
  • 업데이트 2023.09.14 12: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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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와서 술을 마셨다고?

비에 푹 젖어 질퍽거리는 신발을 끌며 산에서 내려와 마을에 들어서니 다행히 아침 일찍 문을 연 가게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빵과 우유를 사먹으러 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저보다 먼저 온 손님이 막걸리를 혼자 마시고 있었지요. 그걸 보고 저도 갑자기 막걸리를 마시고 싶었습니다. 목도 마르고 해서 한 병을 시켜 마셨지요. 마시고 나니 한 병 가지고 모자라 한 병 더 시켜 마셨지요. 아침부터 막걸리를 두 병이나 마시니 기분이 알싸합니다.

저는 혼자서도 잘 놀지만 술을 혼자서는 안 마십니다. 시인 조지훈은 술버릇, 주량, 사람됨을 따져 음주의 18단계를 말했지요 ①술을 아예 안 먹는 불주(不酒) ②술을 마시지만 술을 겁내는 외주(畏酒) ③마실 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민주(憫酒) ④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고 취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지만 돈이 아까와 혼자 숨어 마시는 은주(隱酒) ⑤마실 줄도 알고 좋아도 하면서 무슨 잇속이 있을 때만 마시는 상주(商酒) ⑥이성과 즐거운 밤을 위하여 마시는 색주(色酒) ⑦잠이 오지 않아 술을 마시는 수주(睡酒) ⑧밥맛 돋구기 위해 술을 마시는 반주(飯酒) ⑨술의 진경을 배우는 학주(學酒) ⑩술을 취미로 마시는 애주(愛酒) ⑪술의 미에 반해 술을 즐기는 기주(嗜酒) ⑫술의 진경을 터득해 술을 탐하는 탐주(耽酒) ⑬마구 마셔대면서 주도를 수련하는 폭주(暴酒) ⑭오래 오래 마시면서 주도 삼매경에 접어든 장주(長酒) ⑮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아까와 하는 석주(惜酒) ⑯마셔도 그만 안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낙주(樂酒) ⑰술을 보고 좋아하되 이미 마실 수 없는 관주(觀酒) ⑱술로 말미암아 저 세상으로 떠나게 된 폐주(廢酒)!

막판에 이게 뭔 짓이람!
막판에 이게 뭔 짓이람!

저는 여기서 11단계인 기주(嗜酒)는 될 듯싶습니다. 술을 좀 즐기지요. 그러나 술이 세지는 못합니다. 많이 마시면 만취해서 이튿날 아침에 깨어나 전 날 밤에 뭐 잘못한 거 없나 되집어 보기도 합니다. 필름이 끊어져서 같이 마신 친구에게 전화해 확인하기도 하지요. 저는 주도가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다만 술을 마셔서 아폴론적 이성의 세계를 벗어나 디오니소스적 유희의 세계로 가곤 하지요. 그런데 이 날 이 술은 마시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짓이었지요. 목적지를 바로 앞에 두고 술을 마시다니 어리석었지요.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kaci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