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100) 멀어도 걷는 사람
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100) 멀어도 걷는 사람
  • 손현숙 손현숙
  • 승인 2023.09.16 08:15
  • 업데이트 2023.09.1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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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도 걷는 사람

                               손현숙

 

당신의 왼손은 나의 오른손이다 우리는 손을 잡고 반대쪽으로 걷는다 가끔은 당신을 잃어버리기도 하는데, 들판을 가로지르는 나무들 하얗게 손사래 친다 생각난 듯, 이름을 부르면 모르는 얼굴이 뒤돌아다 본다

당신은 어깨를 찢어서 부글거리는 흰피, 휘파람을 불면 꽃들은 만발한다 가을 개 짖는 소리는 달의 뒷면에서 들려오고 눈을 뜨지 못한 강아지는 꿈 밖으로 나가서야 젖꼭지를 물 수 있는데

담장밖에 둘러쳐진 오죽의 둘레는 그림자가 없다 대나무 숲으로 돌아가야 이름이 돌아오는데, 당신은 멀어도 걷는 사람 도무지 말을 모르겠는 여기, 눈빛으로 기록된 말들 속에서 없는 당신은 다정하다

- 2023. 『현대시학』. 11-12월호

시작메모:

오래 무엇인가를 찾아서 헤맨 것 같다. ‘쓸쓸’이라는 단어가 내 뒷모습 같기도 하고. 내가 내민 손을 누군가 그냥 잡아주기를 원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혼자 오래 걸었던 기억. 생각해 보면 그것은 타인을 찾아 방황했다기보다는 내 속의 내가 궁금해서 남겼던 흔적이 아닐까. 그렇게 타인의 연속은 나였음을 부정할 수 없겠다. 어쩌랴, 멀어도 걷는 사람이 되어서 기어이 닿고 싶은 그곳이 있다면, 비록 죽는 날까지 그곳에 닿지 못한다 해도 나는 걷는 사람, 멀어도 간다.

 

손현숙 시인

◇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sonhyunsuk@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