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늙은 농부의 죽음④
“점심시간이 어중간하니 간단하게 산을 타고 점심을 먹읍시다. 당신 하는 기 마음에만 들면 내가 석대다리집에서 당신 좋아하는 수백에 시원소주 한 병 쏘지.”
하면서 집을 나와 회동동 99번 종점을 지나 아홉산어귀에 자동차를 파킹하고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가 무배추를 심은 울타리를 돌아 회동수원지를 내려다보며 한참이나 길을 오르다
“아이구, 안 하다가 하니 등산도 못 하겠다. 여서 한숨 돌립시다.”
영순씨가 100미터도 채 못 오른 지점의 철탑 밑에 주저앉아 한참을 쉬었다 겨우겨우 해발 210미터라는 표지석이 있는 첫 번째 산마루에 올라 커피를 타고 과일을 깎아 간식을 먹고
“자, 슬슬 출발해볼까? 오르락내리락 아홉 봉우리를 넘자면 땀께나 흘리겠는데. 하면서 부지런히 걸어 다섯 번째 봉우리에 올랐을 때였다.

찌르릉. 전화벨이 울리더니
“데름아!”
가늘고 가라앉은 목소리. 뜻밖에도 진장의 형수였다.
“와요? 형수가 우짠 일로 전화를 다 하고. 강숙이나 혜숙이하고 선이라도 보게 마음을 묵었단 말잉교?”
“그 기 아이고 지금 강숙이아부지가 많이 아프다 아잉교?”
“형님이 와 갑자기 얼매나 아프길래?”
“언양 보람병원서 인자 가망이 없다고 며칠이라도 더 살릴라면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인공호흡기 꼽고 백병원에 가는 길이다.”
“알았심더. 내 백병원으로 갈 께요.”
황급히 산을 내려와 백병원을 향하다
“보소.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이고 당신 배고플 건데 점심도 그르면 저혈당에 걸린다 아이가?”
영순씨의 간청에 석대다리집에서 후딱 탕 하나씩을 먹어치우고 개금으로 달려가
“형님!”
응급실에 누운 환자를 들여다봐도 눈도 못 뜨고
“대름아, 안 될 것 같다. 의사보고 중환자실로 옮겨달라 캐도 그럴 필요도 없다고 차라리 집 가까운 언양의 보람병원으로 다시 싣고 가라 카더라.”
그 조그만 체구 어디에 강단이 들었는지 여간 해서는 눈도 깜짝 않던 사람이 완전히 겁을 먹고 있었다.
“일단은 여기서 조금 기다려봅시다. 사람이 죽으려면 어쭙잖게도 죽지만 안 죽으려면 참 모질게도 질긴 게 사람목숨이랍니다. 오죽하다 아아들 때기 치다가 마지막 한 장 남으면 똥줄이 명줄이라 카겠능교?”
하면서 승용차로 달려온 2남 2녀와 열찬씨 내외를 비롯한 일곱이 병상에 빙 둘러섰다가 복도나 화장실에 나가 숨을 돌리고 다시 들어오기를 반복하다 해가 설핏할 때쯤
“숙아, 강숙아, 여가 어데고? 내가 와 여 와 있노?”
종찬씨가 천천히 눈을 뜨고 아내를 찾자
“보소, 이 핀요!”
“아부지!”
다섯 식구가 한꺼번에 달려드는데
“와 이라노? 내가 어데 죽었나? 나는 안 죽는다!”
눈에 핏발이 선 종찬씨가 일어서려고 팔을 집는데 영순씨가 나서더니
“아주버님, 안주 일어나면 안 됩니다. 그라고 강숙아 니는 간호사한테 이야기해라. 정신 돌아왔다고.”
하는데 간호사가 돌아와 혈압과 맥박을 재고 이어 의사가 와서 눈꺼풀을 뒤집어 보며 차트를 자세히 살피더니
“야! 이 어른이 저력이 있네. 좋아요. 조금만 더 관찰했다가 입원을 시키든지 언양으로 돌아가든지 결정을 합시다.”
하고 돌아갔다.
“형수하고 식구들 놀라서 점심도 못 먹었을 긴데 모두 가서 저녁이나 먹고 오소. 그간 우리가 있을 게요.”
억지로 가족을 떠밀어내고
“보소! 형님 정신있능교? 내하고 이야기할 수 있겠능교?”
열찬씨가 의자를 바싹 당겨 앉으며 묻자
“그래 무슨 말인지 말해봐라.”
조그맣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우리 종방 간 7형제 중에 동찬이 형님, 일찬이 형님 둘이 가고 아직 다섯이 남았는데 중간에 낀 형님이 아라면 우짜능교? 80이 넘은 정찬이형님이 아직 눈을 벌겋게 뜨고 있는데.”
“그렇지만 우짜겠노? 죽는 기 순서가 있는 거도 아이고.”
“그렇기는 하지만 우짜든동 형님이 힘을 차리고 일어나야지 지금 형님이 죽으면 형님 식구 특히 시집장가도 안간 네 자식들로 그렇고 형수도 그렇고 벌여놓은 농사나 짐승도 그렇지만 문중일 만해도 형님이 없으면 같이 의논도 하고 하다 못 해 같이 음복할 사람도 없이 제가 죽을 지경이란 말입니다.”
“...”
“넘이사 뭐라카든 나는 언양과 버든에 사촌형님이 있고 진장에 사촌형님이 있는 기, 우리 아부지산소 옆을 지키는 기 너무 좋단 말입니다.”
“...”
숨이 조금 가쁜 것 같아도 눈동자가 움직이고 표정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신은 멀쩡한 것 같았다.
“형님은 하기 좋은 말로 공부는 일찬이형님이 잘 하고 인물은 백찬이가 젤 잘 생겼고 나 열찬이는 눈코도 작고 얼굴도 새까맣고 물체도 늦고 뒤숭맞다고 형님이 사람취급도 안 했다 아입니까?”
“그래도 나는 부산에 나와 살다가 고향 언양에 가면 농사짓는 형님이 있는 거, 나중에 아부지 산소 옆에 형님집이 있어 물을 마실 수 있는 기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단 말입니다. 나중에 영주형님이 돌아가시고 집안에 술 좋아하는 음복 꾼이 딱 둘이 있을 때는 행사 때 형님이 오는지 안 오는지만 생각하고...”
하는데 종찬씨가 손을 저으며
“제수씨! 내 좀 일밭쳐주소.”
하는 지라
“그래도 될랑가?”
마침 돌아보러 온 간호사를 쳐다보니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여 침대에 기대어 앉게 하니
“동생 니는 그런 말 하지마라. 말은 안 해도 나도 니가 얼마나 좋고 대견했던지 말로 다 못 한다.”
“...?”
“물론 잔아부지가 니는 어릴 때 얼굴도 시커멓고 몸도 어둔하다고 명절 때 야는 공부는 고사하고 농사일이나 시켜야 되겠다고 했고 나도 그런 줄 알았다. 니캉 내캉은 나이도 차이가 많아 같이 어울리기도 어렵지만 니 생이 일찬이가 언양바닥에서 얼마나 알아주는 사람이고? 솔직히 나는 니가 공무원을 하고 장개를 갈 때까지 별로 신경도 안 썼다. 그저 열찬이는 맨발을 벗고도 일찬이를 못 따라간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리비아에 갔다 와서 니가 장개갔다 소리를 듣고 부산 와서 제수씨를 보고 깜짝 놀랬다. 세상에 선녀가 따로 있지, 그날 이후 나는 우리 종수씨만큼 잘난 여자를 아직 본 일이 없다.”
하며 영순씨를 바라보자
“아이구 아주바님도...”
하며 얼굴을 붉히는데
“잔엄마가 돌아가시고 진장 공동묘지에 초상을 치는데 좌우간 버든마실 생기고는 그래 문상객이 많은 초상은 첨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때 니가 그래 똑똑하고 출세한 줄 처음 알았다.”
“아이구, 그거사 당연한 자식도리고...”
이번에는 열찬씨도 얼굴이 벌개지는데
“니가 사무관인가 뭔가 걸려서 옛날 같으면 고을 원이 되었다고 니 친구 영관이, 종석이, 석주가 내 보고 한잔 사라했을 때 내 두 말 안하고 술을 사면서 기분이 얼매나 좋았는지. 버든마실이 생긴 지가 적어도 수백 년은 됐을 긴데 제대로 벼슬해서 계급에 관자가 붙어 족보에 올라가고 비석에 갓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은 니가 처음이라 카더라. 그날 내 기분이 좋아 작은 송아지 한 마리 값을 썼다 아이가?”
“아이구, 형님 그만 하소. 부끄럽다.”
“그라고 니가 시집을 내고 출판기념횐가 뭔가 한다고 읍내 길거리마다 현수막이 붙었을 때 내 친구 복만이하고 수생이, 복님이누부 신랑 허서방, 작은님이 신랑 김서방까지 얼매나 탄복을 했는지 아나? 물 좋고 정자 좋은데 드물다고 벼슬하고 문집을 내고 정려각이 있어야 양반행세를 하는 가문인데 세상에 밥도 묵고살기 힘든 깡촌 버든에 벼슬을 하고 문집을 낸 풍류한량이 다 나왔다고...”
힘이 달리는지 한참 숨을 돌리는데
“형님, 그건 그렇고 인자 내 이야기 좀 들어보소.”
의자를 바싹 당겨 앉아
“숨 가쁘면 말로 말고 손이나 눈으로 신호만 하소.”
하고
“형님, 오늘도 잘못하면 죽을 번 했는데 형수사 둘째 치고 저 생때같은 네 아아들 우짤라 캤능교?”
“암만 지 자식이라도 나이가 들면 다 지 인생이 따로 있는데 마흔이 넘도록 짝도 없이 놔났다가 형님 갈 때 업고 갈 기란 말잉교?”
말은 안 해도 눈빛이 심하게 떨리며 반대를 않는지라 용기를 얻어
“지금부터라도 힘을 내어 형님 살았을 때 단 하나라도 시집이나 장개를 보내서 형님 살아서 손자라도 한 번 안아봐야 될 것 아잉교?”
“.”
긍정의 눈빛을 보고
“당신은 인자 나오소. 아주바님, 인자 내 말 좀 들어보소.”
영순씨가 다가앉으니 한층 편안한 표정으로 간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많이 늦은 일이기는 하지만 강숙이, 순우, 관우, 혜숙이 넷 중에 관우는 여자가 있다고 하니 아주바님이 힘을 차리는 데로 장가를 보내기로 하고 마침 적당한 총각이 하나 있어 우리가 보증을 설 만한데 나이나 형편으로 보아 강숙이보다는 혜숙이가 맞을 것 같으니 역시 아주바님이 힘을 차리면 바로 혼사를 치러 한두 해 뒤에는 친손자, 외손자를 다 안아보는 것이 어떠냐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제수씨, 고맙소. 강숙이애미는 아무것도 모르니 내 퇴원하면 제수씨 말대로 할 것이요.”
하는지라 그러면 약속을 하자고 영순씨가 외손녀 영서와 하는 식으로 손바닥에 각서를 쓰는 시늉을 하고
“자, 인감도장을 찍습니다!”
엄지손가락을 마주 대고 찍는 시늉까지 하는데 마침 식사가 끝난 일행이 들어오는지라
“형님이 퇴원하는 데로 관우는 장개를 보내고 혜숙이는 선을 보기로 했다. 급해서 순서를 무시해서 미안한 데 순우하고 강숙이도 어서 짝을 하나씩 찾아오기 바란다.”
열찬씨의 말에 모두 웃는데
“종제야, 이래 만사를 챙겨주이 고맙다. 역시 니가 우리 집안 큰 일꾼이다.”
컨디션이 돌아왔는지 띠엄띠엄 말을 하다 다시 한참이나 격렬하게 기침을 하다 수그러들자
“내 안주까지는 안 죽는다. 내가 누고? 신불산 보고 자란 깡아리로 한글도 잘 모르는 논산훈련소도 그렇고 영어 한 마디 못 하는 리비아도 기 안 죽고 버팄다 아이가? 맨주먹으로 시작해 2층 집도 짓고 땅도 사고 아아도 너이나 놓고...”
“그래 맞심더. 신불산 보고 자란 언양사람들은 어데 가고 기 안 죽고 지 할 짓 다 하고 지 할 말 다 하고 산다 아입니까?”
추임새를 넣으니 기분이 좋은지 벌쭉 웃기까지 했다. 잠시 뜸을 들여
“형님, 저는 출근했다가 내일 저녁에 다시 오겠심더.”
하고 일어서다
“어서 일나소. 연산동초밥집에 한 번 더 가서 와사비덩어리를 묵어야 될 것 아잉교?”
열찬씨가 말하니
“우리 제수씨가 같이 가면 어디로 못 가겠노마는 초밥집하고 와사비는 사절이다.”
하면서 웃어보였다.
※ 이 대하소설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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