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또 한 번의 위기돌파①

공무원으로서 더는 머뭇거릴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50대 후반 겨우 사촌형님 하나가 죽었다고 슬픔에 젖어있을 틈도 없이 총무과장 열찬씨에겐 또 다시 일생일대의 위기가 닥쳤다. 그렇게 열심히 달려온 길이 문득 물러설 수도 되돌아갈 수도 없는 낭떠러지에 봉착한 것이었다.
그것은 새로 들어선지 6개월이 된 이명박 대통령의 실용정부에서 강력한 조직축소와 인원감축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정부조직법과 공무원법과 그에 준한 지방의 조례규칙에 의하면 대도시 자치구의 경우 인구하한선인 15만 명 선이 무너지면 3급 부이사관인 부구청장의 직급을 4급 서기관으로 하향조정하기로 되어 그 첫 부구청장이 바로 서규수 부구청장이었던 것이었다. 또 거기다 다시 인구가 13만 명 이하로 떨어지면 의회사무국장의 직제를 4급 서기관에서 5급 사무관 사무과장으로 하향조정하기로 되어있었다.
한때 부산의 행정중심이자 임시수도까지 소재한 서구는 당시 오랜 공동(空洞)화가 진행되어 걷잡을 수 없이 인구가 감소하고 있었다. 같은 조건의 구시가지 중, 서, 동, 영도의 4개구가 통합되고 국회의원선거구가 조정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코밑이 단 구청장들이나 국회의원들이 이를 막기 위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이 없었다.
이곳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청년들이 성장하면 모조리 시외나 객지에서 취직을 해야 할 만큼 이미 일자리도 없었고 결혼해서 부모를 모시고 살 만큼 주거여건도 좋지 않아 성장하는 족족 떠나버리니 산복도로 달동네에는 남아나는 젊은이가 없고 태어나는 아이도 없었다. 배산임해의 지형이라 인구의 7할 이상이 산복도로위에 사는 형편에 자신들이 자랄 때까지는 이름만 들어도 다 명문으로 쳐주던 대신, 동신, 충무, 토성, 남성, 동광 같은 유명초등학교들이 예사로 통합되거나 폐교되고 산복도로에는 구석구석 버리고 간 판잣집이 쓰레기장과 불량청소년의 아지트로 변해 폐공가 대책이 시급했다.
이론적으로는 달동네 모든 판잣집을 철거하고 조경이 잘 된 아파트단지로 주택재개발 사업을 하면 된다고 여러 대학교수들이 학술용역에서 주장했지만 현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대부분이 65세 이상의 노인인구, 특히 80넘은 독거노인이 적잖은 판에 단 10평의 판잣집이지만 그 보금자리를 버리고는 당장 어디고 거처할 수가 없으니 자기가 죽고 나서는 모르지만 살아서는 재건축에 동의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버티다 죽어 비어버린 공터에 기껏 소공원을 조성하는 정도가 자치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였다.
결국 산복도로 위에는 일체 젊은 사람이 살지 않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시가지의 그 많은 병원 빌딩에서 산부인과의 간판을 찾을 수 없으니 소아과병원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인구감소가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어 부구청장 직급을 고수하려고 몸부림치다 실패한지가 엊그젠데 또 다시 의회사무국장 직급이 하향되는 13만의 고비에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이럴 경우 구청의 서기관자리 셋 중에 시에서 직접 관장하여 시청 계장에서 승진하는 서기관을 파견하는 총무국장과 주민복지국장 자리를 빼고 유일하게 구청 출신 사무관에서 발탁하는 의회사무국장의 직제가 사라지니 구청직원으로서는 다시는 서기관이 될 기회가 영영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 첫 번 째 피해자가 바로 무려 공직 39년, 사무관 14년 만에 간신히 골인지점에 도착한 열찬씨였다.
실용정부답게 새 정부의 방침은 일사천리로 집행되어 단번에 정부조직법과 공무원인사법이 개정되고 지자체로 시달되어 빠른 시일 내에 지자체의 해당 조례와 규정을 개정하여 시행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기획감사실에서 올라간 직제조정안을 놓고 의회에서는 자신들의 기구축소를 차마 단번에 의결할 수는 없다고 버티는 동안 이번에는 행정안전부에서 염라대왕처럼 무서운 회의소집통보가 왔다.
도무지 전국의 어느 기초자치단체도 지방의회를 빙자하며 선뜻 이 지시를 따르지 않아 부득이 행정책임자인 부시장, 부군수, 부구청장의 회의를 소집해 강력한 지시, 아니 기합을 넣는 것이었다. 처리기한을 명시한 더 강력한 지참을 시달한다는 것이었다. 또 일부러 의회사무국장의 직급을 조정하지 않고 지연시키면서 변칙적으로 승진인사를 단행하지 못 하도록 못을 박는다는 말도 있었다. 부산서구청의 입장을 귀신처럼 간파한 것 같기도 했다.
마치 센터라인에서부터 드리블을 해서 여러 수비수를 뚫고 마침내 간신히 상대방의 문전까지 대시한 공격수가 어이없이 골대 앞에서 자빠지는 것처럼 천신만고 끝에 승진의 문턱에 도달한 열찬씨가 다시 주저앉을 위기에 봉착한 것이었다.

그렇게 심란한 가운데 열찬씨내외는 일요일을 택해 진장의 종찬씨댁을 방문하기로 했다. 장례식날 일이 바쁜 열찬씨가 참석을 못한 점도 맘에 걸렸지만 평소 너무나 독재적인 가장이라 숨이 가빠 농사일을 못할 때도 어찌어찌 오토바이로 논밭을 찾아가
“봐라! 줄이 비뚤다. 강숙이 니는 하는 짓이 농사가 장난이가?”
“에라이! 모를 손으로 숭구나, 발로 숭구나? 강숙이애미 니는 모숭기 하는 기 한해가, 두해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악을 써 가뜩이나 체수도 작은 두 모녀의 진을 뺐다. 워낙 처음부터 드센 남편, 드센 아비에 기가 죽어 차마 쳐다볼 염도 못 내고 모녀가 끙끙 앓는 것이 보기 힘들어 옆 논에서 일을 하던 영관씨나 종석씨가
“형님, 마 그라지 말고 막걸리나 한잔 합시다.”
자기네의 일터로 데려가 막걸리 참을 먹이곤 했다. 마치 옛날 어머니 명촌댁이 천식에 걸려 문밖출입을 못 하던 남편에게 죽는 그날까지 쩔쩔매며 만사를 물어서 처리하던 것과 꼭 같이 사촌형수 강숙이엄마도 종찬씨가 죽는 그날까지 밭곡식하나를 심거나 송아지 한 마리를 사고파는 일까지 일일이 물어봐서 처리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농협과 축협의 융자금이나 사료 값을 비롯한 여러 가지 뒤처리는 제대로 마무리 하는지도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형수, 그간 잘 지냈능교? 많이 섭섭하지요?”
열찬씨의 인사에
“뭐 당하는 대로 살아야지 뭐.”
무덤덤하게 받는 게 이제 기가 많이 살아난 것 같았다.
“그래 인자 농사고 짐승이고 살림살이를 좀 정리하지요?”
“순우, 관우, 혜숙이가 다 직장 댕기고 집에는 강숙이하고 내 하고 있는데 나도 힘이 그전만 못 해서 넘의 농사도 다 파이하고 짐승도 다 없앨 작정이요.”
“형님, 잘 생각했심더. 형님도 단 하루라도 내 날 같이 지낼 때가 있어야지요.”
영순씨도 끼어드는데
“우리 아아들이 술을 안 묵으니 저거 아부지 죽고 나서는 집에 술이 남아있는지 모르겠네.”
하면서 한참 만에 소주 한 병을 찾아 김치와 함께 상을 내어오는 걸 보며
“형수 보이소. 선비 집에 책이 떨어지면 떨어지지 술꾼 집에 술이 떨어질 택이 있능교?”
술을 따르다 마시고는
“아이구! 같이 마실 형님이 없으니 술맛도 모리겠네.”
“형수, 온 김에 이약 좀 합시다.”
“이야기라? 뭐를.”
“아아들 혼사 말입니다.”
“형님 돌아가시던 날, 나한테 인자 닥치는 대로 하나씩 아아들 끈을 부쳐 품에서 내치겠다고 약속을 했다 아잉교?”
“뭐라꼬? 대름새이가 죽을병이 들었기는 들었구나. 평생에 단 한 번도 아아들 결혼 못 해 걱정하는 꼴을 못 본 사람이 말이다.”
“좌우간 다 큰 자식 품에 끼고 있어 뭐 남는 것도 없고 아아들 넷 중에 우선 관우는 여자가 있으니 초상 때 온 처녀하고 저거 아부지 49제나 지내면 날을 받아 혼사를 치르면 되겠고 장남 순우도 직장이나 살림이 번듯하니 사방에 중신애비를 넣어보고 정 안 되면 중국동포나 베트남아가씨라도 구해 볼 요량을 하고.”
“...”
“그라면 딸이 둘 남는데 마침 내가 마침한 총각을 알고 있어 중신을 했으면 하는데 나이나 성격으로 보아 큰 아 강숙이보다 작은 아 혜숙이가 맞을 것 같은데”
하는 순간 영순씨가 나서서 전에도 한번 내비친 남창장터의 국밥집총각을 자신도 직접 봤는데 피부가 약간 새까만 것만 빼면 키 크고 인물 좋고 둘이 살 아파트도 있고 가게가 잘 되어 먹고살기에도 아무 걱정이 없고 더더욱 시어머니 될 사람이 너무나 어질고 대범해 며느리를 친딸처럼 잘 거둘 것이라고 설명해도 영 반응이 시언찮은 지라
“형수, 별 사람이 있능교? 밑져야 본전이라고 우선 선이나 한번 봅시다.”
하니
“가시나 니는 시집갈 생각이 있나?”
가뜩이나 숫기가 없는 딸을 뚫어질 듯 바라보니
“몰라...”
얼굴이 발개진 아이가 부엌으로 들어가 버리는데
“봐라. 우리 아아들은 당최 결혼할 생각을 안 한단 말이다.”
완고하게 고개를 젓는지라
“형님, 한 나이라도 어릴 때 보내야지. 이라다가 평생 내 물건 되면 우짤깅교?”
영순씨가 간곡하게 이야기해도
“그라고 국밥집이 뭐고? 저 아는 다리가 약해서 하루 종일 서있지도 못 한다!”
“아임더. 형님. 주말이나 장날은 몰라도 그 정도로 매일 바쁘지도 않고 주방은 주방대로, 홀은 홀대로 종업원이 있어 그저 식당 돌아가는 것 하고 저녁에 돈 챙기는 거만해도 될 깁니더.”
“마 그래도 나는 싫다. 오죽하면 장사꾼 똥은 개도 안 묵는다 안 카더나?
꼭 반대를 위한 반대처럼 보여
“지금 형수가 그래 억부소리를 할 형편잉교? 늙어죽을 때까지 머리가 허연 자식 너이를 처녀총각 몽달이귀신으로 옆구리에 끼고 살 낑교?”
열찬씨가 버럭 역정을 내자
“대름은 지금 형님이 안 계신다고 내 보고 무시하는 거가? 마 다 씰데없다. 내 걱정 내가 알아서 할 끼다.”
단호하게 잘랐다. 무안해서 일어나 2층 계단을 내려오며
“아이구!”
“아이구!”
부부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차를 고속도로에 올리며
“당신도 인자 진장일은 밥이 끓든 죽이 끓든 다 잊어뿌소. 문제는 아아들이 문제가 아이라 형님이 문제네.”
“그러게 말이다. 앞으로 진장만디 아부지산소만 생각해도 형수생각에 생 골치가 다 아프겠다.”
마침 톨게이트를 도는 승용차의 차창에 아버지 기출씨의 산소와 종찬씨의 2층집이 지나가 열찬씨는 슬그머니 눈을 감아버렸다. 그래도 뭔가 가슴속이 허전하며 신평통도사 앞을 지나 용연 내원사 앞을 거쳐 양산 다방을 지나 부산에 닿을 때까지 뭔가 가슴을 짓누르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은 열찬씨는 며칠전에 문상을 갔던 늙은 시인의 죽음과 종찬씨의 죽음을 매치시켜 <잔인한 봄>이라는 시 한편을 써놓고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잔인한 봄
어제
한 농부가 천식으로 죽더니
오늘
한 시인이 간암으로 떠났다
농부는
묵정밭과 농협 빚을 남기고
시인은
끝끝내 완성 못한 詩句 몇 개 남기고
...남겨진다는 건 또 다른 슬픔의 실마리
닳아가는 살점처럼 사라지는 사람들의
버려진 엄나무와 트랙터가 안타까워
주인 없는 서재의 古書냄새가 아쉬워
어둑한 방파제 술 취해 비틀대는
내겐 유독 올해 봄이 잔인하다.
※ 이 대하소설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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