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595)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4장 또 한 번의 위기돌파⑤
대하소설 「신불산」(595)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4장 또 한 번의 위기돌파⑤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3.09.26 07:40
  • 업데이트 2023.09.24 11: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 또 한 번의 위기돌파⑤
이제 아무 걸림도 애로사항도 없이 천천히 커피 향을 음미하며 느긋하게 한나절을 보내고 오후에는 순찰사마 대신공원이나 구덕산, 시약산, 아니면 장군산이나 송도해수욕장을 한 바퀴 휙 돌면서 그 긴 고난의 엑서더스를 거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에 닿은 것 같은 세월이 도래한 것이었다. 국장전용차량이 있어 운전기사가 모시고간다고 했지만 공식 업무가 없을 경우에는 청사입구에서 부터 구덕로나 송도아랫길을 거쳐 오밀조밀한 골목길을 올라 산복도로의 할머니들과 대화도 나누고 경노당도 둘러보고 지역경제과의 조림지도 살피고 산불감시원을 만나 순찰확인 서명을 해주기도 했다. 구체적인 실무가 없이 그냥 두루뭉술한 참모직인 국장이란 자리의 묘미는 길을 걸어도 산을 올라도 모두가 순찰이 되고 관내의 동향파악이라는 업무가 되는 것이었다. 살다살다 마침내 쥐구멍에 볕이 든 것 같았다.
 

그렇게 <먹고땡>으로 만판 놀고만 먹는 판에 마침내 제대로 된 일이 하나 떨어졌다. 어느 무료한 오후에

“아이구, 선배님!”
 
의료보험서구지사 한정길지부장이 빙글빙글 웃으며 국장실로 들어서
 
“아이구, 후배님. 아니 지사장님!”
 
악수를 하고
 
“우짠 일로? 청장실에는?”
“있다 가보지요. 선배님 오늘은 예방(禮訪)이 아니라 업무 차 왔습니다. 이 일은 선배님만이 도와줄 수 있습니다.”
 
하면서
 
“어이, 박부장 인사하게. 내가 말하던 시를 쓰는 우리 선배님 국장님이지.”
 
하며 인사를 시키더니
 
“우리 박부장 설명 듣고 잘 좀 챙겨주십시오. 저는 청장 실에 인사하고 오겠습니다.”
 
하고 나가자 박부장이란 사람이 커다란 서류봉투를 열어 몇 백 장도 넘는 서류뭉치를 서넛이나 꺼냈다.
 
“이게 뭐요?”
“예. 국장님. 올해부터 법이 바뀌어 중풍, 치매 등 거동이 불편하고 인지능력이 없어 장기요양이 필요한 노인이나 환자들의 등급을 지정하여 전액 혹은 일부를 국가지원으로 보호시설에 입원시키고 요양보호사자격증을 가진 가족이 가정에서 보살피는 재가보호자에 대한 비용을 지원하는 노인요양보호시책이 시행되는 것은 알고계시지요?”
“예. 한번 보고받은 것 같습니다.”
“그 장기요양대상자의 등급을 결정하는 심사위원회의위원장을 당연직으로서 시군구 기초자치단체의 복지담당국장이 맡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래요? 대상자가 꽤나 많지요?”
“예. 1차로 이번심사에 오른 사람만 한 2백 명이 조금 넘습니다.”
“그럼 그 많은 사람들의 건강상태나 가정형편 등 모든 조건을 일일이 심사해야 됩니까?”
“예.”
“심사위원은?‘
“예. 의사, 약사, 물리치료사, 심리치료사, 요양보호사 또 보건소와 구청의 관련업무 담당 등 모두 9명으로 되어있습니다.”
“간사는?”
“예. 담당과장인 제가 맡고 있습니다.”
“야, 골치 아픈데. 주관부서에서 미리 검토를 해서 어느 정도 등급을 산정해주는 것입니까? 아니면 처음부터 하나하나 검토를 해야 됩니까?”
“처음이라 한 명 한 명 일일이 서류를 검토하고 심사위원의 토론과 합의를 도출해 1, 2, 3등급으로 분류하여야 합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가정이나 병원 등 현장을 방문하여야 하는 경우도 있고요. 등급고하에 따라 수용시설입소여부, 정부지원의 전액, 일부, 비 지원으로 분류되는 만큼 당사자들에겐 엄청 중요한 일이고 힘든 가정에서는 생사가 달린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큰일 났네. 시간이 엄청 걸리겠네.”
“예에...”
 
담당부장이 머뭇거리는데
 
“선배님, 선배님만 믿고 저희는 물러갑니다.”
 
구청장실을 다녀온 한정길이사장이 담당부장에게 눈을 찡긋해 일어서게 하고는 홀홀히 사라져버렸다.
(어떡한다?)
 
장기요양대상자 심사기준 및 심사대상현황, 장기요양대상자 심사위원명단, 심사대상자명부와 조사표, 심사기준표... 테이블 가득 서류를 펼쳐놓고 살펴보던 열찬씨가 같이 심사에 들어갈 생활지원과 이미경 계장을 불러
 
“이것 봐요. 이게 다 우리가 심사할 서류들인데 잘못 하면 1박 2일 밤샘을 해도 못다 할 것 같아.”
“예. 저도 이미 자료를 받아 고민 중에 있습니다.” “살림 사는 이계장이 제대로 집에 들어가려면 어쨌거나 한 두어 시간에 마쳐야 되는데 아무튼 능률적인 방법을 찾아야겠지.”
“어떻게요?”
“우선은 이 계장이나 내가 서류를 꼼꼼히 읽어보고 장애의 정도와 요양시설수용의 필요성등 문제의 핵심이 되는 부분을 파악할 체크포인트나 흐름을 찾아야겠지.”
“...”
“그래서 말인데 이미 심사를 해 본 구청이 있는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가장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핵심 포인트가 뭔지 알아보란 말일세.”
“예.”
 
하고 나간 이미경 계장이 한 시간 뒤쯤
 
“국장님 큰 일 났습니다. 남구에서는 오후 두 시에 시작해서 밤 열 시에 끝이 났고 동래구에서는 당일에 끝이 안 나 이튿날까지 1박2일을 했답니다. 수영구는 자정이 넘어서 끝이 나고요.”
“저런 심사위원 중에 가정주부들도 많을 텐데.”
“예. 심사위원 수당 8만원 안 받고 안 한다고 난리가 났답니다. 그래도 법정업무에 당연직 심사위원이 대부분이라 안 할 수도 없는 형편이지요.”
“그렇구나. 나도 걱정이 태산이네. 평생을 공무원으로 지내며 회의행사에 시달려온 나는 회의시간 긴 게 제일 고통이 아닌가? 오죽하면 죽어 다시 태어나면 회의 없는 세상에 태어나고 싶을
정도로. 또 회의시간하고 여자치마는 짧을수록 좋다는 말도 있고.”
 
유심히 쳐다보다 마침내 입을 삐죽하던 이 계장이
 
“그러지 말고 책 빨리 읽기로 소문난 국장님께서 속독법 실력을 발휘해서 미리 파악해서 일사천리로 밀어붙이지요.”
“글쎄.”
 
 
심사당일이었다.
 
서대신동의 지사회의실에 모여 각자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서류를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쉬는데 너름새 좋은 한정길 지사장이 같이 차를 마시며 두루 인사를 시키고는
 
“자, 심사위원장님 잘 부탁합니다. 저는 물러갑니다.”
 
하고 떠나자
 
“여러 위원님들, 저는 서구청주민복지국장 가열찬입니다. 우리가 심사를 하여야할 경위는 잘 아실 테고 저나 여러분이나 얼추 당연직 심사위원이라 아무리 힘이 들고 시간이 걸려도 안 할 수도 없습니다. 부잣집에서 돼지를 키우는 이유는 잔칫날 잡아먹기 위해서라는데 우리가 지금 바로 그렇게 한 몸을 던지듯 이 일에 열중해야할 것입니다. 아무튼 사내아이들이 입대를 할 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을 하는데 여러분들도 기쁜 마음으로 임해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간사 박 부장에게 심사개요를 설명하게 하고 1등급지정대상자 한 명을 심사하는데 가정방문을 거친 기본조사표, 진단서, 의식, 인지, 동작, 가정환경 등을 도표로 표시한 그라프와 조사자의견서등을 보며 의사, 물리치료사에게 병세와 재활가능여부 등을 물어 의견을 모으는데 30분이 더 걸렸다. 이번에는 2등급 대상자를 한 건 심사하는데 역시 20분 가까이 걸리는 지라 열찬씨가
 
“자, 여러 위원님들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잘 들으십시오. 우리가 보통 심사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격 미달자가 잘못 심사되어 자격을 받는 경우가 없도록 하는 것이고 다음으로 자격대상자가 억울하게 탈락하는 경우가 없도록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하는 심사는 정부의 복지시책일환으로 어려운 장애인과 가정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니 만큼 두 번째 기준인 억울하게 탈락되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겠지요. 그러니까 업무나 심사자체가 인간사랑 휴머니즘을 그 기본이랄까 바탕으로 깔아야 된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다음 우리가 아까 1,2등급대상 한 건씩을 심사하는데 약 30분씩이 소요되었습니다. 이러다간 밤을 새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일주일이나 그 이상이 걸릴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매 조사표와 진단서에 해당되는 의사, 약사, 물리치료사, 심리치료사 등의 전문가의견을 듣되 특별히 이상하거나 심각한 하자가 없으면 다른 위원들은 이의를 말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또 자기의 전공부분에 대한 검토의견을 낼 때도 건별로 시시콜콜 할 것이 아니라 맨 처음 한 건에 대비해 특별한 상이점만 보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얼마나 능률적인 심사를 하느냐는 바로 여러분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하니 대충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자, 그럼 1등급 두 번째 건입니다. 본 건은 정신신경과 의사선생님이 설명해주시지요.”
 
해서 설명을 듣고
 
“제 생각엔 심사의 키포인트가 우선 의식이 있느냐, 또 남의 말을 알아듣느냐, 치매가 있긴 하지만 가끔 정신이 돌아오느냐, 그 다음엔 스스로 일어서고 숟가락질을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고 다음으로는 혼자 힘으로 화장실을 갈 수 있느냐가 보다 중요한 심사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하고 좌중을 둘러보고
 
“자, 그런 시각으로 보아 아까 의사선생님의 설명과 주관부서의 의견을 들어 1등급으로 지정을 하는데 이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몇 몇의 동의와 암묵적 수긍으로
 
“자, 그럼 본건은 1등급으로 지정합니다.”
 
결정을 하고
 
“다음 건은 재활의학과 선생님 의견제시해주시죠.”
 
해서 의견을 듣고
 
“물리치료사의 입장에서는 어때요?”
“요양보호사의 입장에서는 이의가 없습니까?”
 
물어서 불과 한 5분 만에 한 건이 통과되었다. 이렇게 1등급 54건을 처리했다. 두 건은 2등급으로 하향 조정되고 나머지는 원안통과였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여섯 시 퇴근시간이 가까웠다. 오후 2시에 시작해서 네 시간이나 걸린 것이었다. 게다가 2등급 80건, 3등급 65건 아직 145건이나 남아 있는 것이었다. 심사장에 들른 한정길지사장이
 
“위원장님, 시간이 늦은데 저녁이나 시켜먹고 하는 것이...”
 
하며 말끝을 흐리는데 순간 심사위원들의 표정들이 모두 뜨악한지라
 
“조금 더 봐서. 일단 제가 한 번 밀어붙여보지요.”
 
하고는
 
“효율적인 심사를 위해 우선 5분간 휴식을 하겠습니다. 담배를 피우거나 화장실도 다녀오고 커피도 한 잔씩 하고 5분 후에 모입니다.”
 
하고 자신도 바깥공기를 쐬고 온 후
 
“이제 2등급의 심사를 시작합니다. 심사건수도 가장 많은 오늘의 하이라이트가 되겠습니다. 지금부터는 담당 의사선생님이나 해당 심사위원들이 일일이 병세나 치유여부를 설명하지 말고 조사표의 기록상 이상여부만 보고해주시기 바랍니다.”
 
하고는
 
“2등급 두 번 째 건. 정신신경과선생님, 조사표상 이상 없습니까?”
“없습니다.”
“물리치료사 의견은?”
“이상 없습니다.”
“그럼 통과! 다음 세 번 째 건. 재활의학과선생님 이상 없습니까?”
“이상 없습니다.”
“통과!”
 
이렇게 2,3분에 한 건씩 수월하게 진도가 나가는데
 
“위원장님, 이 건은 제가 실제로 현장에 나가봐서 아는데 재산사항도 전무하다시피 하고 가족사항도 조손가정이라 도저히 집에서는 관리가 불가능합니다. 가정형편상 약간의 가중치를 주어 1등급으로 시설수용하면 안 되겠습니까?”
 
이미경 계장이 간곡한 어조로 말하는지라
 
“예. 그러니까 우리 위원님들의 휴머니즘이 발휘될 시점이군요. 장애등급보다는 약간 높게 1등급으로 지정해 시설에 수용하고 두 손자들은 소년가장으로 구청에서 보호하는 것이?”
 
아무 이의가 없이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라
 
“자, 그럼 간사이신 박 부장님의 주최 측 의견은?”
“예. 여러 위원님들이 이의가 없으니 위원장님이 결정해주셔야죠.”
“알았어요. 자 본건은 가중치를 주어 1등급으로 상향조정합니다. 이의 있습니까?”
“...”
“이의 없으면 통과합니다!”
 
이렇게 속도를 내어 여덟 시경에 2등급의 심사를 마치자
 
“자, 나머지는 3등급입니다. 3등급은 어차피 시설수용이 되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경미한 장애인인 만큼 심사를 좀 단순화하겠습니다. 지금부터 10분간 여러분들이 각자 명단을 죽 살펴 이상이 있어 보이는 사람의 조사내용을 재검토 한 후 나중에 전체위원의 이상 유무를 물어 결정토록 하겠습니다.”
 
하고 자연스레 화장실과 커피와 휴식을 겸하게 하고 10분 뒤
 
“자, 3등급 첫 번째 건입니다. 이의 있는 분?”
“...
“이의 없으면 통과합니다! 다음 건?‘
 
이렇게 진행하니 두건 정도만 간단한 이의가 있고 천편일률적으로 통과 되어 40분 만에 종결이 되었다.
 
“수고들 하셨습니다.”
 
의사, 약사, 간호사에 하다 못 해 가정주부인 심사위원들이 모두 황황히 떠나고 눈치를 보던 이미경계장도 한정길위원장과 담소중인 열찬씨에게
 
“국장님!”
 
같이 갈 건지 아니면 자기만 먼저 가도 되는지 자동차 키를 흔들어 보이는데
 
“계장님, 먼저 가십시오. 위원장님은 오늘 제가 모십니다. 모처럼 언양국민학교 동창회를 가집니다. 단 두 명의 동창회.”
 
하더니 박 부장과 셋이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이거.”
 
열찬씨가 심사수당이 든 봉투를 박과장에게 내밀었다. 아주 오래전 동사무소의 투표구간사를 하면 지역유지투표구위원장이 늘 위원수당을 고생하는 실무자들에게 돌려주던 것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 점잖은 위원장이 되어 위원수당을 실무자에게 던져주겠다고 생각했던 그 위원장을 평생 처음 해본 것이었다.
 
“아, 아닙니다. 위원장님 수고하셨는데 다만 교통비라도.”
 
박 부장도 받지 않고 한정길지사장도
 
“선배님, 그러면 제가 뭐가 됩니까? 불러다 실컷 고생만 시키고. 박부장! 절대로 받으면 안 됩니다.”
 
하는지라
 
“그럼 다음 심사 때 내가 저녁을 내지요. 다음 심사 때는 위원들께도 미리 만찬을 한다고 알리고 식당도 예약하세요.”
 
하고 불고기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지사장님, 지금까지 심사를 마친 구중에서 우리구가 가장 빨리 끝난 최단시간소요사롑니다. 위원장님 밀어붙이는 카리스마에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권위도 똘똘 뭉친 의사, 약사가 아무 말 없이 따르는 것을 보고요.”
“이 사람아, 보면 모르나 이 부산바닥에서 소수정예라 카면 어디까지나 언양국민학교 동창들이지. 허령 부산시지사장에 우리 국장님에 또 한 모 서구지사장에...”
“지당한 말씀입니다.”
 
둘이 죽이 척척 맞는데
 
“부끄럽구로 와 이라노? 내가 저녁 값 내란 말이제?”
“아, 아닙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열찬씨도 결코 싫지 않았다.
 
※ 이 대하소설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