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백수출발⑤
미혜씨가 웃는데
“언니는? 언니 지가 형부 훌라치는데 제일 협조 잘 하는 일등공신이면서.”
하나 미혜씨 부부가 들다 흠칫했다. 얌전한 예소의씨가 그래도 몇 명 안 되는 오랜 친구들과 부동산사무소 같은 데서 늦게까지 훌라를 치다 판이 커져 포커가 벌어져 돈이 떨어져
“만아, 내 여게 부동산사무소에 있다.”
전화가 오면
“와 당신 돈 모자라능교?”
“응.”
하면
“알았심더.”

한 마디와 함께 집에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현금인출기에 뽑아서라도 딱 50만원을 현장에 가져다주면 본전을 찾아 돈을 돌려주든 다 잃고 빈손으로 들어와도 일체 말이 없는 여장부였다. 어찌 보면 고목나무에 매미가 붙은 것 같은 모양새의 부부지만 그 넉넉한 아낙이 조그만 사내에 대한 존경과 충성이 끝이 없었다. 그래서 부부의 연(緣)은 하늘이 내려준다는 말이 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데 그 뿐인가? 심심하면 관광버스 타는 죄는?”
영순씨가 들고 나오자
“착한 처제가 그 무슨 소리요?”
예소의씨가 반발을 하고
“아무튼 거기 가면 남의 여자랑 춤추고 손잡고 더듬고 하는 거 아잉교?”
“뭐로? 다 늙어 가면서 또 내가 언니 모르게 가는 것도 아이고 같이 가자 캐도 언니가 춤추는 취미가 없다고 안 가서 그렇지.”
하며 주고받는데
“야가 지금 무슨 소리 하노? 기왕이면 좋은 이야기만 하지. 너거 형부는 단점보다 장점이 많고 단점은 거의 없다. 정말로 똥도 버리기 아까운 사람이다.”
“아이구야, 아예 여자팔불출로 자랑이 늘어졌네.”
“야, 들어봐라. 술 안 묵고 착실하제, 평생에 허튼소리 한번 안 하제, 손끝 야물고 청소에 취미 많제, 설거지 잘 하고 행주까지 빨아 널제, 또 옷 하나를 사도 목돈을 주고라도 단단하고 폼 나는 것으로 사서 맨 날 신사제, 돈 아껴 쓰면서도 쓸 데는 꼭 쓰제, 지 마누라 위하제...”
“아따, 참 엔간히 해라. 진짜 똥도 안 버리겠네.”
“똥을 안 버리는 기 아이라 똥도 참 잘 파준다.”
“엥?”
한번은 대식가인 미혜씨가 언양에 가서 그 맛있는 불고기를 양껏 먹고 길가에서 파는 빛 좋은 홍시를 사서 또 얼마나 먹었는지 감 껍데기가 막혀 뒤를 못 보고 끙끙거리는 걸 남편 예소의씨가 일일이 꼬챙이로 파내어 끝내 소통을 시켰다는 것이었다.
“야, 대단하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따라가겠네.”
“마 나는 그럴 일도 없고 그런 거까지 안 바랄 테니까 당신이나 야무지게 사소.”
“그래 나는 진짜 맨발 벗고도 형님을 못 따라가고 다시 태어나도 못 따라갈 것 같다.”
“그러니까 마 내를 잘 만낸 줄 아소. 천사가 따로 있나, 내가 바로 천사지.”
오랜만에 기분이 고무된 영순씨가
“형부하고 반대로 이 양반은 장점보다 단점이 훨씬 많은 사람이다. 뭐 손끝이 야물고 동작이 빠르나, 거기에 눈치도 없제, 성질은 불뚝 성질에 고집은 하늘대앙꼬에다 윗사람들하고는 우째 그래 못 지내고 늘 싸우고 옷을 깨끗이 입거나 음식을 곱게 먹거나 젓가락질도 잘 못 하고...”
“아따, 고만해라, 영순아. 그라다가 가서방 밥값 내겠나?”
말리던 미혜씨가
“술 좋아하고 고스톱 좋아하고 술집에 가면 아가씨들 더듬는 거는 와 빼노?”
하며 한 술 더 뜨더니
“그래도 늘 친절하고 인정 있고 무어 보다 예의 바르고 사람 안 가리고.”
다시 입장을 바꾸는데
“맞다. 언니야, 내가 이 사람 정년퇴임하고 생각해 봤는데 이만하면 중간은 넘는다 싶더라. 그 소소한 단점은 다 빼고 내가 제일 힘 드는 건 이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술 하고 책 하고 시가 문젠데 아내로서 술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싫고 책은 내가 취미가 없으니 그냥 넘어가고 시는 남들은 좋다카는데 나는 그게 늘 뭔가 부끄럽고 간지럽고 남들 보기 남사스럽고 참 뭐라 말로 못 하겠더라. 뭐 이 사람 말로는 내가 대한민국 최고악질문학평론가라 카지만 나는 이 사람 시 자체를 읽는 것만 해도 힘이 들어.”
“그 기 무슨 소리고. 사람들이 이서방 시가 얼마나 좋고 이런 달콤한 시를 쓰는 남편은 어떤 여자가 데리고 사는지 니를 얼만 부러워하는데?”
“아이고, 새꼴시럽어라. 그라면 지가 한번 데리고 살아보라카지.”
“마, 시끄럽다. 니는 마 지금 호강에 넘쳐서 요강에 똥 누는 소리하고 있다!”
“그, 그런가? 그라고 보이 이 사람 잘 하는 것도 있기는 하다. 술 취하면 가끔 꽃 사서 집에 오는 거 하고 니 산다고 욕본다 소리하는 거 하고.”
“거 봐라. 너거 형부는 평생 그런 일이 없다.”
“또 물고기 잘 잡고 고사리 잘 꺾고.”
“맞다. 가서방 덕에 자연산 매운탕 얼마나 많이 먹노?”
“또 이건 진짜 장점인데 암만 술이 떡이 되도 아침마다 벌떡벌떡 일어나 출근 잘 하는 거.”
“그래. 그 기 최고 아이가?”
“그라고 진짜 고마운 거는 집안에 큰일이 생겨 가족들이 우왕좌왕하고 내가 이런저런 고민과 연구로 머리가 빠개질라 카면 한 마디로 딱 잘라서 결론을 내고 그대로 밀고 나가면 여측이 없는 기라 과연 이기 남자는 남자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지. 그래서 우리 아아들은 물론 자기처남, 처제 장인장모 일까지 고비고비 잘도 넘겼지.”
“그래. 거기 바로 사회 생활하는 남자 아이가?”
비로소 착한 사람으로 돌아오자
“됐다. 인자사 가서방 니하고 나도 천당에 따라가겠다. 우짜겠노? 죽어서라도 우리 넷이 가끔 만나 밥도 묵고 이야기도 하고 지내야지.”
예소의씨가 결론을 낼 때쯤 자동차가 칠암에 도착했다.
<꺼먹동네>라는 아나고, 그러니까 붕장어회 전문집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아지매, 아나고 1관에 얼만데요?”
“7만 오천원.”
“몇이나 묵어지는데요?”
“보통 서넛 이는 묵지요. 아주 잘 묵는 사람은 둘이 다 묵기도 하고.”
“그럼 아나고 일관에 잡어회 하나!”
늘 음식이 모자랄까 봐 미리 걱정하는 미혜씨가 넉넉히 음식을 시키자
“형부, 맥주라도 한 잔 할랑교?”
“어데. 마 가서방 마시는 소주나 한 잔 얻어먹지.”
해도
“오늘은 특별한 날인데 건배를 해야지. 보소, 아지매. 여게 시원소주 하나에 맥주 한 병, 사이다 하나!”
모처럼 영순씨가 호기를 부려 맥주를 부어
“건배!”
“우리 가서방 퇴임축하 건배!”
“모두의 건강을 위해 건배!”
“이 행복한 봄날을 위해 건배!”
“봄날은 간다가 오래 안 가고 지속되기를 위해 건배!”
모두 한 마디씩 하고 열찬씨가 마지막의 긴 건배를 한 번 더 한 후에 다들 음식을 먹는데 예소의씨는 약 먹듯이 조금씩 맛만 보는 것처럼 술과 회를 께작거리고 영순씨는 복스럽게 먹기는 하지만 덩치와 달리 조금 먹다 금방 속도가 느려지고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열찬씨는 소주와 맥주를 탄 폭탄주와 아나고회 잡어회에 찌게다시까지 정신없이 먹어치우고 커다란 접시에 담은 양배추 채에 노란 콩고물과 초장을 얹고 비벼 회를 상추위에 회를 얹어 역시 정신없이 폭풍처럼 흡입하던 미혜씨가 상위를 쓰윽 훑어보고 젓가락을 놓더니
“보소, 아지매!”
종업원을 부르는 순간 영순씨가 눈을 끔뻑하며 상 밑으로 발을 간질였다. 아무 말 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여게 아나고 반관만 더!”
그 제서야 마음이 놓이는지 다시 주먹보다도 커다란 쌈을 사기 시작했다. 아나고 내장을 넣은 매콤한 매운탕이 나올 때쯤 그 많은 음식의 90%를 둘이 나눠 먹은 폭인 열찬씨와 미혜씨가 비로소 상에서 물러나 주위를 둘러보는데 열찬씨의 얼굴이 불콰하게 복숭아꽃이 피어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이미 소주 두 병에 맥주 한 병을 건배한다고 조금 부어준 것과 에소의씨가 약 먹듯이 한 잔을 찔끔거리는 걸 빼고 혼자 다 마신 것이었다.
이제 마치 아주 연약하고 소심한 미식가라도 된 것처럼 서로 배가 부르다며 밥 두 공기를 반이나 남기며 자리를 끝낸 그들은 바다가 잘 보이는 카페로 가서 여자 둘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커피를 홀짝거리며 이야기삼매경에 들어갔고 커피 한 잔씩을 마친 두 남성은 앉은자리에서 졸다 마침내 코를 골기 시작했다.
영순씨가 흔드는 바람에 깨어난 열찬씨가 시계를 보니 네시 반이나 되었다. 무려 두 시간 이상을 두 여자는 이야기를 나누고 두 남자는 잠이 든 것이었다. 연산동의 미혜씨 집에 두 사람을 내려주고 열찬씨는 집에 갔다 오느니 바로 산우회에 친구들을 만나러가기로 하고 사무실 앞에 차를 댄 영순씨가
“보소. 오늘은 끗발 안 나도 짜부치지 마소.”
“알았다.”
“마치고 나면 돈을 잃더라도 술 한 잔 사고 오소.”
“알았다.”
“제발 잘게 놀지 말고 대범하게 큰 소리 좀 탕탕 치고 오소.”
“알았다.”
※ 이 대하소설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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