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物權色
1-3. 제3의 결단
좀 웃기지? 나한텐 웃프지. 그러데 신을 신성시하던 우리 문화에서는 그게 말이 되는 거였거든. 난 더 이상 진군한다며 갈 수 없었어. 나의 이런 상황을 눈치 챈 부하들한테 지휘력이 떨어졌으니까. 그렇다고 난 회군한다며 돌아 갈 수도 없었어. 난 결국 신성모독죄로 사형받을 가능성이 아주 컸으니까. 그렇게 밤새 이리저리 뒤척이다 나는 최종 결정했어.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다! 다른 데로 가자. 이 길도 저 길도 아닌 제3의 길로 가자고 했지.
아! 힘든 결정이었겠다. 그런데 다른 데라니 거기가 어디야?
바로 옆 나라야. 그 나라로 가야겠다 결정했지. 폼 나게 말하면 망명이고, 실제로 말하면 도망이야. 나를 잡아 죽이려 하는 놈들한테 그게 나한텐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어. 내가 가려고 마음먹던 옆 나라는 우리랑 사이가 안 좋았어. 한마디로 적국이었지. 하지만 어차피 한 민족이고 말도 서로 통하는 사이니 위안이 되었어. 우리보다 좀 빡세게 산다고 들었어도 도망가는 마당에 그게 문제가 되겠어. 내가 또 어딜 가나 잘 적응하는 편이라 노 플라브럼이라 생각했지. 간단한 짐만 챙기고 병사들이 잠에서 깨어날 어두운 새벽에 나는 떠났어. 막상 나의 조국을 버리고 떠나려니 눈물이 나더군. 내가 가려는 곳의 지형은 험했어. 평탄한 길이 아니고 거친 산들을 넘어 나흘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어.
아! 누구 만날 사람이라도 있었던 거야.
있었지. 내가 원래 사교성이 좋거든. 여러 전투경험을 통해 생존력도 강해. 당시 최고의 스승한테서 교육도 받았어. 그리고 어딜 데려다 놔도 살아날 스타일이야. 예전에 외적이 쳐들어올 때 우리나라는 그 나라와 같이 싸웠는데 그때 사귄 친구가 있었어. 난 일단 그 친구 집을 찾아갔어. 나를 반갑게 맞이하더군. 그 친구도 나처럼 그 나라에서는 힘 좀 쓰는 정치인이자 젊은 장군이었어. 일단 친구 집에서 밥을 먹었는데 충격이었어. 빵과 토마토, 그리고 누런 기름이 전부더군. 그래도 손님이 왔는데 너무하다 싶었는데 자기네는 원래 그렇게 검소하게 먹는데. 그래도 시장이 반찬이라고 맛있게 먹었어. 나는 원래 적응에 능해. 거기 가면 거기 식대로 얼마든지 살 수 있어.
내가 볼 때 잘 생긴 사람들은 안 그럴 거 같은데 갑철이는 뛰어난 데가 많구나.
내가 원래 그래. 아무튼 그 친구가 나한테 아주 중요한 말을 허더군. 내일 자기랑 왕궁에 같이 들어가자더군. 나는 당연히 좋다고 했지. 고맙다고도 했어. 이제 내일이면 적국이 된 나라의 왕을 만나는 거야. 나는 어차피 망명한 입장이니까 좋고 나쁘고 따질 게 없었어. 나는 밥을 잘 얻어먹고 난 후 내일 만날 왕한테 이득이 될 만한 것들이 무엇이 있을지 머리를 굴렸지. 사실 나는 그 나라 입장에서도 무시 못할 인물이었어. 내 나라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사실 애국심 같은 건 희박한 사람이야. 알량한 애국심보다 나한테 실질적 이익이 되는 걸 쫓으며 살아왔지. 이제 적국으로 망명왔으니까 여기서도 나한테 이익이 되는 이기적인 쪽으로 살아야겠다. 맘 먹었지.
갑철이만 이기적으로 사는 건 아니야. 사람들은 모두 다 이기적으로 살아. 물론 그러진 않겠지만 너무 자책하며 자괴감 가지지 않아도 돼. 나도 물론 이기적인 여자야. 아주 이기적이지. 기회되면 내 얘기는 나중에 들려줄게. 오늘은 갑철이 얘기만 잘 들을게.
자영아, 고마워. 앞으로 내 이야기는 정말로 드라마틱해.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가 나오면 힛트칠 거야. 나는 다음 날 아침 친구랑 같이 왕을 뵈러 궁전으로 들어갔어. 궁전이라지만 우리나라 궁전에 비해서는 초라했지. 정말로 왕이나 백성이나 다 수수하게 살고 있었어. 소박한 궁전에 들어서자마자 왕이 나를 반기더군. 아주 풍채가 좋은 건장한 남자였어. 말하는 것도 왕답게 아주 당당했어. 적국에서 망명 온 나를 경계하지도 않았어. 말이 많지도 않았어. 아주 담백하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사람이었어. 짧은 환영인사를 몇마디 하더니 곧 내가 살던 나라에 대해 속시원히 털어놓으라고 하더군.
<kaci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