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백수출발⑧
“어이, 손사장!”
타일 공 이
사장이 잔을 건네며
“중국에 나간 사람들은 보통 자식보다 나이어린 처녀를 현지처로 얻어 자기보다 나이어린 장모까지 넘본다는데 그 중국여자 이야기 좀 해보소. 속살이 하얀지 검은지 냄새나 재미가 색다른지?”
비릿한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아이구, 말도 마소. 나는 꾸냥의 꾸자만 들어도 부끄러워서 낯을 못 드는데 그 씰데없는 소리 좀 하지마소.”
하며 손사래를 치는데
“그 말 참이요?”
양 사장도 빙긋이 웃는데
“그 기 참이면 우리가 시방 고자하고 술 마신단 말이가?”
페인트 설사장의 말에 와르르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시끌벅적 자리를 끝내고 다시 호주머니를 털어 돈을 세어보다 집어넣고 카드결제를 한 열찬씨가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오자
“돈 많이 나왔제?”
“잘 묵었어요.”
하면서 이빨을 쑤시며 흩어지는데
“어이, 2차 됐나?”
타일 이 사장이 커다랗게 소리치자
“황 사장이 벌써 문 열러갔다.”
양 사장의 말에 모두 2층 사무실을 바라보니 벌써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이 국장, 모처럼 왔으니 열한 시까지 두 시간만 놀다 가지? 영구귀국 손 사장도 그렇고.”
하면서 둘을 이끌고 사무실로 올라가 황 사장, 이 사장과 다섯이 원탁에 둘러앉는데
“나는?”
페인트 설사장이 빙그레 웃으며 들어오더니
“먼저들 치소. 나는 구경이나 하지.”
하더니
“자, 1 2 3 4에 만 원 수입에 천 원씩 뗍니다.”
하며 끼어드는데
“2차에 데라가 어딨노? 돈 놓고 돈 묵기지!”
“맞아. 오늘 같이 좋은 물주들 있을 때 우리 같은 백수들이 목에 때를 좀 벗겨야지.”
미장공 출신 두 친구이자 앙숙이 모처럼 맞장구를 치자
“그래. 가국장, 손 사장 입가심 맥주랑 소주에 안주도 좀 사야 되지.”
하며 양 사장이 수긍했다. 그렇게 한참 판이 돌아가
“땡큐! 자, 한방 훌에 땡쿠삐리면 대체 돈이 얼마고?”
“스톱! 자, 세븐자 쥔 사람 신고하지. 그렇지 선사장, 양사장은 또 세븐자 잡혔네!”
미장친구 황 사장, 이 사장이 판을 휩쓸고 양 사장이 선전하는 가운데 훌라가 서툰 손사장과 열찬씨가 계속 돈을 들이부었다. 아까 술값을 내려다 도로 넣은 돈에서 만 원짜리가 한 둘씩 자꾸만 빠져나와 호주머니가 훌빈해지나 싶은데
“자, 끝발주 한 잔씩!”
선 사장이 종이컵에 맥주를 한잔씩 돌렸다.
“잘 되면 더 잘 되고 안 되면 끝발 나고!”
잔뜩 신명이 나는 걸로 보아 저도 기분 좋게 술이 취한 데다 큰 판이 자주 나와 데라도 많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옆 자리의 사각테이블에는 맥주 큰 병 세 개와 오징어와 땅콩에 줄줄이 비엔나로 상을 차리고 술을 안 좋아하는 이사장, 황사장을 휘해 박카스도 두 병 사고 열찬씨를 위하여 특별히 시원소주도 따로 한 병 얹어놓고는
“자, 모두들 부자 되세요. 소인은 갑니다.”
선 사장이 기분 좋게 일어섰다.
“데라가 4,5만 원도 더 나왔겠는데 기껏 돈 만원 들여서 술상 보고 도망가니 완전 팔자 고쳤겠네.”
“사람이 덩치 값을 못 해!”
또 두 미장친구가 한 마디씩 하는데
“그래도 이 늦은 시간에 술심부름 해주는 친구가 어데 있겠노? 다짜고짜로 500원씩 도라고 해서 동전 서너 개 얻어가는 임 사장보다는 낫지.”
양 사장의 말에
“그래? 그 친구가 와 그래 좀 되게 변했노?”
손 사장이 의아해 하는데
“형편이 어렵기도 하지만 체질인 것 같아. 장난 비슷하게 청승을 떨면 사람들이 귀찮기도 하고 따지기도 그렇고 모르는 척 넘어가는 데 재미를 붙여서 말이지.”
“그래 천층만층 구만 층이라고 참 별별 사람이 많지만 잘 알고 지내던 친구들도 나이가 들면서 다들 참 희한하게도 변하더구먼. 똑 같은 사람도 없지만 변하지 않은 사람도 없고...”
“그래 맞아. 그러면서도 대체로 어딘가 안 좋고 서글픈 모습으로 변하지.”
60년대 말 그 어려운 시절에 한창 일어서기 시작하던 부산의 신발산업에 취업이 잘 되어 제일 인기가 높았던 부산대 화공과를 입학해서 처음 만났던 하동과 김해의 두 수재들이 하나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하나는 이마가 훌쩍 벗겨진 모습을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열찬씨가 나서
“맞아. 나이 들어 잘 안 풀리는 사람을 보면 청승은 늘어지고 팔자는 오그라지고.”
“허, 거 참. 기가 차게 맞는 말이네.”
손 사장이 감탄을 하자
“그 기 명은 길고 복은 짧고의 2탄이제?”
전에 한 번 들은 양 사장이 빙긋이 웃는데
“너거는 훌라 치다가 뭐 하노? 빨리 패 안 돌리나”
이제 끝발이 내리막으로 앞에 쌓인 밑천이 많이 줄어든 황 사장이 짜증을 내다가
“어이, 이 사장 니 지금 뭐 하노? 이리 능가라!”
패를 잘 못 돌렸다고 카드를 빼앗자
“있어 봐라! 내가 어데 잘 못 했나? 패가를 때 다른 사람들이 먼저 주워가서 그렇지?”
40년 막역지우 둘이 천하에 둘도 없는 적수가 되어 싸우기 시작하자
“마침 열한 시네. 나는 간데이. 자, 봐라. 5만 원 내서 딱 주차비 5천원 따고 간다.”
양 사장이 돈을 세어 보이며 일어나자
“오랜만인데 조금만 더 하자! 최소한 묵기 다섯 판은 더 해야지.”
“그래 딱 묵기 다섯 판이다.”
하고 다섯 판을 더 치니 이미 부자가 된 이 사장 앞에만 더 돈이 몰리고 황 사장과 열찬씨의 앞은 텅하니 비어버렸다.
“문 잘 닫고 오소. 먼저 간데이.”
양 사장이 일어서자
“오륙만 원 꼴고 이적지 놀았으면 선전이다.”
손 사장도 일어서는데
“봐라. 영신아! 니는 집에 못 간다.”
눈이 벌건 황 사장이 목소리를 높이자
“와?”
한 아름 돈을 챙겨 세어보며 입이 벙실거리는 이 사장이 문을 나서려는데
“못 간다. 내 본전 찾을 때까지.”
“못 간다고? 그라면 니 밑천은 있나?”
“비상금 있다!”
수첩 밑바닥에서 5만 원 권 두 장을 집어든 황 사장이
“오늘 니캉내캉 밤샘이다. 내 돈 떨어지면 현금인출기에서 찾아오면 되고.”
하면서 둘이 마주 앉더니
“둘이 우째 치노? 셋은 되어야지. 어이, 이 국장!”
이 사장이 대충 사무실을 정리하는 열찬씨를 부르는데
“아니요. 나는 내일 먼데 갈 일이 있어서.”
열찬씨가 황급히 계단을 내려왔다. 두 사람은 단 둘이서 밤샘을 하기가 예사고 새벽에 내 본전 내 놔라, 못 준다 싸우기도 하지만 다시 은행에서 돈을 찾아와 하루 종일 계속 노름을 하다 저녁에 놀러오는 회원들에게 발견된다는 이야기가 생각나서였다.
골목길을 벗어나니 전깃줄 위로 노랗게 반달이 떠 있었다. 내일 낮이면 하얗게 낮에 나온 반달이 될 테지, 저렇게 하얗게 날밤을 샐 두 친구는 내일 얼마나 추레하게 지쳐버릴까 생각하며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꼬물꼬물 가늠하던 돈을 꺼내 세어보니 지갑에서 나온 십 만 원이 조금 넘었다. 30만 원 가까이 카드를 끊었으니 하루 잡비로 근 20만 원을 썼으니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택시를 잡으니 벌써 자정이 넘어 할증료까지 물어야 될 형편이었다. 민간인이 된 첫 외출이 힘들게 끝나고 있었다.
자고 나서 약속대로 영순씨와 부산은행에 들러 퇴직수당과 공제회비, 전별금의 액수를 확인하니 일억 오천에 조금 모자랐다. 일억은 천만 원짜리 열 장으로 나머지는 5백만 원짜리 여섯 장 백만 원짜리 열다섯 장과 현금 일부를 찾아 영순씨의 손에 넘겨주니
“야! 이렇게 많은 돈은 첨 쥐어보네. 당신 고맙고도 욕 봤심더.”
영순씨가 또 마음이 짠 한 모양이었다. 사위 김 서방에게 자동차 구입비로 주기로 한 1천5백을 따로 꺼내
“봉투에 담아서 저녁에 당신이 김 서방 보고 줄량교?”
영순씨가 흐뭇한 표정이 되는데
“가들 계좌번호있제. 바로 꽂아주고 나중에 당신이 돈 보냈다고 전화나 해라.”
“와요? 얼굴보고 직접 주지?” “아이고. 쑥쓰럽구로. 차 한대를 다 사주는 것도 아이면서.”
하고 동생 백찬이와 장모 소야댁에게도 백만 원씩을 입금하고 나중에 영순씨가 전화로 통보하기로 했다. 영순씨의 거래은행인 농협토곡지점에 들려 정기예금을 들려고 상담을 하니
세금이 안 붙는 비과세적금은 3천만 원 밖에 되지 않고다고 해서 3천만 원을 적금하고
“자, 나머지는 어쩐다? 그냥 일반예금으로 썩히기도 그렇고.”
하자 새마을금고나 신용금고 같은 제2금융권으로 가면 비과세는 아니지만 은행보다는 비싼 이자로 적금을 들 수 있다고 했다. 하여 연제예식장 위의 연산1, 8, 9새마을금고와 아파트입구의 연산망미신용협동조합에 새로 회원가입을 하고 무려 여섯 건의 적금 8,500만 원이 든 통장과 각각의 사용인감에 홍보 팸플릿과 사은품까지 한 아름 챙겨든 영순씨가 입이 함박만큼 벌어져
“살다보니 이런 날이 다 있네. 역시 능력 있는 남편을 만나고 볼 일이야.”
하며 신명을 내는지라
“기왕 기분 내는 것 근사한데서 점심이나 먹고 가지.”
열찬씨의 말에
“그럽시다.”
사무관동기 김선일씨가 운영하는 남천낙지 앞에 차를 세웠다.“
식당문을 열면서
“아버지는?”
얼마 전에 임업직서기관 보직인 부산시녹지사업소장으로 퇴직한 김선일씨를 찾자 난새라는 이름의 아들이
“아버지, 어머니는 여행 갔습니다. 멀리.”
하는지라
“어디로?‘
“중남미로요. 멕시코에서 페루, 베네수엘라,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에 에콰도르까지 15박 16일로.”
평소 여행광인 두 부부가 세계 곳곳 웬만한 곳은 안 가본 곳이 없어 갈라파고스섬을 가고 싶다고 하더니 드디어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태동한 그 남태평양의 외딴섬, 청남색의 이구아나가 천천히 파래를 뜯는 지상의 낙원으로 떠났구나 생각하는데
“엄마, 좋겠다!”
감탄을 하는 영순씨에게
“우리도 같이 여행이나 한 번 갈까?”
눈을 들여다보자
“어데로?”
“베트남하고 캄보디아.”
“거게는 당신 갔다 온 데 아이가? 너무 더워서 아투피 올라온 곳.”
“맞아. 거게 나만 갔다 오고 당신이 못 간 것이 맘에 걸려. 또 요즘 세상에 하롱베이하고 앙코르와트 안 갔다온 사람은 사람 축에도 못 드니 말이야.”
“치이. 나는 싫소. 기왕이면 서유럽이나 미국동부, 호주나 뉴질랜드 쪽이지 덥고 불결한 동남아가 다 뭐요?”
“아이고 이 허세, 아직 외국이라고는 대마도 밖에 안 가본 사람이 어디서 들은 것은 있어서?”
하고 웃는데 음식이 들어왔다. 어제의 피로로 아직도 머리가 띵 하고 속이 울렁거렸지만 매운 낙지볶음 같은 일등안주를 두고 그냥 넘어가기가 아쉬워 소주와 사이다를 하나씩 시키는데
“나는 음료수 대신 우동사리 하나!”
영순씨가 잔뜩 신명이 났다.
※ 이 대하소설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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