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642)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8장 백수출발⑩
대하소설 「신불산」(642)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8장 백수출발⑩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3.11.21 06:45
  • 업데이트 2023.11.19 11: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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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백수출발⑩
문득 전화기 속에서 영순씨의 목소리가 울려나오며
 
“어덴교?”
“호수공원위에 어린이 놀이터.”
“동현이, 가현이 태권도장 갈 시간임더. 올라오소.”
 
하는 소리에 아이들을 철수시켰다.

이튿날은 구서동의 밭에 가기로 하고 김해의 순찬씨와 함께 산 삽, 괭이, 곡괭이, 낫, 모종삽 하나씩과 호미 두 자락을 자동차에 싣고 구서동으로 향했다.

영순씨의 계원이자 정석이의 초등학교동기생 광호의 엄마인 정계순씨를 만나러 구서시장옆의 유로주차장에 들러 밭의 주인 격인 광호엄마의 이모에게 밭을 물려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셋이 승용차로 산복도로에 올라 롯데캐슬 아파트 뒤 도로에 차를 세우고 밭으로 향했다.
 
큰길가의 거대한 저택 옆을 돌아 골목길이 끝나면 지금까지의 복잡한 도시나 웅장한 아파트와 달리 먼 옛날부터 농사를 짓던 구불구불한 논두렁과 밭두렁 위로 올망졸망한 밭뙈기에 온갖 채소들이 자라는 언덕 뒤로 참나무와 칡넝쿨이 우거진 작은 동산을 지나 다시 조그만 개울을 끼고 양쪽으로 펀펀한 밭들이 펼쳐지고 사이사이 각목과 합판으로 지은 작은 농막과 창고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이 많아 물만골이라고도 하고 따로 숨박골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골짜기는 대부분이 구서동의 토박이 동래정씨의 묘답으로 일대가 개발되어 롯데캐슬아파트가 들어선 후에 복잡한 대도시 한 가운데에서 택지도 산지도 아닌 농지로 무슨 소공원이나 쉼터처럼 남은 공간이었다. 열찬씨가 처형으로 부르기로 한 광호엄마가
 
“우리 영감은 철마농장에 가서 살고 나는 바빠서 통 못 오니까.”
 
멋쩍은 표정으로 풀밭을 뒤져 조그만 양파들을 캐내어 바께스에 담았다. 가꾸지 않아 아기주먹만한 양파를 따로 비닐봉지에 담아
 
“아나. 갖다 먹어보소. 비료를 안 쓰서 보기보다 참 달고 맛이 좋다.”
 
하고는 먼저 내려갔다.
 
“아하, 농사라, 농사!”
 
열찬씨가 삽질을 해보니 생각보다 쉽게 들어갔다. 자세히 보니 모래성분이 많은 찰흙이었다. 색이 검은 것으로 보아 해마다 여름철에 개울물이 넘쳐 낙엽이 썩은 부엽토가 많이 유입되는 모양으로 그렇다면 완전한 1등 상답 모래참흙인 것이었다.
 
“야! 내가 다시 삽을 잡고 농사를 짓는 날이 다 오다니!”
 
겨우 스무 평이나 될까 싶은 땅, 길쭉하면서 한쪽 끝은 널찍하고 반대편은 좁은 고구마 같기도 하고 자루달린 바가지처럼 생긴 땅을 유심히 둘러보다 제법 큰 바위 옆에 두릅나무가 몇 우거진 그늘에 놓인 빨간 고무 통을 열어보며
 
“여기도 삽이랑 호미가 있네. 물 조리게도 있고.”
 
잔뜩 신이 났다. 그 밖에도 가물 때 물을 대는 비닐호스와 모종삽, 엉덩이에 깔고 앉는 목욕탕의자 같은 것도 나오고 두릅나무 밑에는 풀잎이 썩은 거름도 조금 있었다.
 
“무얼 좀 심을까? 이미 봄이 지나서...”
“그거사 언양농업고등학교 농업과 수석졸업생이 알아서 해야지. 뭐 교육감상으로 삽까지 받았다면서.”
“허허, 그래도 무려 40년만이니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다
 
“우선 열무를 한 골 심으면 되겠네. 모처럼 무공해 열무김치도 먹고. 그리고 대파를 심으면 될 것 같고 한 여름이 지나면 김장용 무, 배추와 쪽파를 심고...”
 
하며 골똘히 연구를 하는데
 
“여보, 나는 상추를 심고 싶어. 깨끗한 상추에 삼겹살을 구워서.”
“그래? 그렇지만 상추는 한대성 작물이라 지금 심으면 싹이 안 트지.”
 
하다가
 
“아, 참. 그렇지 모종을 심으면 되겠군. 나중에 종묘상에 가 봅시다.”
 
하고 출입문단속을 하고 내려오는데
 
“여보, 다시 주차장으로 갑시다. 이모한테 같이 짜장면이라도 시켜 먹으며 인사도 하고 또 물통에 농기구를 물려받았으니 단돈 얼마라도 사례를 하고.”
 
영순씨의 말에 두 사람의 호주머니를 털어 10만원이 든 봉투도 만들고 주차장으로 찾아가 좁은 요금소안에 넷이 앉아 구서시장의 밀면을 시켜 먹고 안 받는다는 봉투를 억지로 주며 돌아서다
 
“참, 종묘상은 어데 있는고?”
 
광호엄마 계순이처형한테 물으니
 
“범어사입구 쪽 큰길가에 있어요. 씨앗, 모종, 농기구, 농약 없는 것이 없지요.”
 
하는 소리를 듣고 찾아가다
 
“그렇지! 생각났다. 고구마, 들깨모종을 심으면 되겠네. 정 안 되면 메밀을 대파해도 되고.”
 
열찬씨가 쾌재를 불렀다. 몹시도 가물던 어느 해 늦봄에 기동이 힘든 아버지가 가르쳐준 이야기가 떠오른 것이었다. 그러나 금방 먼지가 펄펄 날리는 덕천고개 옆에 물이 없어 모도 못 심고 발갛게 속살이 타들어가던 오룡골 논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그만 코끝이 찡 헸다.
 
“보소, 당신 와 이라노? 무슨 생각하길래 또 얼라맨시로 눈에 눈초재비를 흘리고 울어쌓노?”
“아, 아무것도 아니야.”
 
 
이튿날 영서를 유치원차에 태워 보내자말자 두 사람은 부지런히 구서동 밭으로 올라가 가장 땅이 좋은 앞 두렁 쪽에 풀을 뽑고 땅을 고른 열찬씨가 상추모종을 들고
 
“당신도 같이 한 번 심어볼래?”
 
돌아보니 모종삽을 들고 다가오는 영순씨는 머리에 수건을 둘러쓴 앞치마차림으로 모종삽을 들고 영판 어린이 집 아이들이 농촌체험으로 감자를 캐러가는 모양으로 다가왔다.
 
“보소. 이기 유치원교사 폼이지 어데 농부의 아낙의 차림샌가? 굿에는 마음이 없고 떡에만 눈이 간다더니 완전히 폼생폼사로구먼.”
“보소! 내 당신이 하도 농사, 농사해서 억지로 따라 나왔지. 시방 내가 커피숍에서 노닥거릴 사모님이지 어데 이 산골짝에서 얼굴 그을리면서 농사지을 군번잉교?”
 
하면서도 싫지 않은지 싱글벙글 웃었다. 상추모와 잎만 전문으로 먹는 들깨모종까지 심고
 
“자 인자 열무 씨나 흩어볼까?”
 
이랑을 지어 골을 판 열찬씨가
 
“기왕이면 당신이 흩어보지.”
 
열무씨를 건네자
 
“보소. 이 반듯한 골에 흩기는 와 흩노? 줄 따라 뿌리지.”
 
영순씨가 의아한 듯 쳐다봤다.
 
“당신 말이 맞네. 그런데 왜 우리가 클 때는 상추씨나 열무씨를 심을 때는 왜 뿌린다 하지 않고 흩는다고 했을까?”
 
하더니 무릎을 탁 치면서
 
“그렇구나! 촌사람들이 평생 농사를 지어도 줄 뿌리기, 조파(條播)나 흩뿌리기 산파(散播), 한 알씩 심는 점파(點播) 따위를 알 수도 없고 그냥 좁은 채전밭들 대충 호미로 뒤지고 이리 저리 씨앗을 흩어 또 호미로 이리 저리 덮어서 흩는다고 했구먼.”
 
혼자 중얼거리는데
 
“야, 위에 밭에 새 농사꾼이 왔는가 베.”
 
얼핏 보기에는 열찬씨 또래인데 몸이 엄청나게 뚱뚱한 여인이 밭둑 밑에서 나타나며
 
“인자사 옳은 농사꾼 만났는가, 벌써 모종 심는 폼이 다르네.”
 
하는 지라
 
“안녕하세요.”
“잘 부탁합니다. 많이 가르쳐주세요.”
 
하고 인사를 하니
 
“우리도 아직 많이 서툰데.”
 
하며 맺힌 데 없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띠더니
 
“인자 이웃인데 우리 농사 맛이나 보소.”
 
하면서 커다란 가지와 오이를 대여섯 개씩 소쿠리에 담아왔다.
 
이튿날은 고구마모종과 대파모종을 싸다 심는데
 
“보소. 신참 아저씨! 그 파는 이파리를 좀 자르고 심지요.”
 
밭둑위로 지나가던 60대중반의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빙긋 웃고 서 있었다. 아직 오전인데도 막걸리 잔이나 마셨는지 얼굴에 술기가 가득했다.
 
“안녕하세요.”
 
영순씨가 마치 유치원생 같은 자세로 재빨리 인사하자
 
“나는 요 위에 농사짓는 이호열이요. 집이는?”
 
열찬씨를 바라보는 지라
 
“연산동 사는 이열찬입니다. 정년퇴직하고 심심해서...”
 
말끝을 흐리는데 영순씨가 눈을 찡긋했다. 정년퇴직운운 쓸데없는 소리를 왜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뭐. 사람 봐서요.”
 
휘청휘청하며 올라가고 또 몇 명의 노인네와 아낙들이 유심히 쳐다보며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지나가기도 했다.
 
대파와 고구마모종을 다 심고 손을 탁탁 터는데
 
“보소. 앞에 밭에 새로 농사지으러 온 사람요!”
 
누가 불러 바라보니 밭둑 위의 작은 농막에서 키가 조그만 노인이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볕이 뜨거운데 여게 그늘에 와서 땀 좀 식히고 가소.”
 
해서 둘이 돌아서 가니
 
]“어서 오소.”
 
하면서 평상 위에 놓인 가방을 열어 야크루트 하나씩을 꺼내주면서
 
“나 박찬동입니다.”
 
손을 내밀어 엉겁결에
 
“예. 저는 연산동 사는 이열찬입니다.”
 
악수를 하니
 
“공직에 오래 계셨다면서?”
“예. 그런데 우째 아시지요?”
“다 아는 수가 있지. 이 좁은 골짝에서 무슨 비밀이 있겠어요?”
 
하는 순간
 
“그럼 혹시 교장선생님?”
 
눈치 빠른 영순씨가 말하자
 
“예, 내가 왕년에 학교에 있었지.”
 
하며 웃었다. 열찬씨도 어딘가 들은 것 같아
 
“잘 부탁합니다. 많이 가르쳐주세요.”
 
하니
 
“같은 공직 출신이나 서로 의지하고 지내면 되지.”
 
여든이 다 되어 보이는 조그만 노인이
 
“인자부터 더우면 바로 여기 와서 쉬세요. 간식 같은 짐도 여기에 두고. 또 여기 도랑물이 차고 시원할 뿐 아니라 금정산 깊은 골에서 흘러내리는 일급수라 가재가 사는 만큼 음용해도 되고 과일이나 채소를 씻어도 되지요.”
 
하며 창고가 딸린 움막아래 한 평이나 됨직한 평상과 마당을 겸한 길을 건너 5각형으로 생긴 한 평 남짓한 웅덩이를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가뭄이 들면 여기 웅덩이에서 호스로 물을 끌어다 주면 되지요.” “예. 알겠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수해복구를 할 때나 한여름에 제초작업을 할 때는 자기 밭둑은 물론 길가나 도랑둑에 공동작업도 할 때가 있습니다.”
“예. 잘 알겠습니다. 아무튼 많이 지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지도는 무슨?”
 
교장선생이 씩 웃는데 주름살이 조글조글한 얼굴과 작은 눈에서 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살만큼 산 사람의 여유와 평온보다는 사람을 구석구석 훑어보며 뭔가 못마땅하거나 심통을 부리려고 빌미를 찾는 듯 어딘가 불편한 얼굴이었다.
 
“보소. 당신 교장선생님 조심하소. 만만한 사람이 아닐 거요.”
 
짐을 챙겨 한참이나 내려오면서 영순씨가 말했다.
 
“뭐로 그래 까탈스럽게 생각하노? 어데 가나 사람 사는 거야 똑 같지.”
“아니요. 아까 파 심는 데 입을 댄 이호열이란 사람도 보통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내가 왜 한창 기분이 업(up)되는 당신에게 초를 치는가 싶겠지만 당신처럼 만나는 사람마다 처음부터 푹 빠져서 끝판에는 판판이 손해를 보고 물러서는 사람이 어딨겠노 말입니다. 제발 그 사람을 완전히 알기 전에는 좋아 죽는다고 엎어지지 말란 말입니다.”
“또 그 소리.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사람들이 내게 다가오는 법이지. 또 초면에 가지와 오이를 주는 밑에 밭 뚱띠아지매를 봐라?”
“맞소.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 틀림없을 거요. 거는 팍 엎어져도 속을 일이 없을 거요.”
 
 
※ 이 대하소설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