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은 가정이 지구적인 삶의 중심임을 깨닫고 생명을 귀하게 생각하며 가족은 물론 이웃과 지역사회 나아가 인류를 사랑함으로써 주어진 삶을 기쁘게 분수에 맞게 살도록 노력한다. 우리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동규 동영 6식구가 서로 이해하고 존경하며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한다.
어려움이나 오해가 있을 때 대화로써 이해하도록 노력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치롭게 여기며 서로 고맙게 생각하면서 산다. 이것이 모든 평화의 근원으로 가장 환경적으로도 바람직한 삶의 원칙이다.
우리는 주어진 인생을 감사히 받아들이며 우리가 스스로 땀 흘려 노력해 돈을 벌고 이를 분수에 맞게 쓴다. 모든 물건이나 생물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고 그 용도에 충실하게 활용한다. 가정에서 먼저 전기 물 가스 기름 등 에너지원은 낭비하지 않으며 가능하면 이를 적게 소비하기 위해 애쓴다. 이를 위해 자동차를 많이 이용하기보다 걷기를 즐기고, 조금 힘들어도 가능하면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도록 노력한다.
가정과 가정을 연결하기 위해 이웃에게도 늘 웃으며 다정하게 다가가며 이웃으로부터 좋은 것이 있으면 배우고 우리가 갖고 있는 좋은 것은 알려주도록 노력한다.
늘 지구의 환경문제를 인식하고, 의식주 생활에서 나의 소비행위가 환경문제와 연결돼 있으며 이 같은 오염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 놀이에 있어서도 낭비적이거나 퇴폐적인 것을 피하고 자연과 친하며 도구를 적게 사용하는 놀이를 혼자보다는 여럿이 함께 하도록 하며, 휴가는 자연친화적인 방식으로 보낸다.
산이 높으면 계곡도 깊다. 편리함은 대가 지불을 요구한다.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환경 살리기는 요원하다. 자발적인 가난, 단순소박함이야말로 지구를 살리고 더불어 사는 가장 지혜로운 선택임을 우리는 믿는다.
1999년 4월 22일 지구의 날을 맞아 김종락 김학금 김해창 김옥이 김동규 김동영’
김해창 교수 가족이 펴낸 『3대가 함께 만든 우리집 환경백서-놀이로 배우는 지구사랑』의 책 표지.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지은 『3대가 함께 만든 우리집 환경백서-놀이로 배우는 지구사랑』에 실린 ‘우리집 환경헌장’이다. 이제 아이들은 건장한 청년이 됐고 우리부부도 어느새 50대 중년이 되었다. 그 사이에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좁은 슬래브 2층집에 3대가 함께 살았던 우리들은 가족회의를 거쳐 환경헌장을 만들고 4월 22일 지구의 날에 뒷동산 공원에 올라 우리가족끼리의 ‘우리집 환경헌장 선포식’을 가졌다. 지금 생각해도 참 귀한 시간이었고 아련한 추억으로 가슴에 다가온다.
‘자발적인 가난, 단순소박함이야말로 지구를 살리고 더불어 사는 가장 지혜로운 선택임을 우리는 믿는다.’ 이 말은 ‘우리집 환경헌장’의 결론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구절의 원전은 E.F.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임을 부인할 수 없다.
당시 고교 윤리 교사로 ‘환경을 생각하는 전국 교사 모임’ 회원이던 아내와 신문사에서 환경전문기자의 길을 걷고 있던 나 자신이 시대적 흐름인 ‘지방의제21’에 맞게 ‘가정의제21’로 밝힌 ‘우리집 환경헌장 전문’이 바로 슈마허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슈마허라고 하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전설의 F1 황제’로 유명한 독일의 카레이서 미하엘 슈마허(Michael Schumacher, 1969생)를 먼저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 A Study of Economics as if People Mattered)』의 저자인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 즉 E.F.슈마허(Schumacher)를 말한다.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1980년대 중반 대학원시절에 책을 접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2011년 이후 대학 교수가 되어서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읽히고 독후감을 발표하게 할 만큼 내가 좋아하는 환경고전이다. 특히 2015년 7월 부산KBS의 고전아카데미 특강에 강사로 참여해 슈마허 이야기를 한 것이 계기가 돼 ‘슈마허 다시 읽기’를 작은 책으로 만들어봤으면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 뒤 다시 원서와 번역서를 번갈아가며 읽는 재미도 느꼈다.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1973년에 출판된 책이지만 지금 봐도 불과 몇 년 전에 나온 책이라고 해도 여겨질 정도로 내용이 시사적이다. 오늘날 강대국, 대기업, 중앙집권주의, 물량주의, 금권만능주의 등 모두 ‘크고 빠른 데 익숙한 우리의 삶’에서 작은 나라, 중소기업, 지방, 단순소박함과 같이 ‘작고 느린 것들의 가치’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가져다준다.이왕 시작하는 김에 슈마허의 생애와 당시 시대적 상황 그리고 슈마허의 사상적 계보는 물론 『당혹한 이들을 위한 안내서(A Guide for the Perplexed)』를 비롯해 슈마허의 다른 저작들을 다시 읽어보고 오늘날 우리 시대와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겠다. 나이 50중반이 되어서야 작은 것이 왜 아름다운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이제 슈마허를 통해 인생 후반 공부를 새롭게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내가 아끼는 우리집 사진이 몇 장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우리집 감나무 사진이다. 봄엔 연초록 감잎이 돋고, 여름에는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가을이 되면 언제가 싶게 누렇게 탐스런 감을 주렁주렁 달고 있고, 겨울엔 잎을 떨군 채 조용히 잠자는 듯한 감나무.도심의 대지 40평짜리 2층 슬래브 주택 1층 마당 한 모퉁이에 서 있는 40년쯤 된 감나무 한 그루. 이 집에 부모님과 아이들 3대 6식구가 20여 년을 함께 살았다. 부동산값으로 치면 25년 전 가격과 별반 차이가 없다. 지금은 그 집을 팔고, 다른 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있지만 그래도 몇 십년간 우리 가족이 참 고맙게 살았고 귀한 추억이 가슴에 남아 있는 집이다.
우리 가족이 거름을 주어 키웠고, 매년 가을이 되면 감이 200~250개 열리는 나무. 감나무 한 그루가 주는 행복이 이렇게 큰 지 예전엔 잘 몰랐다. 처음엔 세를 주고 집을 비우고 나니 바뀐 이웃들이 감나무 잎사귀가 수채를 막는 게 싫다며 나무를 베어 달라고 했다. 어찌 생물을 죽이겠나 싶어 조경기술자에 의뢰에 큰마음 먹고 가지치기도 해보고 쓰레기봉투 값 명목으로 이웃집 아저씨에게 촌지를 건네며 감나무 한 그루를 어렵사리 지키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나는 우리집이 1억 원이라고 치면 이 감나무 한 그루가 5000만 원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김 교수 가족 3대가 20여년을 살았던 부산 남구 대연동의 2층 슬래브 집 마당에 있는 감나무. 매년 200개가 넘는 감이 열린다고 한다.
잠시 추억에 너무 젖어든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우리 사회는 예전에 비해 물량적으로는 엄청나게 성장했으나 예전에 느꼈던 동네, 이웃이 보이지 않는다. 1인당 GDP가 3만 달러 문턱이라고 하는데 우리사회의 양극화는 너무 심각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계층화, 높은 청년실업률, OECD 최저 출산율과 최고의 자살률 등등.
우리사회의 이 같은 분절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과연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 정치인들은 여야 할 것 없이 ‘경제, 경제’하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경제란 무엇인가? 지방과 지역사회는 어떻게 활기를 찾을 수 있을까? 등 살아가면서 부닥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다.
쉽지 않은 길이지만 이 길을 찾는데 슈마허라는 인생지도를 얻게 돼 기쁘다. 40여 년 전에 이미 오늘날 이 시대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또한 생활 속에서 실천한 예언적 지성인 슈마허를 내 삶의 스승이자 친구로 삼고자 한다. 오십 중반에 이제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화두로 잡은 것이다.
나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우리집 가훈같이 ‘더불어 성장하는 기쁜 삶’을 살아갔으면 한다. 그동안 너무나 익숙한 교환가치, 사용가치에서 과감히 벗어나 존재가치 자체에 마음을 더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부족하기 그지없지만 그간 조금 정리한 것을 차 한 잔 내는 마음으로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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