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미국 백악관에 초청돼 지미 카터 대통령과 담소를 나누는 슈마허. 카터 대통령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펼쳐보고 있다. 출처: 『E.F.Schumacher his Life and Thought(슈마허의 생애와 사상)』(1984).
『E. F. Schumacher, his Life and Thought(슈마허의 생애와 사상)』(1984)을 쓴 장녀 바버라 우드는 아버지 슈마허의 삶을 잘 정리해 놓았는데 당시 슈마허의 머릿속에는 나치독일의 ‘적폐청산’과 재교육을 통한 독일 재건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슈마허는 종전 직후 J. K. 갈브레이드 인솔 하에 한 때 미 육군 군복에 대령 계급장을 달고 독일에 파견돼 폭격피해 조사를 하고 이를 통해 독일의 전시, 전후의 경제상황을 파악하는 일을 했다. 베를린에 파견된 슈마허는 대령 계급장이 부담이 됐고 나치 치하에서 독일 국민과 자신의 가족 친지가 겪은 고난을 생각하면 자신의 안일만을 생각할 수 없다고 해 일부러 작은 방으로 옮겨 살았다고 한다. 일주일에 한번 온수가 나오는 것을 사치로 생각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 뒤 1946년 슈마허는 영국 점령지역 관리위원회의 경제고문을 맡았다. 1949년 11월 슈마허는 3가지 제안을 거의 동시에 받게 된다. 첫 번째는 제네바에 있는 유엔에서 근무하는 것이었으나 슈마허는 그럴 생각이 없어 거절했다. 두 번째는 당시 버마(현 미안마) 대통령이 경제고문역을 제안했는데 그것은 가족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세 번째가 영국 정부 최고위층으로부터 영국 석탄공사의 경제고문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슈마허는 영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차에 1946년 국유화된 석탄공사의 실험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슈마허는 석탄공사에서 일하게 된 지 일주일 뒤 아내에게 쓴 편지엔 “최근 일주일이 지난 7년보다 더 기쁘다”고 만족을 나타냈다고 한다. 물론 아내는 고향인 독일 라인벡에 대한 향수가 컸다고 딸 바버라 우드는 적고 있다. 슈마허는 아버지 슈마허 교수와는 물론, 어머니 그리고 아내와도 많은 편지를 교환하며 자신의 생각을 나눴다.
슈마허와 베르니 로젠베르거 슬하의 2남2녀 자녀들. 왼쪽부터 로버트, 니콜라, 카렌, 제임스. 출처: 『E.F.Schumacher his Life and Thought(슈마허의 생애와 사상)』(1984).
1950년 슈마허는 영국 석탄공사에서 일하면서 케이터햄에 집을 사서 죽을 때까지 그곳에 살았다. 이때부터 슈마허가 정원 가꾸기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영국토양협회에도 가입해 활동을 시작했다. 토양협회에서 레이첼 카슨과 같은 생태주의자들과 교류한다. 그의 하루는 출퇴근 전후에 정원이나 텃밭일을 즐겼고, 빵을 굽는 등 집안일에 예전에 비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1952년 부친이 사망했다. 그 뒤 콘체라는 불교 선지식을 만나 불교나 동양사상에도 관심을 갖게 되는데 1955년 당시 버마 정부의 초청으로 경제고문으로 현지를 3개월간 둘러볼 기회가 있었고, 거기서 슈마허는 ‘불교경제학’을 정리하는 계기를 얻게 된다. 그러나 1960년 평소 건강했던 아내 안나 마리아 피터젠이 암이 걸렸다. 대장암 말기였다. 슈마허는 아내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간병을 했으나 결국 그해 숨졌다. 슈마허는 다음해 아내 피터젠을 헌신적으로 간병했던 베레니 로젠베르거와 재혼해 슬하에 2남2녀를 더 두게 된다. 슈마허는 1963년에 영국 석탄공사의 통계국장이 됐으며 그해 독일 크라우스타르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이 시기 그는 석탄산업의 사양화와 값싼 중동석유의 영국 대량 유입에 대한 우려와 경고를 나타내고,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에 미래를 맡겨선 안 된다며 특히 재생가능에너지를 포함한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 개발을 중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1965년『옵서버』지가 처음으로 슈마허의 ‘중간기술’ 구상에 찬사를 보냈고, 이에 힘입어 다음해 슈마허는 직접 ‘중간기술개발그룹(ITDG, 현 Practical Action)’을 설립했다. 슈마허는 이때 불교경제학에 대한 글을 발표한다.
1967년 슈마허는 스코트바더사의 신탁재산관리인을 거쳐 고문으로 일하게 된다. 스코트바더사에서 그는 종업원지주제나 임금격차 해소 및 지역사회공헌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1970년에는 영국 토양협회 회장에 취임해 사회활동의 영역을 넓혔다. 60세 때인 1971년 슈마허는 석탄공사 기획국장직에서 퇴직한 뒤 저술 강연활동에 전념했다. 저술 강연에 전념하기 위해 석탄공사를 퇴직했다는 것이 더 맞은 말일 것이다. 그 뒤 각국 정부의 초청으로 페루 탄자니아 잠비아 남아프리카 등 제3세계를 많이 둘러보게 된다.슈마허는 그해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는다. 1973년 드디어『작은 것이 아름답다』가 나왔다. 이 책에 힘입어 슈마허는 1974년에 대영제국훈장(CBE)을, 76년에는 카보랜덤상을 수상한다. 1977년에는『당황하는 이들을 위한 안내서』를 출판했다. 경제학자 슈마허가 인문학자, 작가로서 ‘시대의 희망’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출간, 오일쇼크 예언 ... 시대의 희망으로 부상『작은 것이 아름답다』가 나온 지 불과 두 달 뒤인 1973년 10월 전 세계에 처음으로 오일쇼크가 발생해 충격을 주었다. 오일쇼크는 크게 73년의 1차 파동, 79년의 2차 파동이 대표적인데 1차 파동은 제4차 중동전쟁 발발 이후 페르시아 만의 6개 산유국들이 가격인상과 감산에 돌입, 배럴당 2.9달러였던 원유(두바이유) 고시가격이 4달러를 돌파했다. 1974년 1월엔 11.6달러까지 치솟았다. 이 파동으로 1974년 주요 선진국들은 두 자릿수 물가상승과 마이너스 성장이 겹치는 전형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어야 했다.
당시 우리나라도 1차 오일쇼크로 1973년 3.5%였던 물가상승률이 1974년 24.8%로 수직상승했고, 성장률은 12.3%에서 7.4%로 떨어졌으며, 무역수지 적자폭도 10억 달러에서 24억 달러로 크게 확대됐다. 당시 한 달 만에 국제유가가 약 3.9배로 올랐고 환율도 21.9% 올랐다. 당시 서울의 자가용 승용차가 5만4331대였으나 1차 오일쇼크로 인해 다음해엔 9518대나 줄었다고 한다.2차 오일쇼크는 1978년 12월 호메이니 주도로 이슬람혁명을 일으킨 이란이 전면적인 석유수출 중단에 나서자 배럴당 13달러대였던 유가가 20달러를 돌파했다. 19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30달러 벽이 깨졌고,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무기화를 천명한 1981년 1월 두바이유는 39달러의 정점에 도달했다. 2차 오일쇼크로 6개월 만에 국제유가가 2.3배가 올랐고, 한국 환율이 36.5% 상승하고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슈마허는 이러한 오일쇼크의 발생 구조를 미리 간파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전략을 수립할 것을 줄곧 촉구했다. 미래는 단순한 경제가 아니라 ‘에너지경제’가 좌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원생활하는 슈마허가 수레에 땔감을 운반하고 있다. 1978년 캐나다에서 제작된 30분짜리 슈마허 다큐멘터리에 담겼다. 출처: https://www.onf.ca/film/small_is_beautiful/
『작은 것이 아름답다』출간 이후 슈마허가 살던 집엔 당시 멕시코 대통령 일행이 직접 방문해 중간기술에 대해 그의 의견을 듣기도 했고, 1977년 4월에는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의 초청으로 슈마허가 백악관에서 자신의 경제학을 이야기할 기회도 가졌다.
슈마허는 유럽 각 도시를 돌며 수많은 강연 일정을 소화했는데 1977년 9월 4일 강연 차 스위스를 기차로 이동 중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슈마허는 강연을 갈 때 아내 베레니나 딸 바버라 우드를 동행한 경우도 있었는데 이 때는 혼자였다.
인터넷에서 들어가면 슈마허의 생전 동영상을 볼 수 있다. 멋진 노신사 슈마허의 행복한 전원생활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슈마허 사후 1년 뒤인 1978년 캐나다에서 만들어진 약 30분짜리 다큐멘터리 영상물 ‘작은 것이 아름답다: 프리츠 슈마허의 인상(Small Is Beautiful: Impressions of Fritz Schumacher, Donald Brittain, Barrie Howells & Douglas Kiefer)이 그것이다. 이 필름은 슈마허의 웨스트민스터성당의 영결미사 장면을 배경으로 경제학자이자 과학기술자, 강연자로서의 슈마허의 삶을 담은 짧은 다큐멘터리이다.<yb52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