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창 교수의 슈마허 톺아보기 <7>슈마허 삶의 전환점들
김해창 교수의 슈마허 톺아보기 <7>슈마허 삶의 전환점들
  • 김 해창 김 해창
  • 승인 2017.12.12 12:06
  • 업데이트 2017.1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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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창 교수의 슈마허 톺아보기 <7>슈마허 삶의 전환점들

1976년 부인 베르니와 함께 성당에 간 슈마허가 막내 아들 제임스를 안고 미카엘 보웬 주교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출처: 바버라 우드, E.F.Schumacher-His Life and Thought(1984).

슈마허는 독일인으로 태어났지만 영국에 이주해 살면서 한 때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기도 했다. 그러한 삶의 여정에 슈마허가 주류경제학에서 벗어나 대안경제학에 눈을 뜨게 된 계기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영국 농장에 수용돼 농장원으로 일하면서 얻게 된 ‘숫자’ 교훈을 들 수 있다. 슈마허는 서른 살 때인 1940년 영국에서 ‘적국인’으로 몰려 직장에서 쫓겨난 뒤 노스햄프턴셔의 농장에 수용돼 3개월간 노동을 한 적이 있다. 거기서 슈마허는 나치당원은 물론, 러시아공산당원 출신자까지 경험을 했고, 농업, 특히 유기농의 중요성에 대해 몸소 알게 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농장에서 소를 관리할 때 얻은 교훈으로 나중에 경제학을 할 때 단순한 GDP 숫자가 아닌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눈에 들어오도록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내용이 슈마허의 유작 『내가 믿는 세상』과 『굿 워크』에 나온다.

통계학자인 슈마허가 농장 인부로서 맡은 임무 중 하나가 아침식사 전에 언덕에 올라가 들판에 소가 몇 마리인지 세어보고 이를 관리인에게 보고하는 일이었다. 소는 항상 32마리였는데 어느 날 아침 세어보니 31마리밖에 없었다. 슈마허는 관리인에게 달려가 그냥 31마리라고 보고했다. 그런데 식사를 하고 나서 관리인과 함께 들판을 뒤져보니 덤불 밑에 소 한 마리가 죽어 있었던 것이다.

슈마허는 관리인에게 혼이 났다. 관리인이 자신에게 매일 소의 숫자를 세게 한 것은 그냥 통계가 아니라 소 한 마리 한 마리를 잘 살펴보고 건강상태가 어떠한 지를 보고해야 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이런 경험이 나중에 슈마허의 경제학이 추상적인 통계가 아닌 개개인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에 큰 도움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슈마허가 인생 교훈을 얻게 된 것은 버마(지금의 미얀마)에서의 경험이다. 자신이 경제개발계획을 자문하러간 버마에서 ‘새로운 경제학’을 발견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슈마허의 ‘불교경제학’으로 발전된다. 슈마허는 1955년 1월 버마정부의 초청으로 유엔의 지원을 받아 경제고문이 돼 현지를 3개월 정도 시찰하게 됐다. 슈마허는 『당황한 이들을 위한 안내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경제학자로서 당시 버마의 경제부흥을 조언하러 버마에 갔는데 어려운 경제상황 하에서도 버마인들은 진정 행복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슈마허는 지금까지의 물량중심의, 공급중심의 경제가 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꼈고, 불교라는 가치지향의 경제학, 즉 ‘메타경제학’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는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소용이 있고 아름답다’면서 경제학에 지혜와 종교적 가치의 중요성을 넣었다. 슈마허의 딸 바버라 우드는『슈마허의 생애와 사상』(1984)에서 당시 미얀마 체재 기간 중 슈마허의 인식의 흐름을 잘 소개하고 있다. 슈마허는 그 때 뉴욕을 떠나 처음으로 ‘동양’을 접하게 된다. 그는 당시 우 누 버마 수상이 직접 영국 정계 거물에게 부탁해 슈마허를 경제 고문으로 추천했고, 슈마허가 해야 할 일은 최고 경제학자로 미얀마의 경제개발계획과 재무이론 및 실제의 전문지식을 전수하는데 있었다.

그런데 버마에 도착한 뒤 현지 경험을 한 슈마허가 그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곳 버마는 뉴욕과는 다른 순진무구함이 있어요. 오히려 내가 정말 이들을 해치지 않고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하고 걱정했다. 그는 단순한 1인당 GDP 통계로 이들을 가난하다고 볼 수가 없다고 했다. 미얀마는 독일과 같은 방식으로 개발할 수가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되며, 재생가능에너지를 바탕으로 한 임업과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지속가능한 경제야말로 불교국가에 맞는 경제학이라고 강조했다.

슈마허는 당시 버마 정부에 서구의 경제고문들에 너무 의존하지 말고, 전통 버마식의 자급자족 경제방식으로 경제개발을 할 것을 진지하게 제안했으나 버마 정부가 미국 경제고문말만 듣고 자신의 조언을 듣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당시 슈마허를 초청한 버마의 초대 수상은 버마의 독립영웅인 아웅산 장군과 더불어 민족주의자로 자본주의를 제국주의와 동일시하며 식민잔재 철폐와 평등사회 구축을 위해서 사회주의 건설에 뜻을 같이 했다. 그러나 아웅산이 종교를 배제한 반면 우 누 수상은 ‘불교교리’를 사회주의 이론의 핵심으로 삼았다고 한다. 1954년 우 누 수상은 복지국가론을 주창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산업 국유화의 전단계로 농지 국유화 등 정책을 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슈마허는 버마에서 ‘불교경제학’이라는 ‘생명수’를 발견했다고 하겠다. 셋째로 젊은 시절 무신론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에 가까웠던 슈마허가 불교를 거쳐 노년에는 가톨릭에 귀의했다. 그가 가톨릭신자로 영세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환경평론가인 다이애나 슈마허는 슈마허의 종교적 편력을 『내가 믿는 세상』 서문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슈마허는 1955년 국립석탄국 재직 당시 버마 정부의 경제고문으로 3개월 동안 일하기로 하고, 버마로 건너간 뒤 곧 절에 나가기 시작했다. 버마에서의 생활은 그 뒤 슈마허에게 서양종교에 대한 연구, 그리고 궁극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와 초기 교부들을 거쳐 기독교에 이르는 문을 열어주었다.

1950년대 중반 슈마허가 방문했던 미얀마(옛 버마) 수도 양곤의 오늘날 모습. 출처: 위키피디아

슈마허의 마르크스주의자 동료들과 불교도 동료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으나 그는 죽기 6년 전인 1971년에 가톨릭신자가 되었다. 그것은 동정, 용서, 무조건적 사랑, 창조주 존재와 모든 피조물 세계의 통일성 인정 같은 기독교적인 덕성보다 지성과 이성이 우월하다는 종래의 자신의 사상을 공식적으로 포기하는 것이었다. 이는 결국 삶에 대한 초월적인, 수직적 관점으로 귀결된 것이다.

슈마허는 수년에 걸친 내적 투쟁과 모색 후에 그는 한평생에 걸친 연구 노선과 사회적 관심을 한 점에 모을 방도를 깨달았고 자신의 영적인 귀향에 도달했다고 술회했다. 청년기에 열렬한 무신론자였던 슈마허는 미얀마에서 불교를 체험하고 노년에 그리스도교를 다시 보게 된다. 그가 가톨릭 세례를 받게 된 데는 1960년 첫 부인과의 사별과 이후 가톨릭신자가 된 둘째 부인과 딸들의 조언에 힘입은 바가 큰 것 같다. 슈마허의 둘째 부인 베레니는 첫 부인 피터젠이 암으로 숨지기 전에 집안일을 도와주던 스위스 출신 가정부였다.

장녀 바버라 우드와는 나이 차이가 거의 없어 친구같이 지냈는데 슈마허가 베레니와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하자 바바라 우드는 처음엔 충격을 받았으나 어머니가 숨지기 전에 베레니에게 슈마허를 평생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슈마허가 집안일에 안심하고 바깥일에 매진할 수 있도록 배려한 전 부인의 유언이기도 했던 것이다.

베레니는 집안일에 충실했고, 나중에 성당에 열심히 다니게 됐는데 말년에 슈마허도 자연스럽게 부인을 따라 성당에 나갔고, 스스로 세례를 받고 싶다고 해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했다고 한다. 세례를 받을 때 부인과 딸 바버라 우드 내외가 함께 했다. 슈마허 믿음에는 지성과 이성을 넘어선 여성의 힘 또한 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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