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 칼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조송원 기자 승인 2023.12.21 10:46 | 최종 수정 2023.12.25 11:34 의견 0
A cartoon of a journalist making fun of the president's English
대통령의 영어를 풍자하는 언론 만평 [이 칼럼 내용을 기반으로 생성형 인공지능 GPT4가 그린 그림]

태兌는 서당이고 또 기쁜 괘卦이니, 옛날 서당에서 웃고 기뻐하던 이야기 한마디 할까요? 사실 옛날 한문공부만 하던 서당에서는 문자文字를 잘 써야 유식하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문자를 즐겨 쓰는데, 하루는 호랑이가 자기 장인을 물고 가는 것을 보고, 황급한 나머지 문자로 “遠山大虎원산대호가 近山來근산래하야 吾之丈人오지장인을 捉去착거하니, 有銃者유총자는 執銃來집총래하고 有棒者유봉자는 執棒來집봉래하라”(먼 산 큰 호랑이가 옆 산에 와서 내 장인을 물고 가니, 총 있는 사람은 총을 가지고 나오고, 몽둥이가 있는 사람은 몽둥이를 가지고 나오라) 하며 소리쳤습니다.

동네 사람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고, 장인은 호랑이에게 물려가 버렸습니다. 문자 쓰다 장인을 죽게 했다고 관가에 고발을 당했지요. 관가에 붙들려가 볼기를 맞는데도, “我也臀也아야둔야 我也臀也아야둔야”(아이고 내 볼기야 아이고 내 볼기야) 하고 문자를 썼습니다.

옥관이 “너 이놈 다시 또 문자를 쓸 터이냐?” 하니, “此後차후론 更不用文字갱불용문자올시다”라고 하면서 문자를 쓰지 않겠다는 말도 또 문자로 하네요. 관에서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면회를 와서 철장 사이로 손 좀 잡아보려고 하자 잡히지 않으니까,

“汝手여수가 短단커든 我手아수가 長장커나, 我手아수가 短단커든 汝手여수가 長장커나”(네 손이 짧거든 내 손이 길거나, 내 손이 짧거든 네 손이 길거나) 하며 그 마당에서도 또 문자를 쓰는 것을 보고, 관가에서 “이놈은 이미 문자광文字狂이 되어 어쩔 도리가 없구나!” 하고 내놓았답니다. -대산 주역강의/중택태(重澤兌·䷹)-

요즘은 문자 자리에 한문 대신 영어가 들어앉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제1차 국민경제자문회의(2022.12.21.)에서, “수출드라이브와 스타트업코리아라는 2개 축으로”, “거번먼트 인게이지먼트가 바로 레귤레이션이다”, “더 아주 어그레시브하게 뛰자” 등등 문장의 핵심 내용은 영어단어로 표현했다.

이에 대해 김어준은 <뉴스공장>에서, “내용이 없으면 이렇게 허세”, “프레지던트의 판타스틱한 잉글리시”라고 논평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정곡을 찌른 기발한 풍자(諷刺)다. (drive, start-up, government, engagement, regulation, aggressive. president, fantastic)

선언적 지식(declarative knowledge)은 ‘어떤 것을 아는 것’이다.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우리나라의 3대첩은 귀주대첩, 살수대첩, 한산도대첩이다’ 등과 같이 이해와 암기를 통해 단시간에 축적할 수 있다. 이를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다. 이 지식도 중요하다. 다만, 외쪽 지식이란 자각이 필요하다.

반면, 절차적 지식(procedural knowledge)은 ‘방법을 아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는 방법’처럼 반복과 시행착오를 통해 장기간에 걸쳐야 습득할 수 있다. 자전거 타는 방법을 아무리 정확하게 설명해도, 직접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아보지 않으면 필요한 기술을 개발할 수 없다. 이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 훈련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피드백(feedback. 상대방에게 그의 행동 결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성직자들(목사나 신부, 승려)은 ‘하나님의 가르침이 어떻고, 부처의 가르침이 저떻고…….’ 등등 ‘좋은 말’을 무지하게 많이 한다. 그러나 실제 존경할 만한 모범적인 삶을 사는 성직자들은 많지 않다. ‘선언적 지식’만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다’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마는, 실제 성공에 이르도록 노력하는 사람은 드물다.

중요한 사실은, 도덕성이 선언적 지식이 아니라 절차적 지식에 속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일상생활에서나 업무에서 완벽히 도덕성을 구현하기는 어렵다. 맑은 거울(타고난 도덕성)은 ‘이익’이라는 티끌 먼지가 덕지덕지 끼게 되기 때문이다. 이 티끌 먼지를 털고 닦아내기 위해선, 선언적 지식이 아니라 절차적 지식이 필요하다.

사회적 압력(법적 제재)이든 개인의 양심에 의해서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성찰을 통해 깨끗한 도덕적 심성을 지키려는 연습 혹은 훈련을 해야 한다. 곧, 도덕성은 훈련과 성찰, 그리고 시행착오와 실천을 통해 지키거나, 기를 수 있다.

문제는 일부 ‘머리 좋은’ 사람들이 선언적 지식을 많이 암기했다고 해서 절차적 지식도 갖췄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법시험, 행정고시 등 각종 시험은 선언적 지식만을 측정하기 때문이다.

“검사가 수사권 갖고 보복하면 그게 깡패이지 검사입니까?”, ‘살권수’(살아있는 권력 수사), 그리고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다 같은 맥락이다. 머리로는 ‘안다’, 그러나 손발로 하는 ‘실천’이 없다는 것이다.

절차적 지식에는 젬병이어서, 선언적 지식만이 지식의 전부라고 믿는 반거들충이 지식인들이 흔히 저지르는 비행(非行)이 ‘선택적 정의’이다. 현 정권에서 세칭 ‘잘 나간다’고 하는 몇몇 사람들을 통해 그 전형을 살펴보자.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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