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38)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5장 폭발직전 버든마을(4)

이득수 승인 2024.04.30 08:00 의견 0

“그러고 보니 며칠 전 다리 밑에서 유심히 날 쳐다보던 사람이 순영씨였어요?”

“예. 열찬씨는 내가 얼굴 타지 말라고 뭘 덮어쓴 바람에 미처 못 알아봤을 거예요.”

“미안해요. 첫사랑이니 뭐니 평생을 따라다니면서 정작 얼굴도 못 알아 봤으니.”

“뭐. 괜찮아요. 열찬씨만 별일 없으면.”

“그래요. 나중에 성수자시인이랑 연락해서 얼굴이나 한 번 봅시다.”

“예. 그런데 정말 아무 일 없지요?”

“예.”

15. 폭발직전 버든마을(4)

전화를 끊고 한참이나 소파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은 열찬씨가 마침내 옥자씨에게 전화를 거니 띠띠띠띠 신호음이 여러 번 울려도 한참이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많이도 놀라고 또 망설이는가 싶어 한참 뜸을 들여 다시 전화를 거니 마침내

“여보세요?”

많이 울었는지 목소리가 푹 퍼져있었다.

“미안해. 많이 놀랬지?”

“...”

“다 내 잘못이야. 잠은 좀 잤나?”

“...”

“미안해.”

“...”

전화기에서 가쁜 숨소리만 들리고 한참동안 말이 없더니

“그래. 열찬씨 당신은 괜찮소?”

“괜찮지 뭐?”

“얼굴은 성하고.”

“응 아무렇지도 않아.”

“홍 여사가 착한 분이네. 연속극 같은 데선 얼굴도 핥기고 찬물도 뒤집어씌우고 난리던데. 그래 어디까지 들었답니까?”

역시 여자라 남자보다 차분하고 사무적이라 느끼며

“다 들은 것 같아. 아이 지운 것까지.”

“그래서 그렇게 크게 고함소리가 나고 전화가 끊어진 건가?”

“휴대폰을 방바닥에 던져서 박살이 났지.”

“그래서 전화를 못 했구나. 나는 궁금하기도 하고 당신이 야속하고 내 자신이 불쌍하기도 하고 홍여사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미안해. 휴대폰을 고치자말자 전화하는 거야.”

“그래요? 홍 여사 화는 좀 풀리고?”

“아니. 바로 진주로 당신한테 가래.”

“뭐, 나한테 보낸다고?”

“...”

“물론 화가 나서 하는 말이겠지만 그건 아니지.”

“...”

“어떻게 보면 나로서는 손해가 없지. 늦었지만 당신하고 살아도 보고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홍여사가 뭐가 되나? 당신 같은 소심하고 무책임한 사람 때문에 나하나 불행하면 되지 죄 없는 홍여사까지.”

“...”

“휴대폰 고쳤으면 바로 집으로 가서 내가 집 놔두고 가기는 어데로 가느냐며 버티세요.”

“미안해.”

“미안하긴 옛날에 미안한 거고 지금은 당신 살 길을 찾아야지. 내가 밤새 곰곰 생각해보니 그간 당신한테 전화를 하고 원망도 하고 한탄도 한 것이 내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었지 굳이 당신하고 다시 만나 살려는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단지 지나간 내 인생이 너무나 허무하고 속절없을 뿐이지.”

“미안해.”

“아무 말 하지 말고 내말만 들으세요. 나도 이제부터 전화를 않을 테니까 당신도 전화를 걸지 말고.”

“...”

“참 휴대폰에서 내 전화번호 지우세요. 나도 지울 게요. 아무튼 홍여사랑 가족들이랑 노년을 편안하게 잘 보내세요.”

“미, 미안해.”

“...”

딸깍. 전화가 끊어진 후로 다신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쩌면 전화번호를 바꿀지도 몰랐다. 내가 왜 이럴까? 사위를 보고 손녀를 보고 며느리까지 다 본 나이에 이 무슨 황당하고도 창피한 꼴인가? 착하고 어진 조강지처 영순씨, 아무 부족함도 없이 늘 남편과 자녀, 가정을 챙기고 집안이나 이웃, 어느 누구에게도 손가락질 받을 일 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 같은 아내라는 영순씨를 두고 철없던 시절의 불장난 같은 풋사랑, 그 순진한 희생자가 된 불행한 한 여인을 생각하기에만 숨이 찬데 아무 것도 모르는 첫사랑 순영씨는 왜 등장한 걸까?

그 깔끔한 성격에 평생을 잊지 못한다고 따라다니는 사내 자신이 그렇게 어두운 과거가 있다면 얼마나 놀라고 어이없을까? 불과 하루사이에 일어난 마치 막장드라마 같은 순간들을 떠올리며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타자 갑자기 영순씨의 화난 얼굴이 커다랗게 클로즈업되면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띵똥.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어 삑삑삑삑 번호키를 누르자 문이 열렸다. 다행히 걸쇠는 걸지 않은 모양이었다. 조심스레 마루로 올라가며

“여보, 내 왔다!”

소리쳐도 대답은 없는데 화를 참느라 후우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리더니 열찬씨가 옷을 벗고 세면장에 들어갈 때쯤

“한번 나갔으면 진주에 가지 집에는 말라꼬 또 들어 오노?”

비로소 한마디 하기가 무섭게

“봐라. 내가 내 집 놔두고 어데 간단 말이고?”

딱 옥자씨가 시킨 데로 말하니
“얼씨구! 지가 뭐 잘한 거나 있는 것처럼 말하네. 넉살도 좋제?”

하는 것이 많이 풀린 것 같았다. 비로소 한숨을 돌리며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는데

“아이구, 이 골치 아픈 인간아, 그래 밥은 묵고 돌아 댕기나?”

방에서 나온 영순씨가 냉장고문을 열고 반찬을 꺼내기 시작했다. 흘낏 쳐다보니 혼자 많이 울고 고민을 했는지 눈동자가 빨갛고 얼굴전체가 푸석푸석해 보였다.

머리 한 구석에 진주남강과 공원길을 서성일 한 쓸쓸한 여인이 여전히 자리 잡긴 했지만 짐짓 잊은 척하면서 영순씨의 눈치를 힐끗힐끗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영순씨는 그날이후로 일체 내색이 없었고 한 일주일이 지난 하루는

“내게 당신 말고 누가 또 있나? 미우나 고우나 당신을 더 알뜰히 챙기기로 했어요.”

“...”

“하긴 당신도 나랑 여태껏 산다고 고생은 했지. 밤톨 같이 또록또록 착하고 이쁜 아들딸도 낳아주고.”

“...”

“첫사랑이든 풋사랑이든 다 나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고.”

“...”

“순영씨는 부잣집마님이 되었다니까 문제가 아닌데 진주에 그 사람은 얼마나 외롭고 힘이 들까? 자식도 하나 없이.”

“...”

“당신 그 많은 죄를 우째 다 씻으려나? 차라리 나하고 성당에나 가든지.”

“...”

그리고는 끝이었다. 소심한 열찬씨가 너무 의기소침할까봐 배려하는 것이자 영양가 없는 냉전을 끝내자는 말이기도 했다.

“고마워. 내 밥 한 끼 사지.”

하자 영순씨가 신평 사돈댁에 전화를 걸어 급한 일이 생겼으니 오후 1시가 되기 전에 토현초등학교입구에서 영서를 기다려서 한나절을 보아달라고 부탁을 하더니 사촌처형 미혜씨까지 불렀다. 기장의 칠암이란 횟집 촌으로 가서 <꺼먹동네>라는 붕장어 전문횟집에서

“여기, 아나고 한 관에 잡어 한 사라.”

보통 세 사람이면 아나고 1관이면 넉넉하련만 세상에서 제일 두렵고 싫은 것이 음식 적게 시켜 눈치 보며 먹는 것이라는 동갑내기 처형의 기분을 모처럼 맞춰주니

“우리 이쁜 제부가 오늘은 더 이쁘네.”

하며 신이 나는데

“이 남자가 이쁘다고? 언니 니가 함 살아볼래?”

영순씨의 표정이 심상찮아 다시 열찬씨가 바짝 긴장하는데

“세상에 별 남자가 있나? 우리 가서방 정도면 중간은 넘는다.”

“하긴.”

겨우 봉합이 되는 모양이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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