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 칼럼】‘쓰레기통에서 핀 장미꽃’, 시들려 한다

조송원 승인 2024.08.17 11:31 의견 0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대화형 인공지능 Copilot 그림

“폐허의 한국에서 건강한 민주주의가 생겨나길 기대하는 것보다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가 자라기를 기대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It would be more reasonable to expect to find roses growing on a garbage heap than a healthy democracy rising out of the ruins of Korea.)

1951년 10월 1일자 영국 <더 타임스>(보수 우파 신문)의 기사, ‘한국의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 in Korea)의 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1950년대부터 전두환 군사독재 시대까지 한국 민주주의의 참담한 현황을 표현할 때 어김없이 이 구절을 소환했다.

다만 원문은 대단히 복잡하다. 그 뜻을 파악하는 데 두뇌 에너지가 좀 든다. 그러니 우리말로 옮기는 데는 에너지가 더 든다. 더구나 매끄럽게 옮기기는 난망하다. 원문에 충실하면 매끄럽지 않고, 매끄러우면 충실하지 못하다. 아마 영어 원어민(native speaker)에게도 쉬운 문장은 아니었는가 보다. 그래서 ‘노력 경제의 원칙’에 따라 그 문장을 이렇게 변주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꽃피기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Expecting democracy to bloom in Korea is like expecting a rose to bloon in a trash can.)

1960년 4·19 혁명,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을 때, 외신은 한국 소식을 ‘쓰레기통 속의 장미꽃’에 빗대어 전했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 시기에 영국 <파아낸셜 타임스>는 6·29 선언을 보도하며, “한국의 민주주의는 위기 속에서 빛난다.”(South Korea's democracy shines through in a crisis.) ‘쓰레기통’에서 민주주의를 향해 끊임없이 용솟음치는 국민의 열정이 마침내 민주주의라는 ‘장미꽃’을 피워낸 기적에 대한 찬사인 셈이다.

노태우 정부를 거쳐 문민정부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더욱 튼튼하게 그 뿌리를 내려왔다. <더 타임스>는 현재, 민주화 이후 한국이 정치적·경제적 발전으로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K-문화가 세계적으로 호평 받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따라서 ‘쓰레기통 속의 장미꽃’이 이제는 한국 정치상황을 비하하는 비유가 아니라, 엄혹한 민주주의 동토에서 불굴의 의지로 민주주의 성취해낸 한국을 상찬하는 비유로 쓰이게 된 것이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167개국의 민주주의 상태(시민의 권리, 정치 참여 등 5가지 범주)를 조사하여 민주주의 지수를 산출한다. 이 민주주의 지수(0~10)에 따라 ‘완전한 민주주의’-‘결함 있는 민주주의’-‘혼합된 체제’-‘권위주의 체제’-‘공포 정치’로 구분한다.

2022년 167개국 중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는 23개국이다. 한국은 22위로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에 속한다. 반면 미국, 이탈리아, 포르투갈, 벨기에는 결함 있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우는 데 반세기도 넘어 70여 년이 걸렸다. 그 세월 동안 일반 시민이 흘린 땀과 눈물이 얼마이며, ‘앞선 자’는 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

한데 ‘역사에 대한 역사적인 패륜아’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서는 여러 국제연구기관과 외신이 ‘대한민국의 독재화’를 우려하고 있다. 한국의 ‘완전한 민주주의’라는 장미꽃이 시들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에는 어떤 역사적 맥락이 있는 것일까? 정말 윤석열 정부는 ‘갑툭튀’에 불과한 것일까?

물리법칙에, 역사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우연’으로 보이는 것은 당시에 그 원인을 꿰뚫어 볼 혜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후(事後)에는 누구나 그 원인을 명백히 알게 된다. 그러나 버스 지나가고 난 다음의 알아챔, 때늦은 깨달음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류 역사에서 우연한 사건으로 역사의 물줄기가 뒤틀려,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버린 경우가 하 많던가!

‘아래의 다수’가 ‘위의 소수’를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갖는 게 민주주의이다. 위의 소수가 아래의 다수를 강제로 찍어누를 수 있는 권력을 갖는 게 권위주의요 독재이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경제적 자원, 사회적 지위재 그리고 그 자원과 지위재의 획득과 접근통로 등을 분배하는 힘을 말한다.

결국 권력이라는 것은 이익(경제적 자원)과 가치(사회적 지위재)를 서로 차지하려는 갈등상황에서, 누가 누구에게 이익과 가치를 강제적으로 분배하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관계적인 개념이다. 쉽게 말해 돈과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힘이다.

국민 대다수에게 돈과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공정하게 열려 있으면 민주적 사회이다. 반면에 그 기회를 소수가 독점 혹은 과점하면 권위적·독재적 사회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와 권력이란 실생활과 관련이 희박한 추상적인 관념으로 치부해 버릴 일이 아니다. 개인 실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독재’란 말은 국민 대다수에게 아주 무서운 말이다. 단순히 정치적인 단어가 아니다. ‘기회의 문’이 닫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잘난 딸·아들도 출세할 수가 없다. 출세하려면 권력을 독점한 소수에게 굴종해야 한다. 이 얼마나 비참한 상황인가!

돈과 자리를 꿰찬 소수가 스스로 자기 이익을 포기한 적이 역사상 한 번도 없다. 하여 기회의 문이 열려있는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앞선 자’들이 무수히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쳤다. 그 피와 목숨의 대가로 21세기 대한민국은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했다.

한데 느닷없이, 아니 강고한 뿌리를 내리고 암약하던 친독재 무리들이 현실 전면에 부상하여 광복절 아침에 ‘기미가요’를 방송하는 등 해괴한 짓거리로 역사의 물줄기를 거꾸로 돌리려 획책하고 있다.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친일부역자를 청산하지 못한 응보요, 그들을 묵과한 ‘선량한 방관자’들 탓이다. <계속>

조송원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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