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인 변화를 일컬어 흔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하지요. 이 말은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인식론 혁명을 이룩한 철학자 에마뉴엘 칸트가 처음 언급한 말입니다. 칸트가 인식의 중심을 인식의 대상에서 인식의 주체, 즉 인간으로 전환한 것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한 것입니다.
칸트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가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로부터 이어진 지구 중심의 천문학에서 태양 중심의 천문학으로 혁명을 이룬 것처럼 자신도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어진 대상 중심의 인식론에서 인식의 주체(인간) 중심으로 인식론의 혁명을 일으켰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칸트 이후 이 용어는 사고방식이나 견해가 종래와는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코페르니쿠스는 인류의 우주관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그가 한 일은 잘 알려졌듯이 태양 중심의 우주체계(Heliocentrism)를 수립한 것입니다. 이것은 태양중심 지동설, 혹은 간단히 지동설로 불립니다.
고대 우주관과 과학혁명·르네상스 전야
고대부터 인류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체계적인 이론으로 발전시킨 주요 인물은 피타고라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받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들의 방대한 철학과 함께 우주관을 발전시켰습니다. 유럽의 사상사에서 이들의 영향력이 워낙 막강했던 터라 이들의 우주관 역시 강력한 힘을 오랫동안 자랑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가 쇠퇴한 뒤 암흑기와 중세시대에는 성경의 창세기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결합한 기독교 우주관과 세계관이 인간의 사고체계를 지배했습니다. 그 핵심은 지구 중심의 천동설입니다. 우주의 중심은 정지한 지구이며, 태양을 비롯한 모든 천체들이 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에서 달 아래까지의 지상계는 비천하고 달을 포함한 그 이상의 천상계는 고귀한 세계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고상한 귀족계급과 비천한 평민 노예 계급으로 이뤄진 인간 세상을 반영한 것이겠지요. 고대 귀족계급은 당시 우주관을 통치원리로 사용했으며, 암흑기와 중세의 신학적 우주관도 신에 복무시키기 위한 통치원리로 막강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특히 이 우주관을 믿지 않을 경우 이단으로 규정돼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무지막지한 기독교 우주관 아래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이지요.
12세기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이슬람으로부터 유입됨으로써 경직된 기독교 가치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유럽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재발견하면서 자연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즈음 때마침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도시가 탄생하고 대학도 설립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3세기가 되자 유럽 도처에 큰 도시와 대학이 생겨났습니다. 이때부터 유럽인은 중세적인 미신에서 벗어나 합리적으로 사물을 생각하게 되었고 점차 학술을 발전시켜나갔습니다. 중세 기독교 우주관의 모순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입니다.
이처럼 유럽의 학문(특히 과학)과 합리적인 사고는 주로 이베리아(지금의 스페인·포르투갈)로부터 유입되었습니다. 이 무렵 이와 병행해 이탈리아 등을 통해 이슬람의 기술이나 실질적인 지식도 유럽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여기에는 천문학, 지리학, 돛, 나침판, 조선기술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과학혁명과 르네상스의 원동력 ... 인간의 사고와 창의력에 대한 자신감
나침판은 중국에서 처음 발명되었지만 이슬람의 상선을 통해 이탈리아로 전해지고 이탈리아 사람에 의해 더욱 개량되었지요. 유럽 열강들의 항해술은 이슬람 학문과 기술에 결정적으로 힘을 입은 것이었습니다. 지리학에서는 아랍의 천문학자 알브라간이 820년께에 저술한 천문학 텍스트가 유럽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를 들어 콜럼버스는 이 책을 보고 서쪽으로 가는 편이 빨리 아시아에 도달한다고 잘못 알고 서쪽으로의 모험 여행을 결심했다는 분석도 나와 있습니다.
당시 학자들은 자신들이 고전문화를 부활시키는 데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 같은 자각이 바로 르네상스의 핵심 동력이 되었지요. 르네상스 사상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지만 처음에는 인문주의라고 불린 지적 운동의 형태로 대두되었습니다.
인문주의는 예술 문화 학술 등 각 장르에서 인간 본성, 인간의 존엄성, 인간 정신과 지혜를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자유로운 탐구와 비판력을 자극했으며, 또한 인간의 사고와 창의력에 대한 자신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는 곧 과학 분야에서도 기존의 낡은 체계에 대한 비판정신을 고양시키는 분위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과학혁명이 르네상스와 때를 같이한 것은 우연이 아니지요.
르네상스의 원래 뜻은 재생 혹은 부흥이지요. 즉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에 꽃을 피운 인간 찬가의 문예가 쇠락한 뒤 이슬람 세력이나 종교에 의해 억압되었던 시대를 넘어 이제 다시금 재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르네상스 시대란 유럽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인들에 대한 경외심과 열등감에서 벗어나 문명 창조에 자신감을 회복한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뜻이 좀 변질되어 르네상스는 문예부흥을 뜻하는 말로 굳어졌습니다. 유럽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문명(그리스 로마 문명)에 위축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이자 수수께끼입니다. 암흑시대(대략 서기 400~900년) 중세시대(대략 서기 900~1400년)의 유럽인들에게 고대 그리스 로마의 건축물들은 경외의 대상임에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같은 구조물의 건축법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고대인들의 신에 가까운 솜씨를 입증하는 많은 물리적 증거뿐만 아니라 비잔티움에서 고대인들의 지적 위력을 증명하는 문헌들이 새롭게 발견되었습니다. 그러자 중세 사람들은 고대인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더 지적으로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와 같은 고대 철학자들의 가르침을 토를 달 수 없는 칙서로 받아들이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르네상스의 중심사상인 인간주의는 이슬람의 영향
그리스 뒤를 이은 로마인들은 과학적 우주관을 둘러싼 논의에 기여한 바가 거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등장하기 1500년 전인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시대 이후부터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는 기간 유럽인의 우주관은 기본적으로 변한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유럽의 우주관이 바뀌기 시작한 데에 이슬람의 영향이 결정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5세기 말에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사상계의 중심인물인 피코 델라 미란돌라(Pico della Mirandola)는 그의 저서 『인간의 존엄에 관한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아라비아의 책을 읽은 바에 따르면 인간만큼 훌륭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즉, 르네상스의 중심사상인 인간주의가 사실은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르네상스 사조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라파엘로의 대표작들인 회화들입니다. 그 이전의 유럽 중세 회화는 종교 그림 일색이었는데 이들은 인간을 그렸던 것입니다. 신이 중심이 아니라 인간이 그림의 테마가 된 것입니다. 르네상스 회화는 중세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특히 현세적 이익을 쟁취하는 이탈리아의 신흥 부르주아의 환희를 강하게 표현했습니다.
르네상스를 진작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입니다. 동방의 다수 학자들이 중요한 서적과 그 필사본, 그리고 그리스의 학문적 전통을 지니고 이탈리아로 피신해왔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는 그 문헌들에 대한 연구를 이어받았고, 그 운동의 주창자들은 암흑시대 이전에 존재했던 전통에 따라 문명을 재수립할 목적으로 고전문헌에서 가르침을 찾아내 확산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사건을 르네상스의 출발점으로 보는 해석은 매우 일리가 있습니다. 이 같은 일련의 움직임을 거쳐 근대 유럽은 이미 사라진 고대 로마제국의 마지막 흔적 위에 멋지게 놓이게 되었습니다.
르네상스 도화선,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또 흑사병으로 인한 유럽의 인구 감소도 르네상스 운동에 불을 지폈습니다. 1347~1348년 유럽 전역을 휩쓴 흑사병은 유럽 인구 3분의 1을 앗아갔습니다. 생존자들은 부실한 사회적 토대를 새롭게 목도하고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노동력이 귀해지면서 인력을 대체할 장비의 발명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도 과학혁명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들이 전부는 아닙니다. 15세기 중엽,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의 발명은 과학의 맹아적 요소에 큰 영향을 미쳤고, 대양 항해선의 등장이라는 또 다른 기술 발전 덕분에 새로운 발견물이 유럽으로 유입되어 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서구의 과학혁명이 시작됐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일단 시동이 걸리자 과학은 기술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이렇게 개량된 기술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험해볼 수 있는 더 치밀하고 정교한 수단을 과학자들에게 제공해주었습니다. 과학혁명을 향한 선순환 작용이 일어난 것입니다.
굳이 따진다면, 기술의 발전이 과학의 발전보다 먼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계의 작동원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기계를 만드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이 결합하자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본격적인 도약이 시작되었습니다.
1543년은 코페르니쿠스의 유고작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와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가 세상에 나온 해입니다. 이 우연의 일치는 과학혁명, 우주관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간편한 징표가 되었습니다.
과학혁명은 한순간에 폭발하듯 갑자기 터진 현상은 아닙니다. 특히 16세기의 과학혁명의 전체 과정은 혁명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진화 현상에 가깝습니다. 과학혁명의 싹은 앞선 세대가 조금씩 뿌린 씨앗이 발아한 것입니다.
진정한 과학혁명의 동력 ... ‘위대한 고대 철학자들도 틀렸을 수 있다’ 자각
천문학은 15세기 항해와 관련하여, 그리고 태양년과 맞지 않은 낡은 율리우스력의 개량과 관련하여 더욱 발전했습니다. 이런 움직임은 빈 대학의 게오르크 푸르바하(1423~1461) 및 그의 제자 요한네스 뮐러(1436~1476)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가 작업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정확한 근대적 관측의 자료가 꽤 많이 축적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진정한 혁명은 르네상스 학자들이 스스로를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 등 위대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교설에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지녔으며, 고대인들도 자신들과 별로 다를 게 없는 존재라고 여기게 되면서 본격화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그들도 인간일 뿐이라는 깨달음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비판정신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 시대의 과학자들은 새로운 방법을 창안해냄으로써 사상계에 가장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했습니다. 전통적인 서적들을 읽는 것으로 일관해온 중세 사상가들과는 달리 초기 과학자들은 관찰과 임시적인 가설 설정에 큰 역점을 두었습니다. 관찰의 방법은 다음의 두 가지 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자연 질서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 방식들은 경험적으로 논증되어야 하며, 설명들은 잘못될 수 있다는 가정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과학자들이 사물의 피상적인 현상을 초월하여 탐구할 수 있다면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가정이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천체를 새로운 각도에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천상에 대한 성서 구절들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체들의 운동을 기술하는 원리 및 법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관찰의 방향은 별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물리적 실체의 가장 미세한 구성요소까지 미쳤습니다.
과학혁명에는 두 개의 뚜렷한 구성 요소가 있습니다. 새로운 과학적 발견과 과학적 탐구를 위한 새로운 방법이 그것입니다. 과학자들은 관찰의 정확도를 증가하기 위해 여러 가지 과학도구들을 발명했습니다. 망원경과 현미경의 발견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당시의 발견들 가운데 더욱 극적인 것은 천문학의 새로운 개념들입니다. 중세의 천문학자들은 인간이 곧 신의 창조활동의 중심이며, 따라서 신은 인간을 문자 그대로 우주 중심에 위치시켰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천문학자들은 이러한 생각을 산산이 조각내 버렸습니다. 과학은 우주 속의 인간의 위치를 드러냈었습니다. 과학혁명은 새로운 인류에게 새로운 우주관, 나아가 새로운 세계관을 열어준 것입니다.
<'우주관 오디세이' 저자·인저리타임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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