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관 오디세이 - 설익은 양자이론 BKS이론
닐스 보어(Niels Bohr)는 플랑크의 양자 개념과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개념을 적용해 원자의 스펙트럼과 구조를 설명한 ‘보어 원자모형’으로 1922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광양자 가설을 내세워 ‘광전효과’ 메커니즘을 규명한 아인슈타인도 1921년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그 해에 보어와 함께 노벨상을 수상했습니다.
두 거장의 노벨상 수상으로 광양자는 물리학계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광양자 개념에 대한 태도는 극명한 대조를 보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를 수용하는 태도를 취한 반면 보어는 한사코 거부한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광양자 가설을 세워 광전효과 메커니즘을 밝혔으나 광양자 개념이 썩 내키지는 않았습니다. 광양자라는 개념이 필연적으로 불러올 불연속성과 우연성에 의해 물리학이 오염되지 않을까 해서였습니다. 밀리컨(Robert Millikan)도 광전효과 실험을 통해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을 재확인했으나 정작 밀리컨 자신은 광양자를 실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어쨌던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제안한 광양자의 실체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반면 보어는 당시까지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광양자의 개념이 고전적인 전자기이론과 상충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는 심지어 1923년 미국 초청강연 도중 아르놀트 좀머펠트로부터 광양자의 존재를 확인한 결정적인 실험인 ‘콤프턴 효과’을 전해듣고 비판을 넘어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양자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보어의 진취적인 학문의 여정으로 볼 때 이 같은 지나친 ‘광양자 알러지’는 불가사의한 부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후에 빛을 비롯한 물질의 ‘입자-파동 이중성’을 근간으로 한 상보성 원리를 창안해 양자론의 해석을 완성한 인물인데도 말입니다.
당시 원자의 방사(radiation) 문제에 관한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해석은 극명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이 문제를 고전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근본 원인이 전자기이론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보어는 고전역학적인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전자기이론이 통계적인 관점에서 해석할 때만 옳다고 주장한 반면, 보어는 에너지보존법칙이 통계적으로만 성립한다고 해석했습니다.
빛의 이중성에 관해서도 두 사람의 해석은 극명한 대조를 보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파동 모형을 광자의 운동을 지배하는 법칙에 대한 시각적 은유라고 생각한 반면, 보어는 광양자 가설을 방사와 원자 사이의 상호작용을 지배하는 법칙에 대한 시각적 은유라고 여겼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보어 자신의 원자이론은 광양자의 존재를 강력하게 암시합니다. 그는 원자가 방출하는 불연속적인 선스펙트럼을 설명하기 위해 플랑크의 에너지 양자 개념을 최초로 도입했던 것입니다. 보어의 이론은 원자가 특정 진동수의 빛 알갱이를 어떻게 흡수·방출하는가를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어는 이 빛 알갱이를 광양자 가설의 실체로 믿지 않았으며, 물리학의 진정한 기초 개념으로 수용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그토록 믿은 전자기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연속적인 빛 에너지 알갱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일까요?
보어는 1924년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을 대체하는 새로운 복사이론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원자 복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고전적인 메커니즘을 발견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물질과 방사 사이의 불연속적인 상호작용을 지배하는 새로운 메커니즘이며, 또한 엄격한 에너지 보존법칙과 운동량 보존법칙을 만족하지 않는 메커니즘이 되어야 했습니다.
보어는 미국 물리학자 슬레이터(J. C. Slater)의 가설적 이론을 바탕으로 제자인 크라머르스(H. A. Kramers)와 함께 광양자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방사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이 연구는 원자에서 방사되는 광양자를 고전물리학의 전자기복사이론으로 설명하는, 간단히 말하면 양자론적인 불연속성과 고전물리학의 연속성을 화해시키는 작업이었습니다.
앞서 슬레이터는 정상상태의 원자를 가상의 조화진동자(virtual harmonic oscillator)로 간주하는 가설을 제안했습니다. 원자들은 이들 조화진동자에 의해 생성되는 가상 방사장(virtual radiation fields)을 매개로 하여 상호 소통합니다. 특히 이 조화진동자의 진동수는 원자가 정상 상태 사이를 전이(transition 혹은 jump)하면서 방출하는 빛의 진동수에 해당합니다. 가상 방사장의 개념은 바로 광양자 가설과 고전물리학의 전자기이론을 조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상 상태의 원자에 의해 방출되거나 흡수되는 가상 방사장의 강도는 광양자가 방출 또는 흡수될 확률을 결정합니다. 이때 한 원자의 광양자 방출은 다른 원자의 광양자 흡수와 연관됩니다. 이 방사는 가상적인 것으로 실제로 관측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방사 과정에서 에너지 방출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원자들과 방사 사이에 교환되는 에너지와 운동량은 개개의 상호작용마다 보존되지 않고, 모든 전이에 대한 평균적인 보존법칙이 성립할 뿐입니다.
슬레이터의 이 가설은 보어가 찾던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다만, 광양자 개념을 인정하지 않았던 보어는 슬레이터의 가설 가운데서 가상 방사장이 광양자를 흡수, 방출한다는 개념은 버리고 대신 통계적인 에너지 및 운동량 보존법칙 개념을 추가했습니다. 보어를 비롯한 코펜하겐의 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원자 현상에서 에너지와 운동량이 통계적으로만 보존된다고 가정해야만 했습니다.
즉 원자에서 복사선이 구면파로 방출됨에도 불구하고 마치 바늘이 찌르는 듯한 방식으로 운동량을 원자에게 주어 원자가 뒤로 밀려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에너지-운동량 법칙이 거시적으로만 유효한, 통계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과도적인 양자이론인 BKS(Bohr-Kramers-Slater)이론입니다.
BKS이론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광양자 개념 없이 콤프턴 효과나 광전효과를 설명하려는 이론입니다. 그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자의 정상 상태 사이의 자발적인 전이는 원자(가상 조화진동자)에 의해 생성되는 가상 방사장에 의해 유도된다. 그리고 이 ‘유도된’ 전이는 다른 원자에 의해 생성된 가상 방사에 의해 야기된다. 한 원자에서 일어나는 전이와 다른 원자에서 일어나는 전이 간의 연결성은 순전히 통계적이며, 결과적으로 개개의 방출과 흡수 과정에서 에너지 및 운동량의 보존법칙은 성립하지 않는다. 유도된 전이의 확률은 그 전이에 대응하는 진동수를 가진 가상 방사의 강도에 의해 결정된다.
이 논문은 원자를 둘러싼 새로운 방사장의 역할, 이를테면 빛의 방출과 흡수, 원자 간의 에너지 운반 등을 수학적이 아닌 정성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이론은 초기 보어의 원자모형이 침묵하고 있던 스펙트럼의 강도에 대해 어느 정도 해답을 주었습니다.
전자가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전이하기 쉬운 정도를 나타내는 확률은 곧 스펙트럼의 강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빛의 강도는 곧 빛 알갱이의 숫자에 의해 결정되므로 방사 스펙트럼의 강도는 전이 확률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런데 BKS논문은 X선과 전자의 산란 실험인 콤프턴 효과에 대해 에너지 보존법칙이 통계적으로만 성립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사실 콤프턴 산란은 에너지 보존법칙을 정확하게 만족합니다. BKS의 결정적인 오류입니다. 오류의 근본 원인은 광양자 가설을 수용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슬레이터의 제안 중에 가상 방사가 실제 광양자의 방출과 흡수를 결정한다는 가설을 버리고 통계적인 에너지 보존법칙만을 만족한다는 내용을 임의로 채택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1924년 4월 막스 보른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자가 빛을 쬐면 다른 에너지 준위로 도약할 시간뿐 아니라 방향까지도 전자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한다는 발상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네"라며 “BKS이론이 옳다면 나는 물리학자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구두 수선공(cobbler)이나 카지노 직원이 되겠네.”라며 조롱 섞인 비판을 가했습니다. BKS이론이 자연법칙의 확률성과 통계성을 담고 있는 데다 자신의 광양자 가설을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어도 논문을 낸 지 불과 1년 후인 1925년 실패를 인정하고 폐기를 선언했습니다.
한편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는 파동역학을 완성하기 이전에는 자연법칙이 통계적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1924년 BKS가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을 대체하는 새로운 복사이론을 제기했을 때 이들의 생각에 매우 동조적이었습니다. 당시 코펜하겐의 과학자들은 보어의 신념에 따른 새로운 원자이론은 에너지와 운동량이 통계적으로만 보존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슈뢰딩거는 이 새로운 복사이론이 지닌 통계적 성격이 비인과적 자연법칙을 주장하던 빈 대학의 스승인 엑스너(Franz Exner) 교수의 주장과 서로 통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이론이 처음 나왔을 때 아주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보다 2년 앞선 1922년 슈뢰딩거는 당시 파동-입자 이중성 문제에 대해 골치를 앓으면서 에너지-운동량 법칙을 파기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11월 8일 슈뢰딩거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과 복사과정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파울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말하기 두려운 일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복사 방출 과정에서 에너지-운동량 법칙이 파기된다고 믿습니다.”
BKS 이론은 고전역학에서 양자역학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양자론을 고전역학의 기초 위에 세우려는 최후의 시도이자, 광양자 가설을 부인하는 노력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 첫 사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논문의 혁명적인 함의를 간파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양자역학을 처음으로 정식화한 하이젠베르크입니다. 그는 원자를 가상 진동자로 간주한 대담하고 혁명적인 개념을 원자 이론에 적용해 마침내 양자역학을 완성했습니다.
<'우주관 오디세이' 저자·인저리타임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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