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관 오디세이 - 슈뢰딩거와 파동방정식
양자역학의 두 가지 형식 중 하나인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의 탄생지가 북해의 헬골란트 섬이라면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이 태어난 곳은 스위스 알프스 산자락의 휴양지 아로사(Arosa)입니다. 그런데 건초열병에 걸린 하이젠베르크가 요양 차 헬골란트 섬에 간 데 비해 슈뢰딩거는 밀회를 즐기기 위한 휴양 차 아로사를 찾았습니다.
슈뢰딩거가 아로사에서 파동방정식을 유도할 당시 부인이 아닌 한 여인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물리학사에서 너무나 유명한 일화니다.
슈뢰딩거는 대단한 학문적 업적만큼이나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아로사의 여인’ 외에도 평생 수많은 여인들과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슈뢰딩거는 혈기 방자한 25세 때 귀족 여인을 사모했으나 신분의 차이로 인해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이 상처는 그로 하여금 여인에게 집착하도록 만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슈뢰딩거는 사실 김나지움 시절부터 선정적인 연극을 좋아했으며, 세기말인 아방가르드 시대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만연했던 에로틱한 미술에 심취했습니다.
그는 여러 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정작 부인인 안네 마리 베르텔에게서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의 첫 딸은 친구의 아내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 친구는 자신의 아내가 슈뢰딩거와 연분을 나눈 사실을 알고도 슈뢰딩거를 깊이 존경한 나머지 이를 용인해주었습니다. 게다가 이 친구의 아내는 슈뢰딩거의 부인과 한 집에서 기거하며 딸을 양육해주기까지 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슈뢰딩거 자신도 부인이 친구인 수학자 헤르만 바일과 정을 통하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슈뢰딩거의 최대 업적인 파동역학, 파동방정식은 헤르만 바일을 빼놓고 얘기하기 힘듭니다. 슈뢰딩거는 1922년께 당시 물리학계의 베스트셀러였던 바일의 ‘공간-시간-물질’이라는 책을 읽고 파동방정식 창안의 첫 발을 내딛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책에 나오는 바일의 주장을 차근차근 따라간 끝에 ‘궤도 내의 전자가 정상파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간파했다고 합니다.
슈뢰딩거가 드 브로이의 물질파 논문을 본 것은 1925년이었습니다. 당시 취리히연방공과대학 교수인 피터 디바이(Peter Joseph William Debye)가 드 브로이의 최근 논문을 그에게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드 브로이의 논문에 반한 슈뢰딩거는 디바이의 “파동을 제대로 다루려면 파동방정식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 자극받아 파동방정식 연구에 몰입했습니다.
슈뢰딩거는 또 1925년부터 아인슈타인의 기체이론과 연관시켜 이상기체의 통계학적 열역학을 연구했습니다. 그해 11월 3일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와 11월 16일 알프레드 란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슈뢰딩거는 자신이 드 브로이 논문을 면밀히 읽었으며, 그 의미를 이제 완전히 파악했다고 말합니다. 이때 슈뢰딩거는 움직이는 입자는 세계의 기초를 구성하는 복사파동 위로 솟아 나온 일종의 ‘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925년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알프스 산자락에서 ‘아로사의 여인’과 밀회를 즐기면서 파동방정식을 세운 슈뢰딩거가 산을 내려와 맨 처음 찾은 사람은 다름 아닌 아내의 정부이자 친구인 바일이었습니다. 수학자인 바일을 도움을 받아 마침내 자신의 방정식을 풀어 파동함수(그리스 문자 ψ로 쓰고 ‘프사이’라고 읽는다.)를 구했던 것입니다.
슈뢰딩거가 만든 파동방정식은 원자 주변의 물질파(정상파)의 구체적 형태와 진행 과정을 기술하는 방정식입니다. 물질파라는 개념을 통해 그는 원자의 한 정상상태를 어느 한 계, 예를 들어 진동하는 현의 정상진동과 비교할 수 있었습니다. 이 경우 보통은 정상상태의 에너지로 생각되었던 양들이 여기서는 정상진동의 진동수로서 나타났습니다. 슈뢰딩거가 이 방법을 써서 얻어낸 결과들은 새로운 양자역학의 결과들과 매우 잘 일치했습니다.
결국 슈뢰딩거 방정식은 물질파로 나타나는 입자를 기술하는 파동방정식인 것입니다. 이 방정식을 풀면 물질은 어떠한 형태의 파동을 가지고, 그 파동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진행하는지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슈뢰딩거는 자신의 방정식을 사용하여 수소원자의 에너지 값을 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슈뢰딩거는 보어가 양자조건을 통해 규정했듯이 전자의 에너지는 일정하고 불연속적(띄엄띄엄함)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이후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물리학자들은 헬륨원자 등 무거운 원자에 대해서도 파동방정식이 올바른 해답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로써 파동방정식이 물질파(입자)의 물리적 상태를 제대로 기술하고 있음이 증명된 셈입니다.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은 당시 물리학계의 거장들인 플랑크와 아인슈타인으로부터 즉시 절찬을 받았습니다. 이 방정식은 미시세계의 운동법칙을 기술하는 양자역학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슈뢰딩거는 후에 자신의 파동방정식이 하이젠베르크의 행렬방정식과 수학적으로 등가임을 증명했습니다.
원자 현상에 대한 두 가지 전혀 다른 수학적 기술이 동등하다는 사실은 놀랍고도 고무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들 양자역학이 원자 세계를 올바르게 설명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굉장히 복잡한 많은 계산을 간단히 처리해 주었습니다. ‘슈뢰딩거 방정식’ 혹은 파동방정식으로 불리는 이 수식은 뉴턴의 운동방정식과 더불어 과학사상 가장 위대한 방정식 중의 하나로 평가됩니다. 파동방정식의 해(solution)를 ‘파동함수(wave function)’라고 부릅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맥스웰 방정식처럼 선형미분방정식(linear differential equation, 고계도함수 혹은 도함수가 모두 1차의 형태로 돼 있는 것, 즉 도함수의 제곱 형태가 없는 미분방정식)입니다. 이 선형미분방정식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중첩의 원리’를 만족시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의 해인 파동함수는 여러 가지 상태의 중첩을 기술합니다.
슈뢰딩거는 1926년 여름 좀머펠트 교수의 초청을 받아 뮌헨대학에서 그의 파동역학 발표회를 가졌습니다. 슈뢰딩거는 파동역학의 수학적 원리를 우선 수소원자의 경우를 예로 들어 펼쳐보였는데, 참석자들은 그 단순함과 명료함에 넋을 빼앗길 정도였습니다. 슈뢰딩거는 또 물리적 해석도 당당하게 제시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토론 시간에 파동역학과 슈뢰딩거의 해석이 플랑크의 흑체복사 공식과 배치된다며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러자 원로 실험물리학자 빌헬름 빈이 나서서 하이젠베르크가 제기한 난점은 조만간 해결될 것이라며 슈뢰딩거에게 믿음을 보냈습니다. 게다가 빈은 “이제는 양자비약은 논의의 가치조차 없고, 행렬역학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스승으로 행렬역학에 호의적이었던 좀머펠트조차 슈뢰딩거 방정식의 수학적 편리함에 넋을 잃고 있었습니다. 슈뢰딩거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파동역학은 행렬역학을 누르고 새로운 대안으로 급부상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슈뢰딩거는 물질파 개념을 통해 ‘양자도약’과 같은 파동역학의 난점과 모순을 제거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사람에게 익숙한 전자기파나 음파처럼 물질파는 공간과 시간 안에서 직관적 현상들이어야 하며 ‘양자비약’이라든가 ‘불연속성’ 따위는 이론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슈뢰딩거는 생각했습니다.
슈뢰딩거는 이런 믿음에 따라 ‘양자도약’ 개념을 완전히 폐기하고, 원자 안의 전자를 3차원의 물질파로 대체하고자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는 수소원자에서 ‘에너지 준위’는 안정적인 물질파의 고유진동수로 나타난다는 결과를 얻어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를 에너지라고 부르는 것은 오류이며, 에너지가 아니라 진동수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슈뢰딩거의 기대섞인 생각과는 달리 파동역학은 분명한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전자를 물질파로 본 파동역학은 플랑크의 흑체복사 외에도 콤프턴 효과와 광전효과를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또 안개상자에는 전자의 궤적이 나타나는데, 이는 파동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특히 전자궤도를 무시함으로써 전자에 대한 심상을 갖지 못하게 됐다며 행렬역학을 공격한 슈뢰딩거는 자신의 파동역학도 같은 상황에 빠지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즉, 전자 두 개를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나타내면 6차원의 파동, 전자 세 개는 9차원 파동이 되는 등 무한 차원의 파동을 상상해야 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결국 전자에 대한 심상을 가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는 슈뢰딩거 자신이 당초 전자의 파동을 실제 파동이라고 전제한 것과 모순임에 틀림없습니다. 보른은 파동함수에 대한 확률해석(확률파동)을 통해 이 같은 치명적인 약점을 보완하려 했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파동함수의 확률해석’에 대한 논란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주관 오디세이' 저자·인저리타임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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