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장편소설】 저곳 - 11. 갑철과 술녀(4)

박기철 승인 2024.05.08 09:59 의견 0

11-4. 아름다운 왕비를 본 갑철

내가 아무리 우리 원주민 종족들 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았다 해도 내 인생은 너무나도 슬펐어. 나 무지 서글픈 여자야. 여기서 정말로 위로가 필요해. 아! 근데 너는 생긴 게 훤한 게 여자들 꽤나 홀렸겠다. 울렸겠다. 내가 얼굴 허연 놈들을 모두 증오해도 너는 내가 봤던 놈들 중에서 제일 잘 생겼네. 그래도 아무리 네가 미남이라 해도 그냥 그렇다는 거야. 난 하도 징하게 당해서 허연 놈들은 무조건 싫어. 그들은 나한테 증오의 대상이야. 여기서도 분노해.

뭐 여기 와서까지 증오를 하고 그래. 이젠 분노의 감정을 좀 내려놔도 돼. 내가 하는 이야기가 너한테 위로가 되려나 모르겠네. 난 인류사 최고의 풍운아로 불려지고 있어. 바람(風)처럼 구름(雲)처럼 떠돌아 다녔던 풍운아? 근데 내가 그렇게 원해서 풍운아처럼 떠돌아 다닌 건 아니야. 살다보니 어쩔 수 없이 떠돌아 다닐 수 밖에 없었어. 내가 전에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그 얘기보다 지금부터 이야기가 더 스릴 있어. 내가 조국인 아테네를 배신하고 적국인 스파르타로 망명했거든. 거기서 미모의 왕비가 내 앞에 나타났단 얘기까지 전에 만난 자영한테 했었네.

나는 네가 여자 얘기 할 줄 알았어. 꼭 그럴 거 같더니만 딱이네. 잘 생긴 놈들은 꼭 티를 내요. 어쨌든 네가 도망간 주제에 망명지에서 감히 그 곳의 왕비와 썸씽이라도 있었다는 거야.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 그건 꼭 내가 그렇게 하려고 해서 그리 된 게 아닐 수도 있어.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그 나라 역사에 남은 왕비들 중에 가장 유명한 왕비 하나는 바람이 나서 엄청난 전쟁을 일으키고 말지. 트로이 전쟁이라고 들어는 봤겠지. 엄청난 피바람을 몰고 온 전쟁이 왕비의 불륜 때문이었지. 스파르타의 헬레네 왕비야.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다고 소문이 자자했었지. 그런데 그녀는 트로이의 패리스 왕자와 눈이 맞아 바람이 나고 이에 분개한 스파르타의 왕이 트로이로 쳐들어가 전쟁을 일으키지. 그 유명한 패리스의 사과 이야기에 나오듯이… 패리스는 부와 권력을 약속한 헤라, 지혜와 승리를 약속한 아테나 대신에 최고 미인을 약속한 아프로디테에게 황금 사과를 주지. 아프로디테는 패리스로부터 황금사과를 받고 패리스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지. 당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스파르타의 왕비인 헬레나였는데 결국 아프로디테의 약속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스파르타의 왕비인 헬레나를 얻게 돼. 왕비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스파르타의 왕은 열불이 뻗쳐 트로이를 쳐들어 간다는 이야기지. 『일리아드』라는 책에 기록된 이 트로이 전쟁 이야기는 신화와 역사가 혼재되어 있어.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가 나오고 제우스의 아들인 헤라클레스 등 여러 신들이 나와. 신들이 나온다고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먼 신화 만은 아닐 거야. 신들을 등장시켜 역사적 사실을 드라마틱하게 꾸며낸 다큐 픽션이겠지. 이 트로이 전쟁 이야기 하려면 한도 끝도 없어. 그냥 본론으로 돌아와서 내 이야기 할께. 트로이 전쟁의 불씨이자 단초를 만든 스파르타의 헬레네 왕비 이야기하다 딴 데로 빠졌네. 아무튼 스파르트의 헬레네 왕비가 불륜을 저지른 거처럼 내가 만난 스파르타의 티마이아 왕비도 나와 불륜을 저질렀어.

그게 좋겠어. 왜 이야기가 딴 데로 빠지나 했네. 그냥 네 얘기해. 쓸데없이 저 옛날 신화속 전쟁 이야기하지 말고… 관심없어.

내가 왕비와 일으킨 건 사소한 바람이나 불륜이 아니라 간통이자 사통이었어. 그런데 나랑 불륜을 저지른 그 왕비가 저 옛날 트로이의 왕자와 바람이 나서 트로이 전쟁의 발단이 된 스파르타의 왕비와 국적이 똑같아. 그래서 잠시 얘기가 딴 길로 흘렀어. 나의 상대자인 스파르타의 왕비는 티마이아라는 이름의 왕비야. 그녀도 헬레네 왕비 못지 않게 빛나도록 아름다웠어. 그런데 얼굴에 그늘이 낀 거 같았어. 뭔가 결핍된 듯한 표정이었지. 그러면서도 날 보는 눈빛이 야릇하게 흔들리는 거 같았지. 워낙에 체격 좋고 인물 좋은 나는 뭇여자들로부터 그런 눈빛을 하도 많이 받아봐서 익숙했어. 그런데 그 눈빛의 주인공이 내가 도망가 의탁하는 나라의 왕비인지라 나는 그냥 모른 체 할 수밖에 없었지. 그런데 난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낀 결정적 이유를 알게 되었어.

박기철 교수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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