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개개인이 소우주이다. 우주의 관점에서는 한 인간은 티끌만도 못하다. 그러나 개인의 입장에서는 한 티끌에 불과한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우주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개인을 가족이나 부족으로 확대해서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개별적 자아나 가족이나 부족을 절대 가치로 여기게 되면, 인간 사회는 유지가 불가능해진다. ‘축의 시대’에는-물론 현대에서도-이 개별적 가치의 추구로 극심한 폭력과 전쟁으로 사회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이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상황에서 축의 시대 현인들은 자비의 윤리를 발전시켰다. 그들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실용적인 사람들이었다. 공감이 단지 유익하게 들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중심주의로 발생한 고통스런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 효과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자비와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최선의 정책임을 통찰했던 것이다.
하여 현인들은 어떤 믿음(신념)-세속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을 검증하는 잣대를 제시했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믿음에 호전적이며 불친절해지고, 자신이 편협해지다면, 이는 유익한 믿음이 아니다. 반면에, 자신이 가진 신념 때문에 남에게 자비로운 행동을 하고 낯선 사람을 존중한다면, 이것은 좋은 것이고 건전한 것이다.
예레미야는 추방당한 사람들에게 복수는 답이 아니며, 원한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사제 저자(司祭 著者, priest authors)는 추방당한 유대인에게 그들이 이집트에서 나그네였으니, 그들 가운데 있는 나그네를 존중하라고 가르쳤다.
『일리아스』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는 함께 눈물을 흘린다. 분노와 독기 서린 원한은 우리를 비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다.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와 함께 슬픔을 나누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잃었던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축의 시대 현인들은 ‘황금률’(자비, 공감)이란 도덕적 원칙을 통해 인간의 내면 변화를 추구한 점은 분명히 인류사의 중요한 사상적 혁신이었다. 그들은 개인의 도덕성을 발전시키고 인간관계를 개선하여, 이를 통해 사회가 자연스럽게 더 나아지기를 기대했다.
따라서 현인들의 목적은, ‘훈련과 교육을 통해 습관이 된 자비심을 갖춘’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을 창조하려는 기획이었다. 그러나 이게 가능한 일일까? 우선,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다음으로, 사회제도와 구조적 불평등 문제에 관심하지 못했음은 축의 시대 현인들의 시대적 한계이다.
그러므로 현대에도 절실히 요구되는 ‘황금률’이란 빛나는 통찰을 보인 축의 시대 현인들의 기획이 실현되지 않음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교육과 훈련을 통한 인간 변화의 어려움이고, 둘째는 구조적 불평등을 야기하는 사회제도이다. 첫 번째 문제부터 살펴보자.
*나는 나면서부터 다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옛것을 좋아하여 힘써 탐구하고 있는 사람이다. -논어/술이19-
*나에게 수년의 말미를 주어 『주역』 배우기를 마친다면, 큰 허물이 없을 것이다.-논어/술이 16-
동아시아에 수천 년 동안 성인(聖人)으로 추앙해 온 공자도 이처럼 치열히 공부하는 사람(학인)에 불과했다. 곧 성인이라는 초월적 인간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사표(師表)가 될 수 있는 현인이라 함이 더 적확하지 않을까?
이런 공자도 완성된 한 인격체가 되기 위해서는 70년이 걸렸다. 한데 평범한 일반인이 어떻게 단기간에 내적 변화를 이룰 수 있을까?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삼십에 성취한 바가 있었고,
사십에 망설이지 않게 되었고,
오십에 천명을 알았으며,
육십에 귀가 뚫렸고,
칠십에 마음의 욕망을 따르되, 법도를 넘지 않았다.
- 논어/위정4 -
공자가 말하는 ‘학문’은 무엇인가? 그 요체는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이다. 수기는 자기 수양을 통해 인격을 완성하는 것이다. 치인은 수기를 바탕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자질 혹은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서 보듯, 공자는 모든 덕목과 정치활동은 개인의 수양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스스로 도덕적 완성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타인을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공자는 덕치(德治)를 강조하며, 군주나 리더가 덕성을 갖출 때,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따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사를 물었다. “무도(無道)한 자를 죽여, 도(道)로 나아가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대만한 분이 정사를 다스리는데 어찌 죽이려 합니까? 그대가 선하고자 하면, 민(民)도 선하게 될 것입니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民)의 덕은 풀과 같습니다. 풀은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쏠리게 됩니다.” -논어/안연19-
축의 시대 현인들의 기획이 실패한 것은 매우 묵시적이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이 왜 이토록 어려울까? 인간의 자기중심성, 이기심이 그 어떤 본능보다 강고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것은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서는 제어할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축의 시대 여러 현인 중 한 사람인 공자의 덕치는 매우 이상적인 정치이다. 그러나 맹점이 크다. 군주나 리더가 덕치를 행하지 않고, 폭압정치를 한다면? 이에 대한 대책이 있는가? 없다. 축의 시대 이래의 역사가 전쟁과 살육으로 얼룩지고, 평화로운 시기가 짧은 이유이다.
축의 시대 현인들도 시대의 한계로, 인간만을 변화시키려 했지, 사회제도의 개선에는 관심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계속>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