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자씨, 고마 해라. 내 얼굴이 화끈거려 앉아있을 수가 없다.”

순영씨가 소녀처럼 부끄럼을 타는데

[제자=서사균]

23. 문서없는 노예가 되어(15)

“그건 그렇고.”

운을 뗀 열찬씨가

“이건 내가 수자씨에 대해서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건데...”

“말씀하세요. 설마 언니 두고 날 좋아한다는 말은 아닐 테고.”

“맞아. 우째 알았지? 내가 수자씨를 좋아한다는 걸. 사실 나는 형님, 동생 하나에 누님이 넷이나 되는데 여동생이 없어. 그래서 여자를 잘 보살피는 못 하고 덤벙대는 사내가 되었는지 모르는데 언제부턴가 내게도 예쁘고 착한 여동생하나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아무치고 성격 좋은 여직원이나 수더분한 부녀회원이나 뭐 그런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는데 수자씨를 만나고 그런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어. 수수하고 밝게 잘 웃고 남의 이야기 잘 들어주고 몸 안 아끼고 부지런하고...”

“아이구, 어지럽다. 소구리뱅기 고만 태우소.”

“그럼, 내가 오빠가 되어도 좋을까?”

“안 될 것도 없지요. 그럼 오빠라고 불러줄까요?”

“좋지.”

“오, 오빠. 열찬이오빠!”

“오, 고마워 가슴이 벅차다 못해 터질라카네.”

하고 열찬씨가 수자씨의 손을 잡고 한참이나 눈을 들여다보는데

“그럼 두 사람사이에 호칭이 몇 개씩이나 되는 거지.”

순영씨도 웃으면서

“수자 니가 짝통 시누이가 된단 말이지?”

“하하. 그럼 어때? 이래도 언니, 저래도 언니인데.”

하고 잔을 채우더니

“자, 오빠 한 잔!”

“그래 누이도 한 잔!”

건배를 하고 또 잔을 붓는지라

“반잔씩 부어요. 아직 들먹일 호칭이 많아 아직 남은 잔이 많아.”

“그래요. 자, 형부 한 잔!‘

“처제도 한 잔!”

“선배님 한 잔!”

“후배님 한 잔!”

“가열찬선생님 한 잔!”

“성수자시인님 한 잔!”

거푸 잔을 비우자 그 새 <매취순> 한 병과 막걸리 한 통, 소주 한 병이 바닥이 났다.

“이제 고만 마시고 숨 좀 돌리자.”

순영씨가 상을 정리하고 빈 그릇을 모으자

“언니, 설거지는 원래 향단이 몫이 아잉교? 내 이래 넓은 주방에 저렇게 멋진 개수대 놔 놓고 설거지 한 번 하는 것이 평생소원이었는데 언니는 형부랑 데이트나 좀 하이소.”

“그래 알았심더. 자꾸 놀리지나 마소.”

“시누이 심술이 어데 가능교?”

“알겠심더.”

하던 순영씨가

“열찬씨, 그 나무젓가락 둘 하고 빈 통에 물 한 통 담아오소.”

해서 방에서 나무젓가락을 찾아 나오자 방금 창고에서 나오던 두 사람이

“거 화장실 한 번 호텔 급이야.”

배시시 웃었다. 젓가락하나와 물그릇 하나씩을 들고 나란히 걷는 모습을 보며

“야, 경치 한 번 좋다! 우리 형부는 무슨 복이 저래 많아 절세미인을 하나는 솜씨 좋은 아내로 만나고 하나는 마음 착한 애인으로 만났는지?”

호스로 물통에 시원스런 물줄기를 뽑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는데

(그래 평생 몸을 의탁한 여자와 맘을 빼앗긴 여자와...)

하다 뜨끔해지며

(원망과 저주로 한탄의 세월을 보낼 또 한 여자와...)

옥자씨의 잔상에 미간이 좁아지자

“열찬씨 무슨 생각하세요? 뭐 안 좋은 일 있어요?”

“아, 아니요. 이렇게 좋은 날이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올까 싶어서. 이렇게 볕 좋고 바람 좋고 함께 하는 사람이 좋은 날이 얼마나 더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하긴. 그건 나도...”

하다

“그렇게 음풍농월만 할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배추밭에 벌레나 잡읍시다.”

“벌레?”

“아까 들어오면서 보니 배추 모가 쭈굴쭈굴한 게 많던데 그게 벌레 먹은 거랍니다.”

“벌레라?”

“배추흰나빈가 뭔가의 애벌레라는데 검은 색, 초록 색 두 가지가 있어요. 이렇게 우그러진 이파리를 펴고 잘 살피면...”

하면서 검정 애벌레 하나를 나무젓가락으로 집어 물에 담그며

“원래 아침 해뜨기 전에 해야 잘 보이는데 시작한 김에 오늘 끝을 냅시다.”

하고 둘이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하다

“참, 순영씨 몸은 다 나은 거요?”

“예. 인자 거의 안심할 정도라며 1년에 한 번씩 검사만 받는답니다.”

“어느 병원인데? 명의를 만났는가, 촌사람 기초체력이 좋아 그런가?”

“개금 백병원. 의사를 잘 만난 셈이지요.”

“다행이네.”

하고 또 한참을 엎드려 벌레를 잡다

“참, 열찬씨는 몸 아픈데 없지요?”

“예. 당뇨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 특별히 나쁜 데는 없어요.”

“열찬씨가 꼭 오래 살아야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예에?”

“당신이 접 때 내가 아플 때 그랬잖아요? 여자인 내가 남자인 자기보다 적어도 한 5년은 더 살아서 죽은 뒤에 눈물도 좀 흘리고 절에 가서 빌어주기도 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그랬지요.”

“그러니까 내가 오래 살고 말고는 열찬씨한테 달렸단 말입니다. 당신 죽고 플러스 5년 말입니다.”

참 침착한 사람인데 오늘 분위기도 좋고 술도 마셔 많이 상기된 모양이라고 전에 없이 당신소리까지 하며 두 뺨이 발그레한 순영씨를 한참이나 바라보는데

“보소! 거기 머리 허연 두 사람! 데이트 엔간히 하고 고만 오소. 커피타임입니다.”

설거지를 마친 수자씨가 커다랗게 소리쳐 불렀다. 순영씨가 허리를 펴며

“갑시다. 열찬씨!”

“시누이 심술도 아니고? 아직 손도 못 잡아봤는데.”

“일생을 잡아버린 사람이 손목하나에 연연하나요?”

“평생을 잡았다고?”

“그렇지요. 당신과 내가 만난 이후 당신이 힘든 세월만큼 나도 같이 힘든 세월이었지요.”

“어떻게?”

“당신이 내게 편지를 보낸 그날부터 나는 황당하고 놀랍고 무섭고 부끄럽고 남이 알까 두려우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늘 전전긍긍 했지요.”

“그래서?”

“언양읍쪽으로 가는 일이 있으면 늘 당신과 마주칠까 가슴이 울렁거렸지요.”

“그야 나도 그랬지요.”

“굳이 당신의 설악산수학여행이야기는 말 않더라도 고2이던 시절 작천정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고, 공무원시험에 걸려 삼남면사무소에 다닌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또 언양바닥에서 혼자 대학입학예비고사에 걸려 야간대학에 진학한다고 소문이 뜨르르 나고 나는 그 때마다 무심한 척 하면서 얼마나 신경이 쓰이던지 마침내 나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었을 때 한번 찾아가 만나는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고.”

“그래 말이요. 그 때 당신이 내게 일단 관심은 있다고 장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지 당신이 싫어서 외면한 거라고 한 마디만 하였어도 나는 용기백배해서 살아갈 수 있었겠지. 가난한 고학생이라는 생각도, 첫사랑에 버림받고 대학마저 휴학했다는 자괴감에 젖어 밤거리를 방황하는 생활은 않았을 텐데.”

“모르는 척 하면서도 어떻게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엿듣게 되는지, 사람들은 왜 그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고 무심한 척 내게 시시콜콜 만사를 귀에 다 넣어주는 건지. 당신이 <동아문학상>을 타고 동인지를 냈다는 좋은 소식, 대학을 휴학하고 방황한다는 소식을 다 듣고 어떻게 하나 고민 끝에 마침내 일단 만나보자고 결심한 것은 당신이 입대한다는 소식을 듣고 망설이다, 망설이다 사흘인가를 앞두고 전화를 한 것이지요. 그냥 보내고 나면 평생 인연이 끊어지고 두 사람 다 평생을 불행한 기억 속에 살 것 같아서.”

“그래놓고 이튿날은 왜 안 나왔는지?”

“만나고 나니 더 혼란스러웠어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도 있고 또 나보다 한 살 작은 사람이 군대3년과 아직 휴학 중인 대학을 마칠 때까지 기다린다는 확신도 서지 않고.”

“그랬구나.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얼마나 실망하고 절망했는지, 나를 실제로 한번 만나보고는 도저히 희망이 없다고 포기한 줄 알고 말입니다. 입영열차가 논산훈련소에 닿을 때까지 차창 밖의 마을과 사람들과 길가의 과수원과 들국화, 심지어 겅중거리며 뛰어가는 아이들과 강아지까지 다 슬펐어요.”

“그랬겠지요. 나도 지금쯤 입영열차를 타고 가겠다. 나를 얼마나 원망하고 풀이 죽었을까 생각했지요.”

“그리고 군대생활 내내 꽃이 피고 낙엽이 지고 바람만 건듯 불어도 생각이 나고 휴전선에 달이 뜨면 가슴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아서 퀭한 눈빛으로 순영아, 순영아를 외치며 절망하고.”

“그랬겠지요. 나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말자 어서 선을 보고 시집을 가라는 어머니의 성화에 당신은 잘 지내는지, 왜 도무지 편지나 무슨 연락은 없는지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여자인 내가 찾아 나설 수도 없고 야간대학을 휴학하고 군에 간 총각이 있어 그 사람을 기다린다고 시집을 갈수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결국 당신이 울분에 젖어 절망하는 만큼 나도 고민을 한 셈이지요.”
“그랬구나. 나는 어떤 때는 당신이 김중배에게 시집간 심순애라는 생각도 다 했어요. 재미있는 건 김중배의 다이아몬드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아예 다이아몬드를 파는 금방으로 시집을 갔으니.”

“이 마당에 당신을 원망할 것은 아니지만 운명이란 참으로 무서운 사슬인가 봐요. 그 긴 세월을 떨어져 있어도 당신과 나는 단 한 번도 잊지를 못하고 하나는 시를 쓰고 하나는 그 시를 보며 가슴을 치고, 하여간 이렇게라도 만나 회포를 풀게 되니 그나마 다행이지요.”

“그건 그렇고.”

“단지 사내인 열찬씨는 절망에 빠져 울분을 터뜨리고 술을 마시고 시를 쓰고 동적(動的)으로 실연의 아픔을 달랬다면 여자인 저는 아무런 대책도 없고 어떤 반응이나 행동을 할 수도 없이 그 긴 세월을 견뎌낸 것이지요. 당신이 호랑이나 사자처럼 포효했다면 저는 나무나 바위처럼 그냥 웅크린 채로...”

“그러네. 어쩜 나보다 더 힘들었겠네.”

하고 새삼 둘이 마주 보는데

“이 양반들이 암만 쳐 불러도 못 들을 정도라면 좀 제대로 된 밀회라도 하지?”

어느 새 밭둑까지 찾아온 수자씨가

“우리 선배의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처럼 선배나 언니나 참 끈질긴 사람들이야. 나 같으면 그 긴 세월에 숨이 막혀 죽었을 거야.”

비로소 허리를 펴고 밭에서 나오며

“2,3일 있다가 아침 해 뜰 때 한 번 더 잡으세요. 알뜰히 잡는다고 잡긴 했지만.”

하고

“수자 니는 시누이심술도 아니고 그걸 진득하게 좀 못 봐라보나?”

하고 웃자

“아니 밀회를 하려면 좀 제대로 하지 키가 한 질도 넘는 들깨밭에 들어가서 퍼뜩 뽀뽀라도 한번 하고 나올 일이지 명색 데이트한다는 사람이 남 다 보이는 배추밭에서 벌레나 잡고 말이야.”

“뭐, 밀회라고?”

순영씨가 깜짝 놀라는데

“히야, 그 참 감미로운 말이네. 우리 두 사람이 영화의 주인공이 된 느낌도 들고...”

열찬씨가 허허 웃으며 앞장서 테이블에 도착하자

“아이구, 커피가 다 식었네.”

수자씨 말에

“뭐? 입으로 후후 불지 않아도 되고 딱 마실 만하네.”

순영씨가 답하자

“언니는 밀회를 하니 밀회 그 자체가 꿀맛이라 그렇고 나는 방자도 없는 춘향인데 무슨 맛이 나겠노?”

하며 셋이 웃다

“그런데 밀회란 그 말, 말이야.”

열찬씨가 운을 떼며

“내겐 황홀한 단어일지 몰라도 순영씨에겐 애민 단어 같아. 가정 있는 우리 두 사람이 무슨 흑심이나 꿍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수자씨 처럼 누군가가 보는데서 공개적으로 만날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무얼 어쩌겠다는 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밀회라는 말자체가 좀 과분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맞아. 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밀회란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다 뛰면서 이상한 생각이 다 드네.”

“무슨 소리? 두 사람처럼 완벽한 그리움이 어디 있고 완벽한 밀회가 어디 있어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아무도 알 수 없는 마음만 살며시 빠져나와 만나는 완벽한 사랑이 아니냔 말이요.”

“나는 몸에서 정신이 빠져나간 유체이탈이란 말은 들어도 몸이 사라져버린 마음만 서로 만난다는 말은 처음이야.”

“그게 더 진정한 영혼의 사랑이 아닐까?”

“아, 맞다. <사랑과 영혼>이라고. 우리도 영화처럼 물레라도 돌릴까?”

열찬씨가 허허 웃자

“아무튼 두 사람을 보는 일은 신기하기도 하고 엉뚱하기도 하고 난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요.”

“어쩔 수 없지. 더 이상은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순영씨가 일어나며 시계를 보더니

“벌써 세시 반이네. 내가 다섯 시까지는 돌아온다고 했는데.”

“아직도 어디 간다고 일일이 허락받고 몇 시까지 온다고 보고해야 되나?”

“그럼 우짜노, 남편인데? 오늘은 중학교동창회 간다고 했으니 늦어도 그 시간까지는 가야 된다. 그것도 허락해준 것이 고마워서 그 양반 좋아하는 돼지수육거리나 횟감이라도 좀 사서 막걸리 두 병 곁들여서 말이야.”

“참 여러 가지 하시네. 선배님, 아니 오빠는 괜찮소?”

“나야 뭐, 비밀로 하니까.”

“그러다가 들통이 나면?”

“그 사람한테 가라고 난리가 나겠지. 그러다가 혼자 울고불고 고민하다 한 일주일 지나면 용서하기로 했다면서 더 곰살맞게 굴고.”

“하여간 복도 많아. 두 명의 미인이 하나는 완벽한 아내로, 하나는 또 간이 오그라드는 완벽한 첫사랑으로.”

“그래요. 이제 그만 흉보고 이 호박이라도...”

열찬씨가 풀밭을 뒤져 애호박 두개와 누런 호박 하나를 찾아왔다. 창고 안에 널어놓은 강낭콩도 한 봉지 넣어주며

“돼지감자도 좀 드릴까?”

농사짓는 순영씨는 빼고 수자씨에게 이것저것 챙겨주려는데

“우리 집에 당뇨환자는 없으니 돼지감자는 됐고. 선배님 힘들게 농사지어서 나 다주면 어떡해요?”

“뭐 오라비가 여동생 주는 게 어때서? 그래야 시누이 심술을 안 부리지.”

깨끗이 부신 그릇도 방안으로 옮기고 탁자주변을 정리하고 화장실까지 다녀와서

“우짤랑교? 열찬씨는.”

같이 갈 건지 물어보는데

“가만 있자... 원래 집에 갈 계획은 아닌데 나도 집에 갈래?”

“왜 갑자기?”

“내 두 사람을 보내고 혼자 돌아서기도 싫고 텅 빈 농장을 혼자 서성이기도 싫고...”

열찬씨가 베낭을 챙겨 차에 오르자

“내가 모를 줄 알고. 옆에 잠시라도 더 붙어 있으려고 하는 걸.”

“우째 알았지?”

하면서 순영씨의 손등에 스치는 자기 손을 황급히 빼는 열찬씨를 보며

“손목 잡아 볼라면 운전하기 전에 잡아보소. 명색 밀횐데 한번은 잡아봐야지.”

순영씨가 백미러 속을 보며 웃더니

“괜히 터널 속에서 손잡지 말고.”

하고 출발했다. 두 개의 언덕을 넘어 한빛아파트를 지나 동해남부선 철로를 넘어 월내시장을 지나자

“꿈같은 하루가 지나가는데 우리 노래나 합시다.”

열찬씨 말에

“노래 좋지요. 수자씨하고 둘이 한 곡씩 하이소. 운전하는 나는 감상이나 하지요.”

해서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마주잡고 산 제비 넘나드는 영마루위에...”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백미러 속으로 웃음을 함빡 띤 순영씨가 따라 하자

“오빠는 무슨 시인이 가사가 그렇게 엉터리야?”

“글쎄. 전체적 이미지로 한번 기억을 하면 세부적으로는 자꾸 틀리는데 그걸 고치려 해도 잘 안돼요. 그걸 심리학적으로 뭐 <기억의 고집>이라고 한다던가?”

“그래도 노래자랑에 가서 가사 틀리면 바로 땡인데 시인이 가사가 다 틀린다니.”

“나는 마 듣기만 좋은데.”

“에이, 안팎이 똑 같다.”

하고 셋이 합창으로 2절까지 부르고

“앵콜! 완스 모어!”

다시 한 번을 더 부른 후에

“내가 순영씨 생각해서 개발한 신곡이 있는데.”

“아이구, 언니는 좋겠다.”

“아니 세월호 때문에 슬픈 뉴스 아니면 느린 노래만 라디오에서 나와 한 6개월 쭉 듣다보니.”

“그래요? 한번 해 보이소.”

순복씨가 건널목에 차를 대고 웃어주는데

-무작정 당신이 좋아요

이대로 옆에 있어 주세요

하고픈 이야기 너무 많은데

흐르는 시간이 아쉬워

멀리서 기적이 우네요

누군가 떠나가고 있어요

영원히 내 곁에 있어 주세요

이별은 이별은 싫어요.-

멋쩍은 생각에 더듬더듬 겨우 이어가는데

“쉿!”

무어라 말을 하려는 수자씨를 제지하던 순영씨가

“좋은데요. 나도 전에 몇 번 듣기는 했는데.”

“아이구, 부러워라. 또 손발이 척척 맞네. 나는 이런 노래 불러주는 남자 하나도 없고...”

하던 수자씨가

“2절도 해보세요. 나도 따라 부르게.”

해서

-무작정 당신이 좋아요

이대로 옆에 있어 주세요

이렇게 앉아서 말은 안 해도

가슴을 적시는 두 사람

창밖엔 바람이 부네요

누군가 사랑하고 있어요

우리도 그런 사랑 주고 받아요

이별은 이별은 싫어요

이별은 이별은 싫어요.-

자동차가 곰내터널을 들어가는데

“그 손 안 놓을 거요? 언니도 똑 같다. 슬며시 손목을 갖다 맡기네.”

“이런 질투장이, 모처럼 분위기 좀 잡는데 와 이라노?”

웃으며 터널을 빠져나오자

“수자 니는 어데 내릴래?”

“아무데나 서면쪽 가는 버스 정류장.”

“알았다. 원동교 지나서 파출소 앞에서 내리고. 열찬씨는?”

하고 묻던 순영씨가

“아, 알았다 42번이 망미동으로 가지.”

하고 회동동에서 고가도로를 빠져나오는데

“하루를 잘 보냈지만 이래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날꼬?”

“살다보면 문득 또 그런 날이 오겠지요.”

“소금물이 쉬고 모래에서 싹이 나는 날?”

“그럴지도 모르고 영 못 만날지도 모르고.”

가늘게 한숨을 쉬던 순영씨가

“수자야, 내리라. 오늘도 수고했다.”

“선배님, 즐거웠어요. 언니도 고맙고.”

버스로 갈아타는 수자씨에게 손을 흔들고

“동상동 고개에서 내리소. 한 칸 더 가면 우리 집인데 영감한테 들키면 죽는 날이다.”

“아따, 겁은 많아서! 영감도 내 존재를 안다면서.”

“알지. 부부싸움 할 때마다 자기가 괜히 데려와 가열찬 그 사람만 존 일 했다고.”

“그러게 첨부터 내게 오지.”

“그래 말이요. 그게 참 어려운 일이지. 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더란 말이지.”

그새 차가 동상동고개에 닿아

“조심해서 가이소.”

“예. 또 서로 열심히 삽시다.”

“버스 오면 타고 가이소. 먼저 갑니다.”

순영씨가 손을 흔들면서 눈부신 가을햇살 속으로 떠나버렸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