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또 다시 지주의 횡포(5)
오리의 농장에 도착하자 손바닥보다도 넓은 배춧잎이 가는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단 한포기이 방울토마토에서 끝물 토마토를 안 줌 따온 열찬씨가
“냉장고에 맥주 좀 꺼내 오소. 잔도 두 개 가져와서 당신도 한 잔 하고.”
해서 첫잔을 마시면서
“와요? 당신 기분이 좋소?”
“좋지. 우리가 언양땅, 논밭은 물론 집터까지 다 팔아묵고 30년이 넘어 고향에 땅을 사서 들어가는 건데.”
“나도 우리가 지주가 될지는 몰랐어요.”
“우리가가 아니고 내가로 해줄 거야. 당신 앞으로 몽땅 등기를 할 테니까.”
“왜요?”
“당신 평생소원이 커다란 상가건물주가 되어 월세 받는 것이라고 했잖아. 상가는 아니더라도 땅이라도 처음 당신명의로 등기를 해주는 거지.”
“고맙습니다.”
“그냥 고마운 거야? 감격의 눈물도 없이?”
“모르겠어. 그냥 어리둥절해.”
하면서 부지런히 전에 베어 논 들깨를 털었다.
“야, 제법 많네. 한 말도 넘겠네.”
마침 바람이 알맞아 금방 들깨를 디룬 영순씨가 수돗가에서 들깨를 깨끗이 씻어 태이블 위에 보를 깔고 펼치더니
“안 되겠다. 갑자기 강풍이라도 불면 풍비박산이 되겠다.”
하고 다시 방바닥으로 옮겨 깔았다.
“배추가 색깔을 좋은데 알은 영 안 드네.”
“생땅이라 그렇지.”
“웃거름으로 요소비료 좀 주면 안 될까?”
“아, 안 돼!”
소리치는 열찬씨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난 봄 고추모와 가지, 오이, 토마토에 감자까지 일부를 죽여 버린 쓰라린 기억이 떠오른 것이었다.
“명촌형님이 그러던데 배추뿌리에서 한 뼘 자리에 요소를 한 숟가락씩 주면 아무 탈 없이 배추가 쭉쭉 키를 뽑아올린데.”
“몰라. 알아서 해. 나중에 배추 말라죽는다고 나한테 원망하지 말고.”
“아이구, 겁쟁이!”
영순씨가 배추밭에 엎드려 웃거름을 주는 사이 열찬씨는 고구마 밭으로 가서 몇 뿌리 캐어보다
“야, 대박인데!”
절로 신명을 내었다. 대여섯 포기를 캤는데 거름소쿠리에 가득했다. 다 캐면 몇 가마니라도 될 것 같아 요즘 최악의 상태로 허덕이는 막내처제 영아네, 특히 한창 먹성이 좋은 주형이, 지현이 중학생남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야, 고구마 실하네. 빛깔도 좋고. 가면서 영서집에 좀 넣어주고 갈까?”
“그러든지.”
“그라지 말고 당신하고 나하고 한 골쯤 더 캡시다.”
“와?”
“해운대 영아집에 들립시다. 요새 밥이나 안 굶는지 모르겠네.”
“그래 심각하나?”
“위태위태한가 봐. 잘못하면 김서방에게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설마?”
하면서 부지런히 고구마를 캐서 40킬로 포대 둘을 채우고 고구마줄기도 잎이 달린 채로 한 아름 따서
“이건 내하고 슬비하고 영아하고 각자 잎을 따서 먹기다.”
“그래. 요즘 나오는 제주도 낚시갈치 사서 고구마쭐개이 밑에 깔고 찌지먹으면 좋지.”
“고구마쭐개이가 다 뭐고? 상스럽게.”
“무슨 소리. 우리 어릴 때는 고구마쭐개이가 아이라 오마쭐리, 오마쭐리, 오마이 데스꼬 마쭐리 뭐 이런 식으로 팝송을 흉내 내서 불렀지. 아마 오 마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사랑노래인 모양인데.”
“그런 멜로디는 들어본 것 같군.”
하고 차에 짐을 싣고 넘어오다
“맞다. 사람들 마늘 심던데 우리 마늘은 인자 어디 심지?”
“오리에 심어야지. 지금 명촌에는 땅이 없는데.”
“아이구, 막상 땅을 산다니까 오리 땅에는 다시 오기도 싫은데.”
“오리 땅이 아니고 오리에서 만나는 모씨 때문 아니가?”
“알면서 말라꼬 묻는데?”
“하긴 나도 누구 안 본다니 속이 다 후련해. 우리 둘이 싸울 일도 없을 거고.”
“피이.”
정훈희, 김태화의 <꽃밭에서>를 지나 문동고개를 넘으니 새파란 바다가 펼쳐져 마음이 후련했다.
“저 봐. 저녁바다 흰 돛배가 고기를 싣고 오잖아?”
“아이구, 그 놈의 센티멘탈!”
하면서 부지런히 해안 길을 달려 기장에 도착하자 평소의 반송 쪽이 아닌 해운대로 방향을 잡았다. 영아네 아파트 앞에서 미리 전화를 받은 영아씨가 두 남매를 데리고 나와
“형부,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며 하나는 덩치가 장정 만 한 주형이가 매게 하고 하나는 지현이와 둘이서 마주잡고 들어가는데 아주 흐뭇한 표정이었다.
“가시나 제일 새첩고 착한 게 복은 제일 없어.”
중얼거리는 영순씨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이제 진짜 이게 내 땅이 되는 건가? 마침내 내가 언양땅에 지주가 되는 건가?)
법무사사무소에서 계약을 하기 전날 14층 박태국 토지관리과장을 통하여 떼 온 토지대장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열찬씨에게
“여보, 단디 하소.”
“뭐를?”
“땅 사고파는 데는 사기가 많다면서.”
“응?”
“그리고 그 땅에는 가등기랑 근저당설정이 많다면서?”
“아쭈, 제법인데. 어디서 들었지?”
“내 주변에 재산가나 복부인이 없겠나? 젊어서 당신이 돈이 없어 그렇지 나도 한 때는 친구들 부동산 하는데 구경사마 따라다니면 눈앞에 돈 뭉텅이가 훤하던데.”
“내 그래서 당신 앞으로 등기해준다 아이가? 이 세상에 와서 제 앞으로도 부동산하나 못 가질까 봐서.”
“내 앞이든 니 앞이든 그저 탈 없이 등기나 잘 하소.”
“씰 데 없는 걱정 마소. 요새는 법무사에서 이해관계자 몽땅 불러서 제 자리서 도장 받고 칼 같이 정리해준다 아이가?”
하고 이튿날 영순씨와 함께 울산의 법무사사무실에 들리자
“안녕하세요? 제가 장영흽니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꾸벅 인사를 했다. 몸매가 날씬하고 가름한 얼굴이 앳되보여 부동산사업을 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문학소녀 같은 인상이었다.
“예. 가열찬입니다.”
하고 명함을 꺼내주자 한참 들여다보다 옆에 앉은 땅땅한 여자에게 건네주며
“높은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그래서 깐깐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시인이네요.”
“높은 사람이라?”
“예. 제가 젊어서 보건소에 좀 다녀서 알지요. 국장님이면 가마득히 높아서 그냥 무서운 사람이었어요.”
하고
“여기는 같이 사업하는 언니예요.”
땅땅한 여자를 인사시키고 자리를 잡고 앉자 법무사사무직원이
“매도자, 매수자 두 분 주민등록증 주시고요.”
해서 복사를 시키고
“다음 가등기설정자 아무개씨!”
“예.”
“먼저 주민등록증 주시고요.”
하고 본인여부를 확인한 뒤
“가등기를 해소하는데 이의 없으시죠.”
“네.”
“다음 근저장설정자 여섯 분!”
하고 차례로 본인여부를 확인하고
“근저당을 해지하는데 이의 없으시죠?”
“네.”
“그럼 모두 날인을 합니다.”
하고 주욱 도장을 찍은 뒤
“그럼 매도자와 매수자 토지가격은 결정되었나요?”
하자
“잠깐, 거의 절충되었는데 최종 합의만 하면 됩니다.”
열찬씨가 나서며
“장여사님, 제 조카 박장로에게 최종 1억 9천까지라고 들었습니다. 또 제가 1억 8천까지 드리겠다고 한 이야기도 들으셨죠?”
“예.”
“우리 입장에서는 너무 오래 방치한 집이라 명색 대지라 해도 아직 대나무뿌리가 그대로 방치되고 전(田)으로 된 자리에 뒷산 계곡물이 범람, 돌과 자갈이 덮어씌워 원래의 형상이 거의 없고 복구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는데 영순씨가 옆구리를 지르며
“당신 사무실 아닙니다. 저쪽 이야기도 좀 들어보세요.”
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데
“사실 우리도 말입니다.”
지주 장여사가 아닌 옆에 앉은 땅땅한 여자가 나서더니
“멋모르고 외진 곳의 땅을 사서 떼돈을 벌기는커녕 근 20년 세금만 꼬박꼬박 물고 나서 하다 못 해 택지개발을 한다고 설계를 하고 도로를 내고 하수도를 묻고서야 겨우 일부를 팔아 그 간 빚진 돈을 갚고 이번에 선생님께 중심지인 그 땅을 팔아야 남은 땅 880평에 대한 근저당이라도 해소할 입장입니다. 정말 울고 겨자 먹기로 땅값을 내룬 겁니다.”
하고 짐짓 억울한 표정을 짓는데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가격이란 늘 흥정을 통하여 절충되는 법, 서로가 서로의 제시에서 조금은 올라가고 내려갈 각오로 이 자리에 왔을 테니 두 말할 것도 없이 딱 한가운데 1억 8천 5백으로 하지요?”
하는데 지주 장 여사가 또
“언니야.”
간절한 눈빛으로 땅땅한 여자를 바라보자
“안됩니다. 그러면 너무 억울합니다. 선생님 인상도 좋고 해서 딱 200만 깎아서 1억 8천 8백으로 하지요.”
땅딸보여자가 말하는데
“괜히 시간만 끌지 말고 그리하십시다. 법무사님, 중간선인 1억 8천 5백으로 기록하시죠.”
하자
“역시 대단하군요. 우리도 이 정도로 깐깐하신 분일 걸로 예상은 했읍니다만.”
장영희씨가 놀라는 표정을 짓는데
“좋습니다!”
실세인 땅땅한 여자가 시원하게 대답하자
“자, 이제 하나씩 확인해 볼까?”
하며 열찬씨가 탁자 위에 서류 하나를 꺼내놓는데
계약 전 확인사항
1.가등기부분 해제여부
2.도로개설계획 도면
0.토지현황도 작성일자와 사유
3.사도설정경계선 측량
4.매매대금에 반영할 사항
0.지목과 현황이 다른 추가경비
-측량, 벌채, 정지비용 300만 원 삭감
5.계약시 확인사항
0관계공부확인
-등기필증
-등기사항전부확인서
-토지이용확인서
-지적도 등본
0.법무사입회및 매매조건 충족확인
0.대금지급방법(잔금전액지급여부)-법무사입회 관계서류완벽징구 이상없음 확인
0.등기권리증 및 관계공부등본 교부시점은 언젠지?
2.계약서 명시사항
1.토지현황도첨부
2.지적공부 미정리시
0.매도자는 위의 토지현황도와 같이 2014. 12. 까지 도로개설및 지적공부정리후 그 성과물(지적도등본, 현장경계표지)을 제시하여야 한다.
0.미정리된 부분의 매수자에게 추가부담되는 추정 제세공과금을 보전하여야 한다.
0.향후 도로개설후 지적면적이 상이할 경우 지가를 정산하여야 한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