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4년 11월 28일 수요일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안경이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에 방으로 들어와 구석에 놓아둔 필자의 배낭 위에 안경을 벗어놓고 침대 2층으로 올라갔다. 침대 1층에 잔 순례자가 새벽에 배낭 있는 곳을 오랫동안 부스럭거린 후 일찍 배낭을 챙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배낭 위에 얹어놓은 필자의 옷들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배낭도 엉망이었다. ‘새벽에 나간 사람이 내 옷과 물건을 뒤졌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지갑은 입고 잔 윗옷에 있어 금전적 피해는 없었다. 노트북도 항상 필자의 머리맡에 두고 자 그대로 있었다. ‘혹시 안경을 침대에 벗어놓고 잤을까?’라는 생각에 침대 위를 뒤지고 덮고 잔 모포를 이리저리 살펴봐도 안경이 없었다. 좀 좋은 안경을 맞춘다고 비싸게 준 것이다. 그것보다 안경이 없으면 잘 보이지 않아 그게 문제이다.

오전 8시쯤 1층으로 내려가니 주인아주머니가 아직 출근 전이었다. 그리하여 안경을 찾으면 챙겨놓으시라는 내용을 메모지에 적어 컴퓨터 옆에 두었다. 그리곤 필자의 배낭을 아주머니 의자 뒤쪽에 두고 노트북만 들고 밖으로 나왔다.

아침에 숙소 아래 카페에서 커피 한잔과 빵으로 아침 식사를 하며 노트북으로 원고를 작성했다. 사진= 조해훈

숙소에서 50m가량 내려오니 문을 연 카페가 있었다. 들어가 커피와 빵을 주문했다. 와이파이가 되어 노트북을 켜고 메일 검색을 한 후 원고 작성을 했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도 신문사 등의 연재 글과 청탁 원고 등을 작성해야 하므로 노트북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대도시여서 그런지 커피가 더 맛있고, 빵도 아침에 만들어 나왔는지 냄새가 좋고 신선한 맛이 더했다. 시간이 갈수록 손님들이 카페에 많이 들어와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오전 11시 40분에 밖으로 나왔다.

카페에서 나와 도로의 건널목을 건너면 콤포스텔라성당으로 가는 길을 만난다

사실 어제부터 콤포스텔라 시외버스정류장에서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많았다. 그런데 안경을 잃어버려 차질이 생겼다. 할 수 없이 오늘도 다시 콤포스텔라 성당 앞 오브라도이로 광장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냥 그곳으로 가야 한다.’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카페에서 50m가량 내려가니 도로가 있고 그 앞에 건널목이 있다. 건널목에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는데 중국 아가씨 장시우 양과 함께 다니는 우리나라 아가씨가 뒤에서 뛰어오더니 “선생님, 안녕하세요?”라며, 신호가 바뀌자마자 둘이 성당 쪽으로 급하게 뛰어갔다. 아가씨 둘 다 순례자 복장이 아닌 멋진 드레스 같은 파티용 옷을 입었다. ‘역시 아가씨들은 다르구나. 언제 저런 옷까지 준비해 왔을까?’라며 혼자 생각을 하면서 성당 앞 광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성당으로 가는 구시가지 바닥에는 직사각형의 보도블록이 깔려있다. 사진= 조해훈

도로 건너면 구시가지이다. 건물들 사이로 좁은 골목이 있다. 길바닥에 직사각형 돌들이 깔려 있어 걸다 보면 기분이 좋다. 어떤 곳은 화강암이, 어떤 곳은 대리석이 깔려 있다. 오늘 날씨가 쾌청해서인지 어제보다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콤포스텔라 성당이 가까워질수록 건물들과 골목들에서 묵중한 느낌이 있다. 순간 ‘육중한 역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로마 시대부터 사람이 산 지역이지만 9세기에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되고, 그 위에 성당이 세워지면서 순례자들이 모여들고 집과 건물들이 점차 들어서 이처럼 큰 도시로 발전한 곳이지 않은가. 그 당시 이 도시를 찾은 많은 순례자는 아예 이곳에 정착을 해버렸다. 그게 이 도시의 인구 증가의 한 원인이기도 하다. 물론 많은 가톨릭 신자도 성 야고보를 기리기 위해 이 도시로 이주하였다.

콤포스텔라성당으로 가는 구시가지 골목이다. 사진= 조해훈

필자가 생각하기에 오랫동안 수많은 가톨릭 신자와 순례자들의 종교적인 영혼이 모여서인지 이곳의 공기와 건물들에서 다른 유럽 도시에서 느끼지 못하는 기운과 냄새(?)가 분명히 있다. 일종의 어떤 이끌림, 또는 운명(?)에 의한 것인지 안경을 잃어버림으로써 리스본에 가지 못하고 다시 콤포스텔라 성당의 광장으로 가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래된 길을 걸으며 어제에 이어 콤포스텔라 성당 앞에 도달했다. 광장에 들어서니 오전 11시 50분이었다. 확실히 광장에 어제보다 오늘 사람들이 많다. 어제는 오후 들면서 좀 우중충했으나 오늘은 햇볕이 쨍하다.

날씨가 화창해 콤포스텔라성당 광장에는 어제보다 사람들이 많다. 사진= 조해훈

광장의 이곳저곳을 배회하는데 아까 앞서간 아가씨 두 명이 다른 젊은 남녀들과 섞여 크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젊기도 하지만 발랄한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순례자보다 관광객들이 대부분이다. 햇살이 좋으니 광장 주변에는 사람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환한 햇살 덕분에 사람들의 표정은 더 밝아 보였다. 그런데 광장을 두고 성당 맞은편 건물 앞에 사람들이 몇 명 모이더니 깃발과 현수막을 들며 시위를 시작한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요란스럽게 하지는 않는다. 마이크도 들지 않고, 구호를 외치지도 않는다. 그저 깃발과 현수막만 들고 서 있다.

성당의 광장 건너편에서 사람들이 깃발과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한다. 사진= 조해훈

필자가 광장 가운데쯤에서 서성거리는데 순례자인 듯한 여성이 다가와 “사진 찍어드릴까요?”라고 묻는다. “네. 그러면 감사하지요.”라고 답했다. 낮 12시 8분 무렵이었다. 사진을 찍는 여성이 사진 한 장을 찍고 난 후 웃으며 “한 장 더 찍어드릴게요.”라고 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약간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다 찍곤 여성이 크게 웃었다. 필자는 좀 의아해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뒤를 돌아보니 이럴 수가! 알베르토 티토가 필자 바로 뒤에 서 있는 게 아닌가. 그 여성이 사진을 찍는 사이 필자의 뒤에 살며시 와 여성에게 사인을 보내곤 함께 찍어달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여성이 웃은 것이었다. 필자는 여성에게 “미안하지만 두 사람 사진 다시 좀 부탁드립니다.”라며 부탁했다. 티토와 둘이 어깨동무하고 사진을 찍었다.

한 여성 순례자가 콤포스텔라성당을 배경으로 필자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 조해훈

그런데 함께 걷다가 부르고스에서 헤어졌던 알베르토 티토가 필자 몰래 뒤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 한 여성 순례자

우리는 서로 반가움에 포옹했다. 어제 이곳에 처음 들어섰을 때도 티토 생각을 하였다. ‘그는 다 걷고 스위스로 돌아갔을까?’라며 그를 떠올렸다. 필자는 “티토 당신을 만나려고 오늘 이 광장에 다시 온 것 같습니다. 사실 오늘 리스본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안경을 잃어버려 못 가고 이 광장에 다시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티토도 “어쩐지 저도 오늘 이 광장에 오고 싶었습니다. 저는 피스테라에서 오는 길입니다.”라고 말했다. 여하튼 너무 반가워 우리는 다시 포옹했다. 그리곤 어제 필자가 걸터앉은 난간으로 함께 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지난달 10월 22일 아침에 팜플로나를 떠나면서 만났다. 그리곤 10월 31일 아침에 부르고스에서 헤어졌다. 부르고스에서 티토는 그대로 순례길을 걷고, 필자는 그날 부르고스에서 하루 쉬고 이튿날인 11월 1일에 빌바오에 있는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을 관람하러 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순례길 도상에서 헤어진 지 28일 만에 만났다. 처음 만나 헤어질 때까지 어떤 일로 인해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필자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고, 오래된 친구처럼 함께 걸으며 필자를 도와준 진정한 도반(道伴)이었다.

티토와 함께 둘이 어깨동무하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 한 여성 순례자

이야기를 나누다가 티토가 “혹시 순례 완주증은 받았습니까?”라고 물었다. 필자는 “아니요. 안 받았습니다.”라고 답했다. 사실 필자는 다른 순례자들처럼 카페든, 어디든 가는 데마다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받는 걸 일부러 하지는 않았다. ‘산티아고 길을 걸었으면 됐지, 그런 형식적인 것이 뭐 그리 대수인가?’라고 생각해서였다. 티토는 “그래도 두 번 다시 오는 게 쉽지 않은데 완주증을 받아 가세요. 같이 갑시다.”라고 말하며 필자의 손목을 붙잡고 앞장섰다.

다시 이 건물 안에서 또 다른 순례 완주증을 받았다. 사진= 조해훈

티토의 안내로 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 '산티아고 순례 완주증'을 발급 받았다. 사진= 조해훈

순례길에서 만난 벗 티토의 안내로 받은 '순례 완주증' 3 종류. 사진 왼쪽이 완주확인 사무실에서 발급받은 완주증이고, 맨 오른쪽이 '성 프란시스코' 성당에서 받은 증서. 사진= 조해훈

어제 만난 호주의 모자(母子)가 머무는 호텔 뒤쪽으로 내려갔다. 이쪽 길은 처음이다. 종탑 아래 양쪽으로 좌우에 성인이 각각 두 분씩 있는 중세 시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교회 앞을 지나갔다. ‘SANTIGO 0km’라는 표석이 붙은 건물 앞에 이르렀다. 들어가니 제복을 입은 여성이 데스크에 앉아 있었다. “여권과 산티아고 순례자 여권을 보여주세요.”라고 했다. 그 직원에게 건네고 잠시 기다리니 산티아고 순례 완주증을 발급해 주었다. 완주증에는 필자가 10월 18일부터 11월 28일까지 42일 동안 산티아고 779km를 완주했다고 적혀있다. 필자의 산티아고 순례자 여권에 날짜별로 어디서 숙박했는지 등의 내용이 다 기록돼 있어 그걸 바탕으로 완주증에 순례한 기간을 적은 모양이다. 완주증을 받아 들고 왼쪽으로 도니 상품을 파는 곳이 있다. 거기서 완주증을 담는 자그만 통을 한 개 샀다. 그 통속에 완주증을 말아 넣었다. 티토가 “다른 곳으로 갑시다.”라고 해 따라갔다.

13세기에 건축된 이 '성 프란시스코' 성당에서 세번 째 순례 완주증을 받았다. 사진= 조해훈

'성 프란시스코' 성당 내부. 왼쪽으로 끝까지 가면 있는 방에서 신부님으로부터 순례 완주증을 받았다. 사진 = 조해훈

출입구 위에 ‘33’이라 적혀 있고 숫자 옆에 산티아고 문양이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직원들이 출입구 앞에서 여권을 확인한 후 들어가라고 했다. 들어가 여권과 순례자 여권을 보여주고 기다렸다. 여기서도 증서를 발급받았다. 밖으로 나오니 티토가 “한 군데 더 갑시다.”라고 말했다. 그를 따라 또 다른 교회로 갔다. 성 프란시스코 성당이었다. 주로 순례자들이 미사를 올리는 성당이다. 성당 안으로 쭉 들어갔다. 티토가 작은 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신부님이 얼굴을 내밀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라고 했다. 신부님께서 “증명서에 이름을 쓰세요.”라고 했다. 필자는 공식적인 가톨릭 신자가 아니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필자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신부님께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간단하게 답을 하니 증서를 건네주었다. 이 성 프란시스코 성당은 1214년에 건축된 건물이다. 역사가 상당히 오래된 성당이다.

콤포스텔라 성당이 가까운 정원 옆 레스토랑 야외 테이블에서 티토와 점심을 먹으며 와인으로 건배를 하고있다. 사진= 레스토랑 종업원

필자는 티토에게 “여러모로 도와주시어 매우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그리곤 “어디 맛있는 레스토랑에 가 함께 점심을 먹읍시다.”라고 말했다. 티토가 “그럽시다. 갑시다.”라며 앞장섰다. 거기서 가까웠다. 콤포스텔라 성당과 가까운 구시가지였다. 가운데 정원이 있고 주변에 레스토랑이 몇 군데 있었다. 정원 옆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티토가 바로 옆 레스토랑에 자신이 찾는 와인을 물어보니 없다고 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 왼쪽 레스토랑에 다시 확인하더니 있다고 했다. 그 식당 종업원이 와인 한 병을 가져왔다.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티토는 와인에 대해 아주 박식했다. 필자가 보기에 그는 최고급 와인만 마시는 성향이 있었다. 필자는 와인을 가져온 종업원에게 “와인과 함께 먹을만한 게 뭐가 있을까요?” 물으니 “문어 요리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해 그걸 주문했다. 티토가 점심은 따로 주문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빵도 몇 개 나왔다. 필자는 “그동안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아 제가 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종업원에게 신용카드를 건넸다. 티토는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신시가지에 있는 한 여행사에서 티토(왼쪽)가 마드리드를 거쳐 취리히로 가는 비행기편을 예약하고 있다. 사진= 조해훈

필자가 먼저 티토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니 티토도 필자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서로 잔을 들고 필자는 “살룻!”(¡Salud!)이라며 스페인 건배 말을 했고, 티토는 “건배!”라며 한국말로 했다. 티토는 한국 사람보다 더 정이 많고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마치 죽마고우처럼 느껴졌다. 티토 역시 필자를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함께 걷는 사이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 보니 서로에 대해 제법 알고 있었다. 부르고스에서 헤어진 후 각자의 순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행사에서 나와 티토(오른쪽)가 필자의 부탁으로 아르헨티나에서 와 필자와 함께 걷다 역시 부르고스에서 헤어진 가브리엘에게 전화를 걸고 있다. 사진= 조해훈

필자는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에 간 이야기와 천천히 걸어 다친 곳은 없는데 스트레스로 인해 두통을 많이 앓았다고 말했다. 그는 계속 걸었는데 결국 다리에 문제가 생겨 이틀 쉬었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가브리엘은 바르셀로나로 가 여행가이드 또는 그런 성격의 사람들을 안내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티토는 “앞으로 가브리엘이 한국에도 갈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라고 했다.

필자는 “원래 오늘 포르투갈 리스본에 갔다가 내일 콤포스텔라로 다시 돌아올 생각을 했는데 티토 당신을 만나려고 리스본으로 가지 않고 콤포스텔라 성당 앞에 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랬다. 티토도 “저도 어쩐지 광장으로 다시 오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 웃었다.

필자는 햇살이 강한데 안경을 끼지 않아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불편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대로 햇살을 즐기기로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보니 정원에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사가 있었다. 필자가 티토에게 “우리도 기념으로 사진 한 장 찍읍시다.”라고 해 함께 사진을 찍었다. 조금 뒤에 사진사가 현상한 자그마한 사진을 우리에게 각각 한 장씩 주었다.

그렇게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오후 3시 조금 넘어 일어섰다. 우리는 다시 콤포스텔라 성당 앞 광장으로 갔다. 멀지 않은 거리여서 둘 다 자연스럽게 광장으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티토는 광장에서 아는 사람들을 만났다. 티토는 그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숙소가 어디입니까?”라고 물었다. 필자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면 저도 오늘 그 숙소에서 잘까요?”라고 물었다. 필자는 “그러면 좋지요.”라고 했다. 그리하여 둘은 숙소로 갔다. 주인아주머니가 1층 카운트에 있었다. 필자는 “저는 여기서 하루 더 묵을 것이고, 이분도 오늘 여기서 묵을 건데 침대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아주머니는 “마침 두 자리가 비었는데 같은 침대는 아닙니다. 옆 침대입니다.”라고 했다. 필자는 “혹시 어제 제가 잔 침대에서 안경을 발견하지 못했습니까?”라고 물어보니 “안경은 없던데요.”라고 했다. 필자와 티토는 각자 방값 계산을 한 후 배낭을 방으로 옮겼다. 어제 필자가 잤던 옆방이었다. 그 방에도 2층짜리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필자와 티토는 각각 다른 침대의 1층에 배정받았다. 배낭을 방에 둔 후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티토를 따라 필자가 어제 한국 음식 식당을 오가면서 지났던 신시가지로 갔다. 그는 여행사로 들어갔다. 마드리드로 가 취리히행 비행기를 예매한다고 했다. 그도 내일 마드리드로 간다고 했다. 티토가 비행기표를 예매한 후 우리는 여행사에서 나왔다. 필자가 조금 걷다가 “혹시 가브리엘 전화번호 알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티토가 바로 연결해 주었다. 그때가 오후 6시쯤이었다. 티토의 핸드폰을 건네받아 가브리엘과 통화를 했다. 무척 반가웠다. 그도 반가워하면서 “건강하십니까?”라고 안부를 물었다. 가브리엘은 30대 후반인데 아직 미혼이었다. 티토의 말한 바대로 가브리엘은 아르헨티나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셀로나에서 여행가이드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필자는 “한국에 오면 연락하시라.”라고 말한 후 통화를 끝냈다.

티토(오른쪽)가 한 기념품 가게에 미리 부탁한 선물 가방을 주인에게 받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 조해훈

가브리엘과 통화 후 티토와 상점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 한 기념품 가게에 들어갔다. 티토가 주인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 필자는 이것저것 구경하였다. 티토는 주인아주머니로부터 물건을 담은 가방을 건네받았다. 아마 미리 전화로 선물을 주문했던 모양이다. 가게 바깥으로 나오니 오후 6시 반쯤이었다. 바깥은 제법 껌껌했다.

우리는 구시가지 쪽으로 다시 왔다. 오후 6시 40분, 티토를 따라 한 바에 들어갔다. 티토가 찾는 무언가 없는 모양이었다. 티토가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지하 1층으로 따라오라고 했다. 따라 내려가니 연주자들이 공연을 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티토는 “이 공간에서 매일 연주자들이 공연을 한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한 연주자가 의자에 앉아 기타의 음을 고르고 있다.

티토와 함께 구시가지에 있는 한 바에 들어와 지하에 있는 공연장을 구경하고 있다. 연주자들이 공연 준비를 하고 있다. 사진= 조해훈

티토가 가방을 들고 다니기 불편하다고 해 숙소로 돌아왔다. 가방을 숙소에 두고 우리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구도심지의 다른 바에 들어갔다. 티토가 찾는 것(와인)이 있는 모양이었다. 바에 들어가 테이블에 앉으니 바로 앞에 마늘이 매달려 있었다. 저녁 8시 40분이었다. 티토에게 “스페인 사람들도 마늘을 많이 먹습니까?” 물어보니 “먹기는 먹는데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닙니다.”라고 했다.

티토의 선물 가방을 숙소 방에 두려고 잠시 숙소에 들러 각자의 침대에 걸터 앉은 모습을 필자가 셀카로 찍었다.

와인이 나와 티토는 향을 맡아보았다. “굿!”이라고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에게 먼저 한잔 따라주었다. 그는 와인을 벌컥벌컥 마시는 게 아니라 한 모금씩 음미하면서 천천히 마셨다. 또한 그는 과음하지 않았다. 필자가 웃으며 농담 삼아 티토에게 “제가 와인 소믈리에 자격증 있다는 것 일전에 말씀드렸죠?”라고 말했다. 그러자 티토는 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러는 사이 가리비 조개구이가 나왔다. 티토는 “선생님이 점심값을 내셨으니 저녁은 제가 삽니다.”라고 했다. 조개 8개가 한 접시에 담겨 나왔다. 티토는 숟가락으로 4개씩 나누었다. 그러면서 “드셔보세요. 맛이 좋습니다.”라고 했다. 필자가 먹어본 바로는 산티아고 길의 해산물은 정말 맛이 좋았다. 특히 양념이 독특하면서 맛이 있었다. 별도로 나온 베이커리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필자와 티토 둘 다 오늘 밤이 산티아고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토와 콤포스텔라성당 아래의 한 바에 들어와 테이블에 앉으니 마늘이 매달려 있다. 사진= 조해훈

홍합과 가리비조개 요리, 새우가 들어 있는 해물밥이 별도로 한 접시씩 나왔다. 사실 이런 요리를 하는 곳이 별로 없는 데다 있다고 한들 필자는 메뉴판을 보더라도 몰라서 먹지 못한다. 티토가 원래 스페인 사람인 데다 미식가여서 맛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여하튼 참 고마운 친구이다. 요리가 너무 맛있다. 한국에서 이런 음식을 파는 곳이 있는지는 몰라도 있다고 해도 상당히 비쌀 것이다. 스페인은 한국보다 물가가 싸다. 바 분위기도 오래된 듯하면서 내부에 예술적인 감각이 많이 더해져 있어 좋다. 그리고 조용했다. 필자 또래의 주인아저씨도 조용하면서 사람이 좋아 보였다. 너무 늦으면 곤란하니 우리는 밤 9시 반쯤 일어섰다.

바에서 나온 가리비조개 요리. 특이한 양념으로 요리해 아주 맛 있다. 사진= 조해훈

토(왼쪽)와 필자가 한 바에서 맛있는 해산물 요리를 먹으며 와인으로 건배를 하고 있다. 사진= 바 주인아저씨

숙소로 돌아왔다. 주인아주머니가 카운트에 앉아 있었다. 필자는 “혹시 내일 새벽 4시 30분에 숙소 앞으로 택시 오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아주머니는 “네.”라고 답하며 바로 전화를 걸었다. 필자는 내일 아침 7시 55분에 콤포스텔라 공항에서 파리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방으로 들어와 우리는 각자 침대에 걸터앉아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여성 순례자가 들어왔다. 브라질에서 온 순례자라고 했다. 필자의 침대 2층에 배정받은 사람이었다. 잠시 세 명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서로 잠을 청했다.

마지막으로 홍합과 새우, 가리비조개가 섞인 해물밥이 나와 맛있게 먹었다. 사진= 조해훈

오늘로 긴 순례 여정이 모두 끝났다.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서였다. 순례길을 걸은 지 40일이 조금 지났는데 그 기간이 긴 세월처럼 느껴졌다. 날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걸어서였을까? 아니면 필자는 다른 순례자들과는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려고 하다 보니 머릿속에 많이 저장되어서일까?

티토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필자보다 생각이 더 많았을 것이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스페인으로 이주해 40년가량 살다가 지금은 스위스에서 고등학교 체육 교사를 하며 살고 있는 그에게 스페인은 고국이었다. 일전에 함께 걷는 중에 필자가 “저는 이번에 순례를 마치면 한 번 더 산티아고 길을 걸을 생각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순례를 마치고 스위스로 돌아가면 아마 두 번 다시 산티아고 길을 걷지 못할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잠이 오지는 않았으나 다른 순례자들을 위해 가능하면 몸을 뒤척이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누워있었다. 필자의 인생에서 이번 순례가 기억에 남을 또 하나의 사건(?) 내지는 역사가 될 것 같았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