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1년 농학자 아서 영은 “하층 계급은 가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근면해질 수 없다는 것은 바보만 빼고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라고 썼다. 1786년 성직자 조지프 타운센드는 “그들을 노동하도록 자극하고 고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굶주림뿐이다”라고 강조했다.
타운센드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법률적 제약에는 지나치게 많은 문제, 폭력, 잡음이 뒤따른다. (…) 반면 굶주림은 평화롭고, 고요하고, 꾸준한 압력이 될 뿐만 아니라 가장 자연스러운 산업의 동인으로 작용한다.
굶주림은 가장 강력한 행동을 끌어낸다. (…) 굶주림은 사나운 동물을 길들인다. 굶주림은 야만적이고 고집 세며 악독한 사람들에게 품위와 교양, 순종과 복종을 가르칠 것이다.”
영향력 있는 스코틀랜드 상인 패트릭 콜크훈은 빈곤을 산업화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으로 보았다.
“빈곤은 개인이 잉여 노동을 예비해놓지 않은 사회, 다시 말해 삶의 다양한 직업에서는 늘 근면하게 일함으로써 얻는 것 외에 재산상의 잉여나 생계수단을 갖지 못한 상태와 조건이다. 그러므로 빈곤은 사회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빈곤이 없으면 국가와 공동체가 문명 상태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빈곤은 인간의 운명이다. 부의 원천이다. 빈곤이 없으면 노동이 있을 수 없고, 그러면 부를 소유하는 사람들에게 재물, 교양, 안락, 이익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자본주의 지지자들은 성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제이슨 히켈/『적을수록 풍요롭다 Less is More』(창비,2023)/pp.92~3-
자본주의 발흥기에 자본가나 지배층의 노동자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을 잘 엿볼 수 있다. 자본주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뒷받침할 이론이 필요했다. 그래서 인간은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경제적 인간)이라며, 오로지 경제적 합리성에만 기초를 두고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상을 상정한다.
우리 본성에는 이윤 추구 자동기계와 같은,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이기적인 행위자가 있다. 이러한 자연스런 경향으로 점진적으로 봉건주의의 억압을 깨고, 농노제를 종식시켰으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다. 자본주의의 등장은 내재된 인간 본성, 즉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의 표현이다.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그냥 ‘출현’한 게 아니다. 자본주의로 원활하고 자연스럽게 ‘이행’한 것이 아니며, 인간의 본성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자본주의와 진화론은 ‘경쟁’을 매개로 사회와 생물 현상을 설명한다는 점에서는 닮았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인간의 의지와 제도적 장치를 전제로 삼고, 진화론은 무의도적이고 자연 법칙인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보면 ‘자연 발현된’ 경제체제가 아니다. 봉건 영주, 국가, 상업 엘리트들이 토지 사유화, 공공재 사유화, 식민지 수탈 같은 폭력적·제도적 수단을 동원해 시장 중심 체제를 강제했을 뿐이다.
곧, 중세 봉건제 사회가 직면한 여러 선택지 중 하나로 채택된 경제체제였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와는 다른 경제체제를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었다. 결국 자본주의는 필연이 아닌 ‘그때 그곳에서 주도세력이 만든 제도’였으며, 다른 선택지-예컨대 국가 주도의 상업통제체제, 농촌 공동체 복원, 관료적 토지국유제 등-도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한 번 더 강조하면, 자본주의는 인간 본성에 바탕한 필연의 경제체제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의도적으로 만든 제도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제도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본주의를 폐기하거나 수정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한다.
사회구성원 대부분을 불행하게 하는 불평등의 심화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현재의 ‘약탈적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자본주의’ 모델들이 필요하다.
대표적인 대안 모델이 ‘포용적 자본주의’(Inclusive Capitalism)이다. 시장이 창출한 부(富)를 사회 전체로 골고루 나누고, 기업의 성장과 노동자·소비자·공동체의 복리 증진을 동시에 추구한다. 주주뿐 아니라 노동자·공급자·지역사회까지 ‘이해관계자’(stakeholder)로 인정해 장기적 관점에서 부를 배분하는 방식이다.
이외에도 순환경제, 공유경제, 사회복지 자본주의, 협동조합 경제 등도 유력 대안 모델이다.
이미 선진국이고 부자나라인 대한민국에서 ‘민생회복 소비쿠폰’이 필요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경제가 얼마나 더 성장하고, 얼마나 더 부자나라가 되어야 ‘민생회복’이란 단어가 없어질까?
인간은, 개인은 사회와 제도 내의 존재이다. 개인이 아무리 ‘노오력’해도, GDP가 몇 배로 증가해도 ‘민생회복 소비쿠폰’이 필요한 사회라면, 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제도가 소수에게 특혜를 주고, 대다수 서민에게 박탈감을 안긴다면 그 제도는 존재 근거를 잃은 것이다. 이때, 개인은 자책에만 머물지 않고, ‘제도의 실패’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개인의 행복도 사회제도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성취할 수 있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현재 소비쿠폰이 필요한 서민의 경제 상태는 ‘행복=소유/욕망’에서 분모(욕망)가 과도하게 큰 탓은 아닌 듯하다. 이와 관련, 다음 글에서는 사무엘슨의 행복방정식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