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포항시 포항여고 앞의 학도의용군 공원에서 황용섭(가운데) '독도 평화 33' 회장이 포항여중전투에 참가했던 학도의용군들에게 술을 올리고 있다. 사진= 조해훈
독도 연구 ‘독도 평화 33’과 함께 탐사
배 타기 전 포항 학도의용군 공원 견학
독도박물관·안용복기념관·박정희기념관
2박 3일 방문, 자료들 보며 생각 잠겨
처음 간 89년 비해 울릉도 많이 발전
2025년 9월 22일 아침 6시 40분 울릉도 사동(沙洞)항에서 독도로 가는 배(퀸스타 2호)가 출 항하였다. 선실은 1·2층으로 되어 있는데 필자의 좌석은 2층 일반실 422번이었다. 독도크루즈 (주)가 운영하는 배였다. 좌석은 한 석도 남음 없이 만석이었다.
9월 21일 밤 포항에서 울릉크루즈를 타고 밤 11시에 출발해 이튿날 아침 6시에 울릉도 사동항에 도착한 배에서 승객들이 내리고 있다. 사진= 조해훈
바다는 호수처럼 잠잠하였다. ‘동해(東海)가 이렇게 파도가 없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필자의 일행 6명은 “일진이 좋다.”라고들 했다. 이번 울릉도·독도 탐방을 추진한 황용섭 (65) 박사께서 그동안 기상청과 울릉군청 등과 수시로 통화를 하면서 비가 내리지 않고 파고 가 없는 날을 택했다. 울릉도 사동항에 내려도 갑자기 파고가 높거나 일기가 불순하면 독도로 들어가지 못하는 게 다반사라고 했다.
파도가 전혀 없지만 승무원들은 비닐봉투와 휴지를 원하는 손님들에게 나눠주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승객들이 화장실에 들락거렸다. 멀미하는 것이다. 필자 오른쪽에 앉은 권희경(66) 시인도 화장실로 갔다. 그러자 필자도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권 시인 옆 창 가 쪽에 앉은 신애리(66) 시인은 배를 타기 전에 멀미약을 먹고 잠을 자고 있다. 선실 안의 TV에서는 강호동 등 1박2일 출연 연예인들이 울릉도에서 독도로 가는 영상을 보여주고 있다.
22일 아침 6시 울릉도 사동항에 도착한 승객들이 인근에 정박해 아침 6시 40분에 독도로 출발하는 'Queen Star 2'에 승선하고 있다. 사진= 조해훈
배는 출항한 지 1시간 50분쯤 만에 독도에 도착했다. 승무원들이 먼저 내려 배를 묶는 사이 먼저 와 대기하고 있던 경찰 몇 명이 승객들을 위해 거수경례를 하였다. 독도경비대원인 경찰들이었다. 동도와 서도, 암초 등 86개로 형성된 독도 도 검지만 경찰들의 복장도 검정색이었다. 우리 일행 6명은 맨 뒤에 배에서 내렸다. 황 박사는 기다리고 있던 경비대장에게 다가가 인 사를 했다. 우리도 “수고 많으십니다”라며 경비대장에게 인사를 했다. 황 박사는 독도의 역사 를 알리고 한국 땅이라는 사실을 홍보하는 단체인 ‘독도 평화 33’의 대표이다. 그는 독도와 일본의 독도침탈을 연구하는 역사학자이다. 그리하여 그는 독도를 여러 차례 방문하고 경비대 장과도 친분이 있어 미리 도착 사실을 알렸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일행 6명이 경비대에 전달 하려고 각자 준비한 선물을 모아 전달했다.
독도에 하선한 사람들이 섬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조해훈
우리 일행은 경비대장과 단체 사진을 찍은 후 섬을 둘러보았다. 방문객들이 독도를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은 그리 넓지 않았다. 경비대원들의 생활 공간은 섬 위쪽에 있었다. 30분가량 독 도를 구경하다 보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때쯤 “배를 타세요.”라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오 전 9시쯤이었다. 관광객들이 모두 승선하자 배는 울릉도를 향해 출발하였다. 올 때 앉은 좌석 그대로 앉았다. 독도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파도는 높게 일지 않았다. 창밖으로 독도가 시커먼 모습으로 보였다. 역사적으로 사연 많은 독도를 두고 떠나니 심경이 복잡했다. 그동안 역사적으로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으나 지금은 완전한 대한민국 땅으로 인정 받아 우리나라의 경찰이 지키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독도여 이제는 서러워 마라’라는 혼자만 의 인사를 했다. 다시 사동항에 도착해 배에서 내리니 오전 11시 20분쯤이었다. 필자가 1989 년 처음 후포에서 울릉도를 왕래했을 때보다 많이 발전해 있다.
독도에서 울릉도로 향하는 배의 선실에서 촬영한 독도. 사진= 조해훈
우리 일행은 전날인 21일 오후 5시에 포항여자고등학교 앞에서 만났다. 필자와 신애리 시인 은 진주에서 오후 1시쯤에 포항으로 출발했다. 황용섭(65) 박사님과 장구진(66) ‘독도 평화 33’ 부회장님, 권희경(66) 시인, 정종애(59) 시인 4명은 서울에서 출발해 차 한 대로 포항으로 왔다. 이들은 모두 ‘독도 평화 33’ 회원이었다. ‘33’이란 독도의용수비대 33인을 기리자는 뜻 에서 넣은 숫자라고 황 박사님은 설명했다.
포항여고 앞에 있는 학도의용군 호국문화의 길에 세워진 기념탑과 그들이 싸운 안내판 내용 을 읽었다. 안내판에 따르면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최후 방어선인 이곳 포항에서 육군 3사단 소속 학도의용군 71명이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에서 단독으로 전투에 참전하여 김춘식 외 47 명이 산화한 곳이다. 안내판에 있는 그들의 단체 사진을 보니 마음이 아파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들은 조국을 위해 연필을 내 던지고 손에 총을 들고 전쟁터에 뛰어든 학생이었다. 황 박사님의 설명을 듣는 동안 일행은 모두 가슴이 먹먹한 표정이었다.
또한 당시 포항여중전투 참전 학도의용군인 고 이우근(동성중학교)의 유품에서 어머니에게 쓴 피 묻은 편지가 발견되었다. 그 내용이 비석처럼 만든 벽체에 새겨져 있었다.
‘8월 10일 목요일 쾌청//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나는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 ’
라는 내용이었다.
필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필자는 일행에게 “제가 터키 수도인 앙카라에 있는 6·25전쟁 참전 기념 공원에 간 적이 있는 데 그곳 벽에 한국에 와서 숨진 병사들의 이름과 나이가 적혀있었다. 18·19·20세들이었다. 제가 그곳에 갔을 때 제 아들의 나이가 그들과 비슷해 그걸 보는 순간 눈물이 났다.”라는 이야 기를 하였다.
포항여고 앞에서 북부해수욕장으로 가 모래 작품 전시 등을 둘러보다 인근에서 포항물회를 먹은 후 울릉도로 가는 크루즈여객터미널로 갔다. 여객터미널에서 기다리다가 밤 11시에 울릉도로 출발하는 배를 탔다. 그리하여 이튿날인 22일 아침 6시에 사동항에 도착한 것이다.
독도에서 사동항으로 돌아온 우리는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도동항 인근에 있었다. 일행 6명 이 다 탈 수 있는 큰 택시에 승차했다. 택시는 울릉군청 인근에서 하차했다. 숙소는 골목 맨 위쪽에 있는 유미펜션이었다. 각자 짐을 들고 낑낑대며 올라갔다. 주방과 방 2개가 있는 구조 였다. 높다 보니 전망이 좋았다. 간단히 점심을 해 먹었다. 오후 2시에 독도박물관에서 문화해 설사와 약속이 되어 있었다. 점심을 먹은 후 일행은 밖으로 나와 걸어서 독도박물관으로 향했 다. 황 박사님 등 세 분은 먼저 박물관으로 향했다. 필자는 커피를 마시고 싶어 인근 카페로 들어가 일행 여섯 명이 마실 커피를 샀다.
박물관 역시 가파른 산꼭대기에 있었다. 도착하니 2시 8분이었다. 건물에 들어서기 전 왼쪽 에 사운(史芸) 이종학(李鍾學·1927~2002) 초대 독도박물관장을 기리는 송덕비와 안내판이 있 었다. 박물관 로비에서 여성 해설사를 만나 모두 인사를 했다. 명칭이 독도박물관인에 독도에 있지 않고 울릉도에 있는 건 독도에는 박물관이 들어설 공간이 없어서이다. 학예사 설명에 따 르면 독도박물관은 중앙일보가 창간 30주년과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삼성문화재단과 함 께 건립했다.
해설사의 안내로 본격적인 관람이 진행됐다. 먼저 문헌에 나타난 독도의 역사에 대해 설명했 다. 벽체에 안내판이 부착돼 있었다. 그런 다음 512년(신라 지증왕 13) 신라 장수 이사부(異斯 夫)에 의해 울릉도와 독도가 신라의 영토가 된 『삼국사기』 기록을 볼 수 있었다. 당시 울릉도 와 독도인 우산국은 하나의 독자적인 작은 소국으로 존재했다고 설명돼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도 볼 수 있었다.
독도박물관 위 전망대에 설치된 독도 모형. 이곳에서 망원경으로 독도를 볼 수 있었다. 사진= 조해훈
이런 자료들에 이어 독도가 한국령으로 표기된 여러 지도를 보면서 설명을 들었다. 일본에서 제작된 지도들에도 대부분 우리나라 영토로 표기돼 있었다.
조선 후기에 쇄환(刷還)정책의 일환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오랜 기간 비워두게 된다. 조선 정 부는 울릉도에 관리를 파견하여 울릉도 주민들을 본토로 데려와 살도록 하였는데, 이를 쇄환 정책이라고 한다. 이 정책은 조선 정부가 왜구의 침입 등을 우려해 채택한 도서정책의 하나 로, 울릉도에 대한 영유권 포기를 의미한 것은 아니다. 조선 정부가 조선 초기부터 울릉도에 관리를 파견하여 울릉도에 개한 관할권을 지속적으로 행사한 것을 보아도 이를 잘 알 수 있 다.
여하튼 일본은 이를 악용하여 몰래 두 섬을 오가며 자원을 수탈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과 일본인 간의 충돌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이 섬의 영유권을 확실히 하기 위해 각국 정부 간의 외교분쟁, 즉 울릉도쟁계가 발생했다. 조선은 일본의 불법적 행위에 대해 강력히 경고하 고 동시에 일본이 이 두 섬에 불법적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공식적인 외교문서를 받아냈다. 이후 조선 정부는 울릉도와 독도에 무단으로 침입한 일본인을 수색하여 토벌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수토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영유권을 강화해 나간 것이다. 이 내용은 ‘울릉도 쟁계와 수토 정책’ 제목으로 정리돼 벽에 부착돼 있다.
독도 최초 주민인 최종덕(맨 오른쪽) 씨가 1884년에 독도에서 해녀 및 남성 일꾼들과 함께 찍은 사진. 출처= 독도박물관 별관
하지만 이러한 수토정책에도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수시로 드나들어 조선 정부는 울릉도에 다시 사람이 거주할 수 있도록 재개척을 시행한다. 재개척은 1883년 16호 54명의 조선인이 울 릉도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점차 인구가 늘어나 1887년이 되면 12개 마을 에 1,134명이 울릉도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울릉도 재개척이 이루어졌음에도 일본인들의 수탈이 계속되자 조선 정부는 1900년 10월 25일 「칙령 제41호」를 통해 울릉도와 죽도, 독도 등 일대의 부속 도서 모두를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통합하여 ‘울릉군’으로 승격시키고, 강원도 의 27번째 지방 관제로 편입시켜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만방에 알렸다. 그 당시의 「칙령 제 41호」 문건도 전시돼 있어 볼 수 있었다. 이 외 독도와 관련한 조선의 각종 문사와 일본의 문 서 등도 전시돼 있었다.
그리고 독도에 대한 명칭도 설명돼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독도’라는 이름은 1904년 일본 군함 ‘니타가’호의 항해 일지에서 처음으로 기록되었으며, 우리나라 문서 중에서는 1906 년 심흥택 울릉군수의 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독도’라는 이름은 울릉도 주민들이 부르던 ‘독섬’의 뜻을 취하여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독섬’은 ‘돌섬’의 사투리이다. 그 이전에는 다양 한 이름으로 독도가 문서와 지도상에 나타나 있다.
1962년 울릉도를 방문한 박정희(오른쪽에서 두 번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울릉군청에서 나오는 사진이 '울릉도에서 만나는 박정희 1962' 전시관에 부착돼 있다. 사진= 조해훈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일본이 불법적으로 침탈한 독도를 남한의 영토로 반환할 것을 결정하여 독도는 다시 우리의 품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독도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못한 일본의 끈질긴 로비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의 소유권에 대한 부분이 삭제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1952년 한국 초대 정부와 이승만 대통령은 해양주권보 호와 독도 영유권 강화를 위해 평화선을 선포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독도의용수비대와 독도경비대에 대한 자료와 영상도 좀 볼 수 있었다. 독도의용수비대에 대 한 구체적인 것은 ‘독도의용수비대 기념관’에서 보기로 했다. 독도경비대에 대한 설명도 벽에 부착돼 있었다. 이 내용에 따르면 대한민국 경찰은 1954년 7월 독도경비대를 창설, 독도의용 수비대로부터 독도경비 업무를 인수하였다. 초기 독도경비대는 독도의용수비대가 축적한 독도 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이어받기 위해 그들과 공동으로 경비 업무를 수행했으며, 독도 의용수비대원 중 9명을 경찰로 특채하기도 하였다. 1996년에는 독도경비대와 제318전투경찰 대가 통합, 울릉경비대로 거듭났으며, 지금까지 울릉도 및 독도 해양경계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제주 해녀가 울릉도와 독도에 출어한 내용도 설명되어 있었다. 제주 해녀가 독도에 처음 출 어한 것은 1935년 일본인이 수산물 채취를 위해 그녀들을 고용하면서부터이다. 해방 이후에는 울릉도 어민들에게 고용되어 울릉도와 독도에 지속적으로 출어하였다. 일부 해녀는 혼인을 통 해 울릉도에 정착하여 어업활동을 이어갔다. 일본인에 의해 고용된 제주 해녀들의 사진도 전 시돼 있었다. 1941년 사진에는 일본인 어민들과 고용된 제주 해녀 4명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는 오래전 제주 해녀들의 이 사진들을 본 적이 있다. 이외 독도에 관한 여러 자 료를 보다가 필자의 일행은 독도박물관 앞에 있는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로 갔다.
전망대에 서 바다를 보며 시간을 보낸 후 독도박물관 별관에서 해설사를 다시 만나기로 했다. 전망대에 동도와 서도 등으로 구성된 독도의 모형이 전시돼 있었다. 전망대의 망원경으로 보 니 독도가 희미하게 보였다. 쉽게 보이지 않아 망원경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 겨우 독도를 볼 수 있었다. 망원경이 있는 곳에서 좀 더 높은 전망대로 가니 도동항 및 인근 동네가 잘 보였다.
그렇게 시간을 좀 보내다가 케이블카를 타고 독도박물관으로 다시 왔다. 본관 아래에 있는 별관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해설사를 또 만나 설명을 들었다. 이곳에는 최초의 독도 주민인 최종덕(1925~1987) 씨에 대한 특별전시실이었다. 특별전 이름은 ‘어부지용(漁父之勇)이었다. 필자는 최종덕 씨가 독도 주민이 되었다는 기사를 오래전 본 기억이 있다.
최 씨는 1925년 평안남도 순안에서 출생하여 1930년 가족과 함께 울릉도로 이주하였다. 1944년 주갑순과 혼인하여 교육 문제로 아내와 자녀들을 대구로 이주시켰다. 그는 어머니와 울릉도에 거주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는 많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1963년 3월 처음으로 독 도에 입도하였다. 그는 독도의 물골에 거주하면서 해녀 및 사공들과 5월까지 미역을 채취하였 다. 1965년에는 울릉군 수협 도동어촌계 독도 공동어장 채취권을 획득하여 독도에 본격적으로 출어하기 시작했다. 물골에 거주하며 해녀 5명과 사공 3명과 함께 3월부터 5월까지 미역 채 취 후 울릉도로 복귀하였다.
그는 1977년 7월경에 독도에 주민등록 이전 신청을 하여 1981년 10월 14일 독도 최초의 주 민으로 등록되었다. 하지만 1987년 태풍으로 인하여 파손된 서도(西島)집을 수리할 자재를 구 입할 목적으로 육지에 출타하였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필자의 일행은 최종덕 씨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보며 설명을 들은 후 오후 4시 35분경 별관을 나왔다. 이제 걸어 내려가 1962년 10월 11일, 박정희 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울릉도 도동항으로 들어와 1박2일 간 머문 옛 울릉군수 관사인 박정희 기념관으로 갔다. 일본식 건물 인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니 박 의장이 당시 울릉군청에서 박창규 울릉군수 등과 걸어 나오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기념관 벽에는 “울릉도를 이렇게 내팽개쳐 둘 거라면 차라리 일본에 팔 아버리지요.”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당시 울릉도 공무원이 박 의장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
해설사로부터 여러 이야기를 들으며 관사 내부를 둘러보았다. 관사 안에는 박 의장이 울릉군 수와 이일선 울릉도의원 병원장, 민기식 1군 사령관, 이맹기 해군참모총장 등과 관사에서 저 녁 식사를 하며 울릉군의 현황과 독도경비대의 열악한 환경, 울릉도 어민들의 어려운 사정 등을 들었다. 박 의장은 울릉도를 방문하고 돌아가 울릉도 종합개발계획을 수립했다. 계획에는 정기 여객 선 취항, 방파제와 접안시설 신설, 울릉도 일주도로 개설, 수력발전소 착공 등의 내용이었다. 총 187억 7천650만 원을 투입해 울릉도의 면모를 일신하는 대규모 건설사업이 1963년부터 추진됐다.
울릉도 주민들은 박 의장의 방문과 개발사업 추진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저동항 인근 관해정 에 방문기념비를 세웠다. 2015년 7월에는 박 의장이 묵었던 옛 울릉군수 관사를 ’울릉도에서 만나는 박정희 1962‘ 전시관으로 탈바꿈시켰다.
박정희 기념관에서 나와 숙소로 가 저녁 식사를 했다. 그런 다음 필자가 준비해 간 발효차를 마셨다. 4년 전에 만든 발효차였다. 밤에 녹차를 마시기에는 부담스러웠다. 그런 후 숙소 아래 쪽에 있는 도동항으로 가 산책을 했다.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잠을 잤다. 울릉도·독도 방문 1일 차는 이렇게 끝났다.
이튿날인 23일에는 아침 식사를 한 후 일주차(一株茶)를 마셨다. 이번 ‘독도 평화 33’ 일행과 독도행이 정해지자 필자는 그날 바로 차산(茶山)으로 올라가 한 그루 차나무에서 칫잎을 따와 덖어 일주차를 만들었다. 발효차가 아닌 덖음녹차이다. 차를 마신 후 일행은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타고 안용복 기념관으로 갔다. 여기서 또 다른 해 설사님을 만났다. 퇴직 후 아내의 고향인 울릉도에 와 문화해설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안용복기념관에 전시된 안용복 장군 모형. 사진= 조해훈
그러면 안용복이 누구인지 만나보자. 부산 동래 사람인 안용복(安龍福·생몰년 미상)은 1693 년과 1696년 두 차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들의 울릉도 불법침입을 문책하는 등 일본 정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안용복은 1693년(숙종 19) 울릉도에 가서 다른 어민들과 함께 고기잡이하다 일본 어민들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조선과 일본 간에 울릉도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이 시작되 었다. 1663년부터 1699년까지 조선과 일본이 울릉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분쟁을 벌였다. 위에 서 언급했듯이 이를 ‘울릉도 쟁계’라고 한다. 1693년 안용복의 피랍을 보고받은 에도막부는 쓰시마(대마도)번에 조선인을 송환하되 “조선인의 울릉도 출어를 금지시키길 바란다.”라는 요 지의 서계를 전하도록 했다. 조선 측의 회답 서계를 접한 쓰시마번은 ‘울릉도’라는 문구의 삭 제를 요청했다. 해당 문구의 삭제를 둘러싼 분규는 2년 동안 계속되었다. 쓰시마번이 조선과 의 교섭에 실패하자 에도막부는 돗토리번으로 하여금 울릉도에 관해 사실관계를 보고하게 하 였다.
조사 결과 에도막부는 울릉도를 조선 영토로 규정하여 1696년 1월 일본 어민들의 울릉도 도 해를 금지하는 ’다케시마 도해 금지령‘을 내렸다. 그리고 이 사실을 쓰시마번으로 하여금 조선 정부에 전하게 하였다. 그러나 쓰시마번은 조선 정부에 즉각 전하지 않았고 1696년 10월에 구두로 전했다. 일본인의 도해 금지 사실은 1697년 1월 말 조선 정부에 전해졌고, 일본 측은 이에 대한 서계의 회신을 요구했다. 이후 양국은 해당 서계의 문구를 두고 견해 차이를 보였으나, 1699년 10월 쓰시마번이 ‘다케시마 일건’의 결과를 막부에 보고함으로써 ‘울릉도 쟁계’는 종결되었다.
쟁계에 대한 설명이 길었지만 1차 도일(渡日)에서 2년간의 구금이 끝나고 풀려나온 안용복은 1696년에 울산에서 순천 송광사의 승려 뇌헌을 포섭하고 11명을 모집하여 다시 울릉도로 떠 났다. 이때 울릉도에 일본 어선이 아직도 여럿 있는 모습을 보고 다시 일본 어부들과 실랑이 를 벌이게 되고 결국에는 독도까지 도망가는 일본 어선을 쫓아간 끝에 일본으로 가서 자신을 울릉도와 자산도, 두 섬의 세금을 관장하는 장군인 ‘울릉우산양도감세장’ 벼슬이라고 자칭하고 다시 호키슈 태수를 만나 항의한 후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듬해에 막부는 대마도주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죽도 도해 금지령’을 내려 일본인의 울릉도 침입 및 월경을 금지하겠다고 통보하였다. 이 일로 안용복은 일본인을 쫓아낸 것은 잘한 일이나 무단 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죄로 귀양을 가 그 이후로 소식을 알 수 없게 됐다. 안용복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과 함께 관련 전시 자료를 보고 밖으로 나와 그의 사당 앞에 가 묵념을 한 후전망대에서 독도를 보았다. 죽도 너머로 육안으로 독도가 보였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울릉도에서 독도를 보았다.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이 1954년 독도에서 단체촬영한 사진이 독도의용수비대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사진= 조해훈
해설사님의 안내로 걸어서 이제는 ‘독도의용수비대 기념관’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오전 11시 52분이었다. 기념관에는 독도의용수비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6·25전쟁 중에 일본의 불법 독도 침입을 막아낸 순수 민간 조직이다. 울릉도의 청년들은 국가의 부름이나 요구 없이 독도의용수비대를 창설했으며 어떤 대가나 보수도 바라지 않고 3년 8개월 동안 독도에 주둔하며 목숨을 걸고 독도를 지켰다. 이는 전통적인 의병활동의 현대판 출현이다.'
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에 입도한 1953년 4월 20일 이후에도 수많은 일본의 불법적 침략 시도가 있었으며 특히 1954년에는 6차례의 충돌이 일어났다. 보잘 것 없는 무기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본에 대항해 치러진 여섯 차례의 기록은 독도가 우리 땅임을 대내외적으로 인식시키 고, 독도를 지켜내고자 하는 수호 의지를 굳건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한 예를 보자. 1954년 11월 21일 이른 아침 6시경 일본의 ‘헤쿠라’호(450톤 급)와 ‘오키’ 호(450톤 급)가 동도와 서도 방향에서 동시에 접하여 수비대와 격전이 벌어졌다. 가늠자 없는 박격포와 나무 대포의 포신을 돌리며 목숨을 건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 중 ‘헤쿠라’호가 수비 대의 박격포에 맞아 퇴각하면서 일본의 강제 진입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날의 승리를 기념하여 이 전투를 ’독도대첩‘으로 칭하고 있으며, 이후 일본은 독도에 무단 상륙을 시도하지 못 했다.
즉 독도의용수비대는 울릉도 주민으로 구성된 독도 수비대로서 1953~1956년까지 일본의 불 법침입을 막아내고 독도를 수호했다. 1956년 경찰청 소속인 독도경비대가 독도의용수비대의 독도경비 임무를 인계받아 독도를 수호하고 있으며, 해양경찰은 경비함을 배치하여 독도의 영 해를 수호하고 있다.
우산국박물관에 있는 신라시대 지증왕, 우산국을 신라에 복속시킨 신라 장수 이사부, 우산국 우해왕(오른쪽부터)의 인물 모형이 있다. 사진 가운데 있는 이는 필자. 사진= 권희경 시인
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 수호에 필요한 무기를 확보하는 과정에는 여러 어려움이 많았다. 수비대장 홍수칠(1929~1996)은 사비를 털어 6·25 전쟁 전후 대구 칠성시장과 부산 국제시장에 서 무기를 구입했다. 생활에 필요한 각종 장비는 울릉도민들의 협조를 받아 마련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6년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을 청와대에 초청해 훈포장을 하고 다과를 베풀며 그간의 노고를 격려했다.
울릉도 출생인 홍순칠 수비대장은 1949년 6월 15일 육군 독립기갑연대에 입대해 6·25전쟁 중인 1952년 7월 5일 부상으로 명예 제대한 후 1953년 4월 20일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해 독도 수호를 시작했다.
그러면 독도의 주민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독도 주민인 최종덕 씨가 사망한 후 1991년 11월 17일 김성도·김신열 부부가 전입하여 현재 독도 서도의 주민숙소(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 도안용복길 3)에서 생활하고 있다.
기념관에서 나온 우리 일행은 저도항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커피를 한잔 마신 후 버스 를 타고 우산국(于山國)박물관으로 갔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니 신라의 지증왕과 우산국을 정벌 한 이사부장군, 그리고 우산국 우해왕의 모형이 서 있었다. 박물관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전 시된 자료들을 둘러보았다. 우산국은 고려 덕종 1년(1032)에서 인종 19년(1141) 사이에 소멸 한 것으로 본다고 적혀있었다. 이후에 울릉도에 사람이 집단으로 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사』 1157년(의종 11년)에 보면 ‘왕이 듣기를 “동해 바다 가운데 우릉도가 있는데, 땅이 넓고 토지가 비옥하며 예전에는 고을이 있었다. 사람이 가히 살만하다”하므로, 명주도감창 전 중내급사 김유립을 보내어 보고 오게 했는데, 유립이 돌아와 아뢰기를 “암석이 많아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된다.”하였다. 마침내 의논이 그치게 되었다.(王聞, 東海中有羽陵島, 地廣土肥 舊有州縣. 可以居民. 溟州遣監倉殿中內給事金柔立往視, 柔立回奏, 土多巖石民不可遂寢, 其議· 왕문, 동해중유우릉도, 지광토비구유주현. 가이거빈. 명주견감창전중내급사김유립왕시, 유립회 주, 토다암석민불가수침, 기의)
울릉도에서 우산국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유적은 1957과 1963년 국립박물관의 조사 당시 섬 전역에 걸쳐 발견되었다. 현재는 언덕과 구릉지에 무덤 유적만 남아 있으며, 주거지 등 생활과 관련된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평지가 적어 생활 공간이 부족한 울릉도의 여건상 과거에 사람이 살던 공간은 현재도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으로 추정됐다.
박물관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적혀 있다. ‘청동기시대 혹은 철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울릉도. 1500년 전의 울릉도에는 동해바다를 배경으로 활발한 해상 활동을 했던 우산국이라는 고대 왕국이 존재했다. 우산국은 512년 이사부의 정벌로 신라에 복속되었으나 오히려 이 시기 부터 신라와의 교류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11세기 초 한반도에 몰아닥친 여진족의 침략으로 주민들이 하나둘 섬을 떠나면서 우산국의 자취가 점점 사라지기 전까지 우산국은 독특한 문화를 구축하며 동해 유일의 해상 세력으로 존재했다.’
우산국의 무덤 축조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울릉도에 남아 있는 고대의 무덤은 신라로부터 통치권을 인정받은 우산국 유력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남서동 11호분 등이 있다. 무덤은 해안가 언덕의 경사면에 만들어졌으며 돌을 쌓아 만들어 입구를 드러내고 있다. 1957년 발굴 당시만 해도 울릉도는 남서동·현포동 고분군 유적을 통해 역사 기록 속 우산국의 모습이 실존 함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으나 현재는 상당 부분 파괴되어 그 규모가 많이 줄어든 상황이다. 우산국의 중심지는 현포동이며, 나라라기보다는 마을일 가능성이 많다고 황용섭 박사는 말했다. 1917년에 촬영한 현포동 사진에 집과 주민들이 보인다. 집의 지붕에는 돌을 얹어놓았다. 바람에 지붕이 날아가지 않기 위함으로 추정된다고 직원은 설명했다. 필자는 ‘앞으로 박물관에 자료를 더 보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에서 도로로 내려와 버스를 기다렸다. 남양이라는 지역이었다. 1시간 넘게 버스를 기 다려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서 저녁을 해 먹은 후 차를 마셨다. 그런 다음 또 산책하러 나가 도동항의 이곳저곳을 구경하였다. 이틀 차인 23일은 이렇게 마쳤다. 모두 많이 피곤해하였다.
3일 차인 24일에는 다른 일정이 없었다. 울릉도로 가는 배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아침을 먹 은 후 인근 카페에서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신 후 택시를 타고 사동항으로 갔다. 포항으로 가는 배가 낮 12시 20분에 출항한다. 터미널에서 기다리다 배를 타고 포항에 도착하니 오후 6시 반쯤이었다, 배에서 내려 일행은 서로 인사를 한 후 헤어졌다. 장구진 부회장님과 권희경 시인, 정종애 시인은 서울로 출발하고, 황 박사님과 신애리 시인, 필자는 대구 현풍읍으로 향했다.
이렇게 하여 2박 3일간의 울릉도 탐방은 끝을 맺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