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의 철학은 필롤라오스를 거쳐 플라톤에게 계승된다. 왼쪽부터 피타고라스, 필롤라오스, 플라톤. 출처: 위키백과
피타고라스 사후 그의 학파 사도들은 크로톤보다 더 내륙 쪽에 있는 타렌툼(현재의 타란토)에 정착해서 피타고라스학파의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여기서 피타고라스보다 75년가량 뒤에 태어난 필롤라오스(Philolaos)가 피타고라스학파의 수에 관한 연구를 전수받았다고 합니다. 필로라오스는 신피타고라스주의자로 분류되며, 신피타고라스주의의 맥은 그의 제자들을 끝으로 끊깁니다.
하지만 피타고라스와 그의 사도들의 연구에 대한 필로라오스의 저술은 플라톤(Plato, BC 429~347)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피타고라스의 수 이론과 수학적 우주관이 필로라오스를 거쳐 플라톤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플라톤은 수학자가 아니었지만, 위대한 철학자로서 피타고라스학파의 수에 대한 철학을 계승했습니다.
플라톤이 아틀란티스와 우주론에 대해 쓴 책인 『티마이오스 Timaeus』는 피타고라스의 제자 이름을 따서 제목을 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피타고라스학파의 수학에 대한 플라톤의 열정 덕분에 기원전 4세기의 아테네는 세계적인 수학의 중심지가 되었지요. 플라톤은 ‘수학을 만든 자’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아카데미아는 고대 세계에서 탁월한 수학자인 에우독수스(Eudoxus, BC 408~355)와 유클리드 등을 배출했습니다.
플라톤은 아카데미아 정문 위에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고 합니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 플라톤의 '대화편'에는 두 정수의 비율로 나타낼 수 없는 수, 즉 √2와 같은 무리수의 발견으로 피타고라스학파의 수에 대한 숭배의 기반이 무너졌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자신들이 증명한 피타고라스 정리에 의해 대재난을 맞은 사실을 언급한 것입니다.
또 기하학을 독립된 분야로 다루는 작업이 당대에 순조롭게 진행되었음을 입증하는 구절들이 등장하는데, 그 작업은 에우클레이데스가 완성했다고 합니다.
플라톤과 제자들은 무리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하학을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그들은 연속적인 수의 양(무리수)을 직선 선분에 대응시킬 수 있음을 발견한 것이지요. √2라는 무리수를 수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선분으로는 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가로와 세로가 각각 1인 정사각형의 대각선 길이인 '제곱해서 2인 수'를 표시할 수 없지만 종이 위에 그릴 수는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제자 가운데 그 유명한 『기하학 원론 The Elements』(Stoikheia의 영역본 제목의 약칭, 성경 다음으로 많이 번역 출판되었다고 한다.)을 쓴 유클리드 (Euclid, BC 330~275, 본명은 Eucleides)의 연구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연구를 통해 연속적인 수의 양은 직선 선분(line segments)과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또 연속적인 양과 수가 이분됨으로써 수학은 새로운 접근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을 담고 있는 『기하학 원론』은 2차 방정식의 해법에도 대수적인 방식이 아니라 직사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방식을 응용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는 여전히 수가 군림하고 있었지만, 이제 수는 기하학이라는 더 넓은 맥락에서 연구되었습니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공화국』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산수는 추상적인 수에 대해 생각하도록 부추김으로써, 아주 커다란 정신 고양의 효과를 지니고 있다.”
수학사에서 무한에 대한 이해를 진전시킨 것도 이때쯤입니다. 플라톤은 저서 『파르메니데스』에서 무한소급에 관한 논의를 시작합니다.
"과연 개별자의 수만큼 이데아의 수가 존재하는가? 개별적 사물과 그것의 이데아가 ‘닮음’의 관계에 있을 때 이 ‘닮음’을 말하기 위해 또 다른 ‘닮음’을 설정해야 하는 무한 소급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
플라톤이 무한에 대한 이해를 진전시킨 제자들을 배출한 것은 수학사에 가장 큰 공헌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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