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서상균]

제1장 뜻밖의 귀촌(9)

이튿날도 일찌감치 등말리로 올라온 열찬씨가 금찬씨랑 아예 밥과 김치, 생선까지 한 마리 구운 도시락을 사와 밭둑에서 먹고 나서 금찬씨를 보낸 뒤 소나무그늘에 스티로폼을 깔고 누워 막걸리냄새를 푹푹 풍기고 한숨을 잔 뒤 시간을 보니 오후 세시였다. 며칠이나 걸려 대나무뿌리와 소나무등걸, 커다란 돌덩이를 이리저리 치우고 한 20평 새로운 땅을 만들어 들깨라도 심기 위해 바닥의 잡초와 돌을 빼내고 아쉬운 데로 밭의 형태를 갖춘 땅에 7월초 들깨를 심기 전에 우선 열무나 한번 갈아먹으려 삽질을 시작하는데

“외삼촌!”

키 작은 여자가 하나 달랑달랑 올라오는데 영판 금찬씨를 닮았으니 보나마나 현주씨였다.

“현주 오나?”

일손을 멈추고 맞이하는데

“은진이 아빠!”

자동차 키를 들고 한참 뒤에 뒤 따라오던 키가 큰 사내를 가리키며

“외삼촌한테 인사드려야지. 인자 같이 집 지어서 이웃에 살 건데.”
하자

“안녕하세요?”

머리만 꾸뻑하는데

“그래 유 서방, 오래만이네.”

악수를 하면서 찬찬이 들여다보니 눈빛이 선하고 아주 착해보였다.

“이 사람아, 자네 처삼촌 벌초란 이야기 들었지?”

“예.”

“나는 처삼촌보다 더 먼 처외삼촌이다. 그렇지?”

“예.”

“만약 처삼촌 벌초하듯이 날 대하면 그날이 죽는 날인줄 알아.”

“아, 예.”

농담으로 던진 말에 화들짝 놀라는 품이 재미있어

“그럼 하늘같은 처삼촌이 혼자 땅을 파게 두고 보지는 않을 거고 저기 삽 쫌 가져와.”

“아, 예.”

유 서방이 망설이는데

“삼촌, 우리 유서방은 곱게 자라 삽질을 한 번도 안 해본 모양인데.”

“뭐라고? 자네 방위출신이가? 군에서 빵카작업, 제초작업도 한 번 안 해봤나?”

“아, 예에.”

얼굴이 벌개진 유서방을 보고

“자, 삽질은 교육도 필요 없는 인간의 기본 동작이다. 내 하는 거 보고 니도 저쪽 땅을 같이 파나간다. 실시!”

열찬씨가 삽질을 시작하자 유서방도 따라 하는데 자꾸 발이 미끄러지거나 삽이 돌에 받혀 튀면서 숨소리가 가쁘고 얼굴이 빨개지자

“보소, 아진이아빠. 이리 나오소. 차라리 내가 하지.”

현주가씨 나서는데

“봐라! 남녀가 유별한데 니 지금 외삼촌 앞에서 뭐하는 거고?”

일부러 크게 소리치고 현주를 쏘아보자

“아, 예에.”

유 서방이 다시 삽질을 시작했다. 한참이나 걸려 자기 앞의 땅을 다 판 열찬씨가 유 서방 앞의 땅을 마주보고 파 들어가 일을 마치고

“고생했다. 앞으로 촌에서 살려면 농사는 필수다. 예행연습 한 것으로 해라.”

하고 짐을 꾸리니

“외삼촌, 같이 내려갑시다. 은진이 올 시간이 다 되서 내려가야 되는데 버스정류소앞에 까지 모실 게요.”

“그래 알았다.”

별 대화 없이 내려오는데 운전석의 유서방이 자꾸 뒷좌석을 힐끗거리는 것 같아

“유 서방, 어데 통닭집 앞에서 차를 대라.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냥이야 헤어지겠나?”

하니 현주가 언양읍 지리를 잘 아는지 경주 쪽 4거리에서 남천내 쪽으로 꺾으니 바로 상찬씨 집앞 골목으로 동창 복기철의 자전거방 앞에 작은 치킨집으로 안내하는데

“어서 오세요.”

현주와 안면이 있는 듯 반갑게 맞이한 주인이 테이블을 닦고 술잔과 소금 접시를 세팅하며

“대낮이니 맥주나 한 컵씩.”

하며 생맥주 3,000cc하나를 들고 오자

“아저씨 소주도 한 병!”

현주가 맥주 컵에 소주를 조금씩 붓더니

“은진이아빠! 아빠는 운전하니까 조금만 먹어.”

하고 셋이 건배를 유도하고 금방 탁 털어 넣는 현주를 보고

“야, 좀 천천히 먹지. 아직 안주도 안 나오는데.”

하다 멈칫하는 모습이 딱해

“현주 니는 운전 안 하나?”

“함더.”

“그라면 니가 조금만 먹고 운전을 해야지. 그래야 내가 유서방하고 아재비조카끼리 술 한 잔 하지.”

“아, 아입니더. 술이 제가 술이 약해서.”

덩치는 태산만한 유 서방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치킨이 나와 술잔이 오고가는데 소주를 하나 더 시킨 현주가 자꾸 자기 맥주잔에 소주를 붓는 것이 신경이 쓰여 술 마시는 속도를 줄이는데

“아이구, 우리 은진이도 통닭 좋아하는데...”

맥주 컵을 탁자에 놓으며 현주씨가 중얼거리는 지라

“아저씨, 치킨하나 더 튀기소.”

하며 열찬씨가 자기 잔에 소주를 조금 타려고 보니 벌써 빈 병이었다. 하나 더 시키려다 말고

“오늘은 이 정도로 하지.”

하고 일어서려는데

“외삼촌, 3,000cc 딱 한 잔 만 더!”

빤히 올려다보는 현주씨를 보며

“안 돼. 여기 500cc하나만 더!”

배가 큰 지 벌써 치킨의 등뼈까지 다 발라먹은 유서방을 보며

“아저씨, 여기 김치 좀!”

조카딸의 모습에서 죽은 매형 수진씨의 얼굴이 떠올라 씁쓸해진 열찬씨가 카운터로 가서 카드를 빼는데

“외삼촌, 계산은 내가.”

현주씨가 주춤주춤 다가오는데

“마 됐다.”

뿌리치고 자리에 돌아와 남은 잔을 들며

“자, 니도 대강해라. 은진이 기다린다.”

겨우 수습해서 나오면서

“너거는 여기서 바로 고속도로 올리라. 나는 정류소까지 걸어서 간다.”

떠나는 차를 보며 손을 흔들다

(이거 참 예사 일이 아닌데...)

열찬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림=서상균]

구포의 순란씨가 열찬씨네 명촌집 건축이 잘 되어 가는지 또 위치가 작천정 지나 간월에서 석남사 가는 중간이라고는 하지만 도무지 모르겠다고 한번 같이 가보면 안 되겠느냐는 연락을 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할마시 궁금해서 잠이 안 왔을 긴데 우째 이제 까지 말을 참았는지 내가 다 신기했지.”

영순씨가 하하 웃으며 열찬씨에게 언젠가 한 번은 어머니를 명촌에 데리고 가서 현장을 보여드려야 그 끝없는 호기심과 궁금증이 해결되어 잠을 잘 잘 것이라고 했다.

하긴 젊은 시절 자녀들과 함께 작천정 정자 위쪽에서 캠핑을 하며 하도 등이 배겨 ‘여기 자다가 곱추 고치겠다.’고 아우성을 지른 일과 간월계곡에 수박을 들고 가서 발을 담그고 백숙을 시켜먹고 온 일 외에는 같은 상북면인 소호에서 나고 자란 순란씨가 앞으로 큰딸이 이사 갈지도 모르는 명촌리가 어딘지 모르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 열찬씨가

“홍여사, 작천정으로 해서 가는 길보다는 이모가 살고 있는 천전을 통해서 가야 장모님이 알기 쉬울 걸.”

해서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벗어나 새로 생긴 부로산터널을 넘어가면 바로 천전마을이지만 일부러 장모 순란씨가 많이 다녔을 언양4거리를 통해 언양성당과 옹기굴이 있는 울산-밀양간 국도를 통해 상북면 입구인 부리시봇디미에 이르러

“장모님, 여가 어딘줄 알겠지요?”

“알고말고. 어릴 때 언양장 구경한다고 아침 일찍 나서서 외양만디 넘어서 삽재, 궁근정 지나 장성, 궁평, 산전, 향산, 천전 마실까지 근 3시간을 걸어서 부리시봇디미를 지나면 바로 언양읍이 보였지.”

“그러면 다리 건너 천전마실도 알겠네요.”

“옛날에 언니가 천전에 시집가서 살 때 너거 장인이 속아서 소를 사주는 바람에 몇 번 가서 알지만 그 후로 언니도 양정으로 이사 와서 살다가 늙어서 다시 들어가고는 한두 번 가봤지만 부리시봇디미 다리 건너면 천전마실이라는 건 알아도 근근이 천전마실 경로당이나 알까 집은 찾지 못 한다.”

하는데 마침 천전리 마을회관 앞을 지나는 지라

“저게 경로당이 있네. 이모가 있을라나?”

하는 영순씨의 말에

“그만 가자. 빈손으로 우째 가노?”

“거기 아이라 경로당 뒤쪽이라면서 이모 집이?”

“새 집 지은 데는 골목을 한참 걸어가야 된다. 그라고 앞전에 살던 산위에 집은 찾아질 거다.”

“그거는 화묵이오빠가 팔아묵었다 아이가?”

“그렇지 뭐.”

순란씨가 그만 입을 닫았다. 천전에서 농사를 지으며 그 말썽 많은 홍서방네 소를 키우며 살아도 살림은 늘 쪼들리는 데다 장남이 중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되자 촌구석에 살다가는 아들 넷을 다 제대로 가르치지 못 하겠다며 이미 세 명의 처남과 처형, 처제 등 다섯 집의 처가식구가 있는 양정으로 이사해 박스공장을 했지만 영업도 부진한데다 한꺼번에 4남 1녀를 공부시키느라 처이모 필란씨가 부산 변두리 남의 집 콩밭을 매러 다니기까지 하며 간신히 버텼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러자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도시에 진출해서 나름대로 힘들게 적응한 각양각색의 4남매를 두고 환갑진갑이 다 지난 나이에 두 부부만 고향으로 돌아와 종손의 지위를 이용해서 문중산에 작은 집을 짓고 밭을 일구며 살았다. 김씨네가 기본으로 양반인데다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는지 누구하나 빈손 들고 들어온 종손을 타박하지 않고 우선 양도(糧道)나 하라고 논밭과 채전밭도 빌려주고 필란씨가 당시 처음 생긴 공공근로사업에 나가면서 간신히 적응했다. 그렇게 시골에 집이 생기자 장남 화룡씨가 부지런히 드나들며 고추친구들을 만나고 앞 도랑까지 전기 줄을 끌어넣어 미꾸라지를 잡는데 재미를 붙여 형제계원들을 초청 하룻밤을 묵고 온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억척같은 부부의 욕심과 달리 네 명의 아들 중 맏이인 화룡씨는 화물차지입차주로 두 아들을 키우며 그럭저럭 살고 차남 화묵씨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대다 어디서 교장선생님의 딸이라는 훤칠한 외모에 말씨나 행동거지가 다 번듯한 아내를 만나 아이 둘을 두었으나 일정한 직업도 없이 늘 술이나 먹고 다니며 큰소리를 탕탕 치다 뒷감당도 못해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서 별거 중이었다.

그리고 셋째 아들 화영씨는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모를 정도로 늘 밖으로 나돌다 스무 다섯이 되는 어느 날 문득 배가 남산만한 처녀하나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감기에 걸려 한 며칠 앓다가 슬며시 죽어버렸다. 과로가 겹쳐 패혈증으로 죽은 것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이윽고 며느리격인 처녀가 몸을 풀었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중 산모가 어느 날 사라졌고 아이는 시설에다 맡겼다.

다행히 막내아들 화준이는 머리가 좋아 부산공대 조선과를 다녔는데 가정교사를 지낸 집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졸업을 해서 거제도의 커다란 조선소에 다니면서 자신이 가르치던 여학생과 결혼해 순조롭게 승진을 거듭 커다란 조선회사의 이사가 되어있었고 외동딸 화숙씨는 합판가게를 하는 성서방씨와 결혼해서 무던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거처도 일정하지 않은데다 그간 인쇄업계를 전전하며 겨우겨우 살아가던 둘째 하중씨가 그래도 부모라고 천전마을로 찾아와서 외딴집이라 밤이 되면 무섬기가 도는 집에서 부모랑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고 해서 필란씨가

“옛 말에 눈먼 자식이 효자라고 하더니 지 앞가림도 못 하는 우리 화묵이가 다 늙은 부모를 지켜주네.”

흡족하게 웃으며 안 그래도 제대로 밥이나 먹고 다니는지 늘 마음에 걸리던 자식이라 열심히 챙겨 먹여 살이 통통하게 올랐는데 어느 날 또 변통이 났다. 부산에 잠시 다녀온다고 나간 화중씨가 무슨 재주로 자신들이 사는 문중 땅을 팔아먹고 도망쳐 집과 땅을 비워주어야 했다. 문중 땅이 사라진 것도 그렇지만 명색 종손이 길바닥에 나앉을 판이 되자 형제들이 주선해서 산 아래의 빈 집을 하나 구해 대충 수리를 해서 살게 한 것이 지금 사는 집이었다.

“참 희한하제. 우리 형부나 언니나 욕심하나는 부산, 언양에 덮을 사람이 없는데 사는 것은 늘 그 모양이니...”

혼잣말을 하던 순란씨가

“나중에 집 지으면 안 알릴 수도 없으니 그 때 언니 집에가서 이야기 하고 같이 집 구경이나 오든지.”

하는 사이에 타가 등말리로 접어들자

“조용하고 경치가 좋네. 가서방 글쓰기도 좋겠고.”

하고 4거리 화식씨 집을 지나 빗금으로 도자기집을 지나 현장에 도착하자

“아이구, 실란시럽구나. 정신이 없어서 하나도 모리겠네.”

대를 베어내느라 한창 어지러운 언덕과 그 아래 울산 임씨 땅의 황토언덕을 바라보며

“그래도 집을 앉히고 정리가 되면 참하겠지. 그런데 이 산골에 웬 도로는 이래 넓고 훤하노?”

하며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린 열찬씨의 농기구와 거름더미를 바라보는데

“널찍하이 좋지요. ‘신작로 넓어서 길 가기 좋고요 전깃불 밝아서 님 보기 좋다,’라고 장모님, 여 좀 앉으소.”

“그라까?”

셋이 하얗게 빛나는 포장도로 위에 합판조각하나를 놓고 앉았는데

“동생 왔나? 올캐도 오고.”

마치 자동차가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금찬씨가 나타나며“

“아이구, 사장어른 안녕하십니까?”

“예. 오랜 만입니더. 사돈.”

결혼식, 출판기념회, 퇴임식등에서 만나 안면이 있는 두 사람이 악수가 아닌 손을 마주잡고 흔드는 인사를 하더니

“참 천전에 필란씨가 올캐이모라 캤지요? 필란씨는 잘 있는가요?”

“잘 있겠지요. 요새 통 못 봐서.”

“인지 동생이 이사 오면 좋겠심더. 딸네집에 와서 언니집에도 놀러가고...”

“예. 뭐 그렇지요.”

금찬씨와 필란씨는 같이 공공근로사업장에 다녔는데 97년 5월 열찬씨의 출판기념회가 언양초등학교에서 열렸을 때 입구에서 딱 마주치자

“우짜꼬? 필란이아지매는 여 우짠 일잉교?”

“내사 가열찬이가 조카사우 아이가? 내가 처이모 되지. 그런데 금찬이아지매는?”

“우리 동생아잉교? 내가 업어 키운 열찬이동생.”

신이 나는 필란씨를 단숨에 제압했다. 그 뒤로 금찬씨를 만나면

“아이고 너거 처이모는 힘은 장산데 공공근로만 나오면 비실비실 다 죽어가다가 일만 마치면 또 힘이 펄펄해서 다문 길가에 쑥이라도 한줌 더 뜯어갈라고 난리가 보통이 아니지.”

하거나

“너거 시누 금찬씨는 사람이 다부지고 손끝도 야문데 당최 성질머리가 앙발고라 남이 무슨 말을 하면 말이 땅에 떨어져 흙고물 묻을 까봐 한 마디도 안 빼고 받아 올려 당할 사람이 없다.”

서로가 절대로 좋은 말은 않는 것이 출판기념회에서 만나기 전에는 만만찮은 적수였던 모양이었다.

“우짜꼬? 밥 땐데 우리 며느리는 어데 나가고 나는 정지 출입 안 한지가 십년도 넘고...”

자기 집 바로 앞에 온 사돈에게 예의가 아니라든 듯 금찬씨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형님도 타이소. 온 김에 같이 밥이나 먹지요.”

“아이다. 나는 괜찮다. 어서 사돈 모시고 가거라.”

“마 타라카면 타소. 나중에 대다주면 될 거 아이가?”

열찬씨의 성화에 차에 탄 금찬씨와 넷이 언양장터의 곰탕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누부야, 옛날에 묵던 소피국물 맛이 안 나제?”

“그래. 신평 큰 새이 살았을 때 동생 니가 와서 소피국물 묵으러 가면 새이가 괜히 신이 나서 아는 사람마다 저 사람이 부산서 공무원 하는 내 동생이라고 자랑을 하고...”

금방 목소리가 울먹거리더니

“그 언니도 죽고 나는 자식만 많았지 동생 국밥 한 그륵 사줄 형편도 안 되고.”

“마 됐심더. 잔주코 잡숫기나 하소.”

버럭 성을 내던 열찬씨가 미안한 생각이 들어

“그래도 그 때 소피국물 맛이 좋았지. 간혹 쇳바닥고기, 귀고기도 나오고.”

말을 돌리자

“맞다. 소 잡는 집 김밍도, 그 집 할매가 살았을 때까지는 소피국물이고 아들이 하면서는 소머리곰탕집이지.”
“그래 내 동기 김복림이라고 그 집 딸이 부산 교대 앞에서 국밥집을 하는데 그 맛도 옛날 맛은 아이다.”

하며 식사를 마치고 종이컵의 커피도 마시고 밖으로 나와

“형님, 타이소.”

“아이다. 차 시간 다 됐다. 10분만 있으면 간월 가는 차 온다.”

하고 금찬씨가 떠나고 차가 고속도로에 오르자

“당신은 공무원 40년이라고 큰 소리만 탕탕 치면서 지 집 짓는 일은 우째 이래 못 하요?”

뭐에 마음이 상했는지 잔뜩 볼멘소리가

“와? 내가 뭐를 잘못 했나?”

“건축허가는 나기는 나는 거요? 안 그래도 돈 맞추느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사논 땅에 오면 그거라고 보고 기분이 좋아야하는데 올 때마다 마음만 더 상하니까 그렇지.”

“글쎄. 세상이 어데 내 맘 하고 같나? 설계사도 그렇고 길 공사하는 토목회사도 그렇고 그저 눈만 뜨면 사람을 속일라 안 카나?”

“그러니까 팔자에 없는 집을 짓기는 와 짓소?”

“아, 그거야 나는 컨테이너 놓을라 캤는데 당신이 며느리도 오고 손녀도 많다고 수세식 화장실 넣자고 집 짓자고 한 햇나?”

“그놈의 오리 농막만 해도 지낼 만은 한데 그놈의 땅주인여자가 하도 성질이 까달시럽어서...”

“그기 어데 내 잘못이가? 내 하고는 잘 지내는데 당신이 성질이 너무 칼클어서 참지를 못해 그렇지?”

“당신이사 글을 쓰네, 시를 쓰네 하니 선생님소리 들어가며 존경받지만 어데 글쟁이마누라까지 존경하나 괜히 파출부 대하듯 하지.”

“나도 마찬가지지. 내보다 열 살 젊은 제 서방은 제껴 두고 내 보고는 예초기를 매달라 농약을 쳐 달라, 풀을 베어 달라 난리버꾸통이니 말이야.”

“그러니까 그 멀고 황량한 오리농장에는 와 가능가 말이요? 그까짓 재미로 짓는 농사 안 지으면 사람이 죽나?‘

“뭐라 카노? 교장선생님 하고 싸우고 당장 짐 옮길 데도 없자 당신이 먼저 오리 땅 알아봤다 아이가?”

“그래도 농사짓고 안 짓고는 당신이 결정했다 아이가?”

“그렇지. 농사지을 사람이 흙을 만져보고 보슬보슬 땅만 맘에 들면 오케이지.”

“아니, 물망골서 그래 당했으면 사람부터 봐야지?”

“구서동에서도 처음부터 그랬나? 두 노인네가 치매가 와서 그렇지.”

“그래도 교장선생 땅 부치자고 처음 말한 사람이 누군데?”

“아니 오각정 물이 좋고 정자도 같이 쓰며 커피라도 같이 끓여먹자고 처음 접근한 사람은 당신 아이가?”

“아이구 내사 모르겠다.”

냉랭해진 분위기에

“이 사람들이 점심 잘 묵고 와 이라노? 이서방 장모 체면 봐서 좀 참으소.”

“예. 죄송합니다.”

잠잠하게 달리다 자동차가 양산을 지나 부산경계로 넘어올 때 쯤

“건축허가가 그래 힘든 거요?”

“기존 택지가 아닌 전답이라서 그렇지.”

“그래 언제쯤에 허가가 나요?”
“내가 아나? 임야형상변경허가 하고 도로사용허가가 나야 허가가 나지.”

“그 기 다 무슨 말이요?”

“설명한다고 당신이 아나? 전문가들도 깜빡깜빡하는데.”

“당신 시방 엄마 앞에서 날 무시하는 거요?”

“무슨 소리. 힘들면 서로가 걱정하고 위로해야 되는데 당신은 와 자꾸 내만 공격하고 당신은 쏙 빠지노?”

“내가 뭐를?”

“교장선생이 치매가 와서 변통이 난 걸 맨 날 내가 뭘 잘못한 것처럼 몰아 부치고 또...”

“또?”

“직장에서 내가 힘들어하면 그냥 위로해주면 될 것을 꼭 내가 무얼 잘 못해서 그렇고 성격이 더러워서 그렇다고 조목조목 따져서 나를 더 힘들게 하고.”

“...”

“부부가 힘들 땔수록 서로 위로해야지. 당신이 영주엄마한테 돈을 떼이고 할 때...”

“마 됐소. 골치 아픈 이야기는 말라꼬 또 꺼내요?”

“그러니까 서로 남의 기분도 좀 살피고 서로 위로하면서 살자는 거지.”

“그거사 마음 넓은 당신이나 하는 거지.”

“당신 자꾸 이래 살 끼가? 장모님 계시는데?”

하며 차가 톨게이트를 벗어나자

“봐라. 내 지하철 타는데 세아도라.”

순란씨가 금방이라도 내릴 태세였다.

“아임니더. 장모님, 영서, 현서도 보고 저녁 먹고 가셔야죠?”

열찬씨가 황황히 말리는데

“아이구, 할마시도 또 한 성질하제? 그 판에 또 성질을 내 놓제?”

“야야, 니는 내 같으면 속 편하겠나?”

“알겠심더, 엄마. 그라고 당신한테도 미안하요.”

“아, 알았다. 나도 그렇지 뭐.”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