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Ohmy News ]

신들의 조문

이 광

독경차 들른 스님 흰 고무신 다녀간 뒤

한둘 또는 삼삼오오 검정 구두 출두한다 번지르르 광나거나 안색 거의 잃었거나 고만고만하면서도 조금씩은 다른 면면 줄지어 들어서니 신발장은 만원이다 갖은 고초 겪은 티가 몸에 밴 안전화는 맨 구석이 편한 듯 모로 앉아 쉬고 있고 군화에 조깅화에 킬힐도 등장하고 뒤를 잇는 롱부츠는 제 알아서 큰절한다 돼지수육 추가주문 배달 온 스니커즈 바닥에 널린 신발 가로질러 건너가고 2호실 갈건을 쓴 상주의 슬리퍼가 1호실 꽉 찬 신발이 부러운지 쳐다본다

온전히 신을 벗은 이
신의 부름 받은 날

사설시조를 한 편 올립니다. 사설시조는 조선 후기 주로 서민 계층에서 세간의 삶과 정서를 담아내며 유행하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도 꾸준히 창작되고 있지요. 평시조의 제한된 공간과는 달리 입말을 맘껏 풀어낼 수 있는 품이 너른 형식입니다.

제목이 ‘신들의 조문’인데 여기서 신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그런 신들이 아닙니다. 고무신에서부터 롱부츠까지 다양한 신발들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신발은 조문객들의 신분을 대변합니다. 신발장은 만원이고 입구 바닥에도 다양한 신발들이 널린 걸 보면 많은 사람들이 조문 왔음을 짐작하게 하네요. 중장 끝부분 1호실 꽉 찬 신발이 부러운지 쳐다보는 2호실 슬리퍼의 모습은 마지막 가는 길에도 신분의 격차 같은 게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종장에서 화자가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요. ‘온전히 신을 벗은 이’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신을 벗었다는 말이며 나아가 몸身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의미합니다. 후구 ‘신의 부름’에서 드디어 절대자인 신神이 등장하는군요. 이 세상에 나와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게 신의 뜻이라면 우리의 삶은 결코 무의미한 게 아닙니다. 우주를 주관하는 신의 부름에 응하는 생명은 영원 속에서 하나의 역사적 존재로 실존하는 것입니다.

이광 시인

◇이광 시인 :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부산시조 작품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집 《당신, 원본인가요》, 《소리가 강을 건넌다》, 《바람이 사람 같다》, 현대시조 100인선 《시장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