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제트를 내품는 블랙홀. 블래홀 주변의 가스와 먼지가 내뿜는 빛은 은하의 모든 별보다 더 밝다. 출처: NASA/Goddard Space Flight Center Conceptual Image Lab
블랙홀은 이름만큼이나 신비로운 존재이다. 일반인은 물론 물리학자들에게도 여전히 그렇다. 블랙홀은 칼 슈바르츠실트에 의해 처음 예견된 이후 100년 동안 우리에게 여러 차례 모습과 특징을 바꾸었다.
블랙홀은 처음엔 어둠의 심연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무시무시한 존재로 알려졌다. 그러다가 블랙홀은 스티븐 호킹에 의해 빛을 내뿜는, 이른바 호킹 복사(Hawking radiation)를 하고 그 결과 증발해버리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호킹 복사 이론에 의하면 정보 손실이 불가피하다. 이는 양자역학의 원리에 어긋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나온 이론이 ‘블랙홀 방화벽(Black hole firewall)’이다. 하지만 이는 일반상대성이론의 등가원리와 배치된다. 그래서 블랙홀은 ‘블랙홀 방화벽 역설’을 지닌 채 최근까지 물리학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뉴사이언티스트에 따르면 최근 미국 칼텍(Caltech)의 시언 캐롤(Sean Carroll) 교수팀이 양자역학의 다세계 해석(many world interpretation)으로 이 같은 블랙홀 역설을 풀 수 있음을 보였다.
1974년 스티븐 호킹은 ‘호킹 복사’ 이론을 발표했다. 블랙홀이 ‘열복사(thermal radiation)’를 내뿜고 결국 증발해버린다는 내용이다. 그러면 블랙홀은 물질에 담겨 있던 정보를 파괴할 게 틀림없다. 이는 ‘정보는 창조되거나 파괴될 수 없다’는 양자역학의 기본규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보 역설(information paradox)이다.
2013년 캘리포니아대학(산타 바바라, UCS)의 물리학자 폴친스키 등은 “호킹 복사는 정보를 보존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호킹 복사’의 경우 복사가 블랙홀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에 격렬한 에너지 방화벽(firewall)을 형성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엄청난 에너지의 방화벽은 양자 얽힘 현상과 양자장론에 따른 결과이다.
그러나 이 같은 방화벽은 일반상대성이론에 위배된다.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사건의 지평선 근처 시공간은 부드럽게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격렬한 에너지 화염 같은 것은 없어야만 한다. UCS의 폴친스키 등은 호킹 복사의 에너지 손실 문제를 해결하려다 새로운 ‘블랙홀 방화벽 역설(black hole firewall paradox)’을 만들어낸 것이다.
칼텍의 캐롤 교수팀은 블랙홀의 진화 자체를 다세계 해석의 맥락에서 이해하면 블랙홀의 역설은 풀린다고 주장했다.
사전배포 논문에 따르면, 우주의 양자 상태는 ‘전역파동함(global wave function)’로 기술된다. 한 세계의 물리적 사건은 다양한 가능성(파동함수)의 중첩으로 이뤄져 있는데,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관측에 의해 하나의 가능성이 결과로 도출되는 즉시 나머지 가능성을 지닌 파동함수는 모두 붕괴한다. 그러나 코펜하겐 해석의 대안으로 제시된 다세계 해석에 따르면 나머지 파동함수도 붕괴되지 않는다.
각 파동함수는 저마다 ‘가지 세계(branch world)'를 형성해 진화한다. ‘슈뢰딩거 고양이’의 경우 상자를 열었을 때 ‘산 고양이 세계’와 ‘죽은 고양이 세계’ 중 어느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산 고양이 세계’와 ‘죽은 고양이 세계’가 각각 독자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캐롤 교수팀은 이런 사고 방식으로 블랙홀 형성과 블랙홀 증발(호킹 복사에 의한)이 파동함수의 각각 분기된 가지 세계로 봤다. 블랙홀 형성과 증발이라는 두 과정은 다른 가능성의 결과를 가진 양자역학적 과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블랙홀을 관측하던 한 관측자는 분기점에서 각 가지마다 한 사람씩, 둘로 나뉘어진다.
캐롤 교수팀은 이런 발상으로 각기 갈라진 가지 세계에 있는 관측자의 관점에서 시공간은 일반상대성이론에 어긋나지 않으며, 블랙홀은 방화벽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입증했다.
그렇다면 방화벽을 갖지 않는다면, ‘정보 손실(information loss)'은 불가피한 것일까? 캐롤 교수팀의 에이단 채트윈-데이비스는 “아니다 ’정보 손실‘은 없다”고 했다. 방화벽 없어도 호킹 복사에 따른 정보 손실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블랙홀 호킹 복사(왼쪽)와 블랙홀 방화벽 개념도. 출처:뉴사이언티스트
채트윈-데이비스는 그 이유에 대해 “정보보존 원리는 전역파동함수에 적용되는 것으로 각 가지 세계에 적용되는 원리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파동함수가 시간에 따라 변하거나 진화하는 방식은 '일원적(unitary)'이라 불린다. 일원적 진화는 정보의 손실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유일하게 전역파동함수만이 일원적으로 진화한다. 각 가지 파동함수는 정보 보존 조건을 만족할 필요가 없다.
채트윈-데이비스는 “만약 당신이 항상 파동함수의 한 가지에 올라 앉아 있다면 당신이 속한 그 가지 세계가 정보 손실이 없는 일원적 세계이어야 한다고 제한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정보는 전역파동함수의 모든 가지를 통합했을 경우에는 보존되지만 그 파동함수의 각 가지에서는 보존될 필요가 없다.
결론적으로 연구팀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정보를 잃지 않으면서 격렬한 에너지의 방화벽이 없는 ‘사건의 지평선’을 가진 블랙홀이 존재할 수 있다. 호킹 복사의 정보손실 문제와 이를 해결하려고 등장한 블랙홀 방화벽 역설이 단번에 해결된 것이다.
한편 캘리포니아대학(버컬리, UCB)의 야스노리 노무라(Yasunori Nomura)도 독립적으로 이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다세계 해석을 통한 접근방식으로 블랙홀 역설을 풀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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