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 칼럼】‘지금, 여기’와 ‘다음, 저기’

조송원 승인 2024.02.10 12:10 의견 0

사람은 배신하는 동물이다. 일상의 자잘한 다툼이나 송사(訟事)의 씨앗은 대체로 ‘믿음을 저버린 행위’이다. 크게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대사건의 배후에도 배신이 어김없이 자리한다.

“브루투스, 너마저?” 로마 황제 카이사르가 친구 브루투스를 포함한 무리에게 암상당하면서, 브루투스를 보면서 외쳤다.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는 요동을 정벌을 하려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에 도착했으나, 얼마지 않아 회군을 감행한다. ‘위화도 회군’이다.

“왜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에 대항하여 그를 죽였는지 그 이유를 요구한다면, 이것이 저의 대답입니다. 카이사르에 대한 나의 사랑이 결코 모자라서가 아니라, 내가 로마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브루투스의 변명이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하는 것이 첫 번째 옳지 못함이요,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두 번째 옳지 못함이요,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니 세 번째 옳지 못함이요,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가 역병을 앓을 것이니 네 번째 옳지 못함입니다.”

이른바 ‘요동 출병 4불가론’으로서, 이성계의 변명이다.

배신에는 반드시 변명이 뒤따른다. 그 변명이란 사익(私益) 추구를 상황논리로 배신을 합리화함에 지나지 않는다. 나쁜 방향으로의 점진적 변화가 누적되면 위기가 발생한다. 그 위기를 상황논리로 정당화할 게 아니라, 그 위기에 이른 과정에 대한 성찰이 먼저여야 한다.

힘없는 자는 큰 배신을 저지를 기회를 갖지 못한다. 사람은 자신의 힘의 크기에 비례하는 정도의 배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사익추구는 본능이다. 그 본능의 구체적 발현이 배신이다. 따라서 사익추구가 표층구조이라면, 배신은 표층구조이다.

‘본능’이란 말이 참 재밌다. 한자로는 ‘本能’이다. 본래, 곧 생물이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배우는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는 능력이다. ‘instinct’는 <in 안에>+<stinct 찌르다>, 내 마음속에서 찔러대니 그대로 몸(행동)이 반응할 수밖에 없다.

사익추구를 위해서, 혹은 인정욕구나 지배욕을 충족하기 위해서 자기 힘의 범위 내에서 배신을 한다. 그렇다면 세상은 배신자 천지일 것이다. 누구나 배신을 하고, 배신을 당연시할 것이다. 그러면 굳이 배신이란 단어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 결과 세상은 결딴이 나 공멸할 것이다. 한데 아직도 세상은 멀쩡하다. 왜 그럴까?

사람은 참 묘하다. 그래서 동물 중에서 영묘한 힘을 가진 우두머리인 영장(靈長)인지도 모른다. 배신이 본능이면서도, ‘배신자를 아주 미워한다’는 사실이다. 배신만 존재하는 배신 천국은 결국 공멸한다. 따라서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선 배신이란 작용에, 배신자를 미워하는 반작용을 발전시켜, 공멸을 막아온 것이다. ‘작용-반작용의 법칙’은 물리학에서처럼,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도 진리이다.

문제는 남는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배신할 거리(기회)도 없다. 역사 이래 공동체의 계층구조상 대부분은 배신자를 미워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피지배층은 뒤에 무엇을 감당해야 하든, ‘배신할 위치에나 한 번 가봤으면 원이 없겠다’고들 한다. 배신자를 욕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에게 아무 이익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의 지성일지라도 ‘지금, 여기’서 사람들을 달랠 능력이 없으므로, ‘다음, 저기’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막연히 ‘믿으라’고 하면 설득력이 약해진다. 정교한 장치가 필요하다.

불교에서는 업(業)을 말한다. 업은 우리 인간의 행위 자체이거나 행위의 결과이다. 이것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정해져 있지 않다는 주장은, 곧 결정론의 피해 가는 것이다. 이미 다 정해져 있다고 하면, 아무리 애써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하여 사람은 이 불합리한 고통을 감수만 해야 한다. 이런 더러운 세상이 어디 있을까 보다.

업이라는 것은 자유의지의 산물이다. 자유의지에 따른 행위는 그 결과에 따라 죽은 다음에 보상을 받는다. 사후 정산체계이다. 아무리 바르게 살아봐야 죽으면 소용없다고 하면, 허무주의에 빠질 도리밖에 없다.

하여 석가모니는 현명하게도 자유의지를 인정하면서, 결정론과 허무주의의 중간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중도(中道)이다. 절대자를 전제하지 않고도 윤리적인 행위를 할 수 있도록 만든 이론인 것이다.

사후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죽으면 끝’이라 하면 허무주의에 빠진다. 올바로 살 유인이 안 생긴다. 더욱 우려스러운 일은 아무렇게나 할, 극악한 일도 거리낌 없이 저지를 유인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자유의지를 마련함으로써 결정론을 피했다. 사후세계를 마련함으로써 허무주의도 피하게 했다.

어쩜 하느님께서 다 결정하신다고 믿는 게 편할 수도 있다. 기독교는 결정론이다. 신 결정론에서 모든 권능은 신이 가지고 있다. 혹 나쁜 쪽으로 치달으면, 기독교나 이슬람교 신자들이 윤리적으로 가장 위험할 수 있다. 모든 게 신의 뜻에 달려 있으므로, 그 신의 뜻을 잘못 이해하면, 세속의 윤리도덕을 쉽게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면면히 그 가르침을 이어오고 있는 고대 성현들의 세상과 인생의 해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지배층인 사회를 전제했다. 곧,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이 주인이 될 수 없는 상황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그 수많은 우여곡절과 피와 땀을 흘리고, 목숨까지 잃으며 자신의 세상과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민주시대에 어렵사리 다다랐다.

이 민주사회에서 삶의 조건은 정치가 결정한다. 흔히들 ‘정치가 밥 먹여 주나’는 정치허무주의가 팽배해 있다. 기득권들의 농간에 놀아났을 뿐이다. 기득권들이 정치허무주의를 선동하는 이유는, 노골적으로 말하면, ‘이대로 자기들끼리만 다 해 먹겠다’는 것이다. 아니다, 정치가 밥 먹여 준다. 다음 글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계속>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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