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126) 면회 - 손현숙

손현숙 승인 2024.04.20 10:20 | 최종 수정 2024.04.22 10:38 의견 0
손 시인의 엄마와 오빠

면회

손현숙

살아있어도 죽은 불빛, 반 평짜리 지구 위에서
잇몸 오물거리는 소리는 소리가 아니다
지나간 것들을 주워다 호주머니를 채우는
기억의 회로는 누구의 통제도 불허한다

한 벌 옷으로 먹고 입고 잠을 자는
여기는 천국인가 지옥인가 성별을 모르겠는
닳아빠진 가죽 부대 안에서 쏙 빠져나온 맨발
맑고 깨끗해서 처음의 첫, 처럼 말랑해서
그러나 저 발은 땅을 딛지 못한다

생의 요긴한 동작들은 어디로 흩어버리고
살기는 언제 살았었는지 걱정도 늙어버려서
저 낡고 구겨진 옷 한 벌이 세상천지다
세 시간 굴러 와서 딱, 십 분 면회하고
사진 한 방 찍고 허언증 환자처럼

또 올게, 다음이 있을까, 다시 돌아보면서
쓸쓸한 이별 앞에서 통틀니처럼 가지런하게
저 깊은 고랑의 까매진 얼굴에 나는 자꾸 걸려 넘어지면서
돌아서지도 다가서지도 못하는 딸년의 셈법으로
엄마, 사라진 불빛에 애써 심지를 돋우면서

시작메모:

엄마는 지금 요양병원에 계신다. 다음 주 목요일에 면회를 가면 28번째 만남이다. 2020년 1월에 우리요양원으로, 다시 일 년 후 2021년 1월에는 안동에 있는 요양병원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그간에 소장 궤사로 큰 수술도 받으셨고, 몇 번의 섬망 증상으로 욕을 보시기도 했다.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면회는 딱 십 분. 그 이상도 이하도 허락되지 않는다.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 세 시간 반 운전하고 가서 십분 면회하면 가차 없이 돌아서야 한다. 십분, 아들과 딸이 엄마를 만나는 시간이 한 달에 딱 십 분이다. 눈이 선한 내 형제는 엄마를 만나고 돌아설 때마다 어깨가 유난히 처진다. 어깨로도 울음을 우는구나, 나는 그저 형제를 바라볼 뿐이다. 십 분이 무참하게 지나고 휠체어에 실려 가는 늙어 꼬부라진 엄마를 보면서 “또 올게”, 손을 흔든다.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기약을 참 뻔뻔스럽게도 한다. 부모자식 간의 인연, 의리, 사랑…, 봄꽃 한 번 보여드리지도 못하고 이 봄이 또 지나간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참 이기적인 딸년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러면서 훗날, 나의 아들은 나보다 더 이기적이기를…, 편안했으면 좋겠다.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발화의 힘』, 대학교재『마음 치유와 시』▷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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