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유리판이 깨졌다. 지난 이십 수삼 년 몇 번의 이사에도 멀쩡하던 거였다. 양은 냄비가 화근이었다.

며칠 전 볼일이 있어 20리 길을 자전거로 읍내에 들렀다. 일을 마치고 시장통을 지나다 그릇점의 양은 냄비가 눈에 들어왔다. 부엌에 있는 냄비가 무쇠붙이인지 뭔지 두텁고 무겁고 용적도 1인용으로는 너무 너르다. 라면이라도 하나 삶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옳다구나, 가볍고 가격도 싸다. 하여 노란 양은 냄새를 하나 샀다. 꼭 라면용은 아니다. 라면을 별로 가까이하지 않는다. 5개들이 두 봉지를 사면, 두세 달은 간다. 밥과 국과 반찬을 갖춘 제대로의 식사를 챙기기 귀찮을 때라도, 라면보다는 밥을 맹물로 삶아 김치와 간장만으로 끼니를 때우곤 한다.

그렇지만 코와 혀가 라면을 기억한다. 하여 때론 라면이 당긴다. 그 때가 어제 저녁이었다. 허출했다. 곰곰 되짚어보니 점심을 건너뛰었다. 먹긴 뭘 먹어야겠다고 작심은 했지만, 여러 가지 챙기는 게 성가시기도 했는데, 아하 양은 냄비가 불현듯 떠올랐다.

책을 덮고 위채 주방으로 가서 양은 냄비에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를 틀었다. 금방 물이 끓는다. 면과 계란을 넣고 스프까지 곁들이니 코가 기억한 그 냄새에 입에는 침이 고인다. 기존 무거운 냄비였다면, 라면을 다른 대접에 옮겼을 것이다. 한데 양은 냄비는 가볍다. 하여 수저와 김치와 함께 냄비째로 쟁반에 담아 서재 책상 위로 가져왔다.

책상 위에 쟁반을 놓으니 공간이 좁아 위태롭다. 컴퓨터 모니터와 노트북 탓이다. 하여 양은 냄비를 책상 유리판 위에 내려놓고 쟁반을 치웠다. 모니터를 보면서 냄비 뚜껑을 앞접시 삼아 코와 혀를 만족시키면서 허기를 달랬다. 그리고 얼마간 식었을 때, 냄비째 들어 국물을 마시고나서 내려놓으려는데, 아뿔싸 유리판에 금이 짝 가 있다.

아차, 뜨거운 냄비를 유리판 위에 놓다니! 이십 몇 년을 함께해 친숙한 ‘내 것’과의 결별, 상실감에 입맛이 싹 가신다. 팍 기분이 나빠진다. 후회막급이다. 일진이 나빠서인가? 저놈의 양은 냄비!

자연스레 떠오르는 꼬리 무는 생각을 하는 ‘나’를 보면서, ‘또 다른 나’가 “내 공력(工力)이 기껏 이 정도!” 하며 쓸쓸히 실소를 한다.

사람은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합리적이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이다. 사람은 능동적으로 세상사를 경험하기도 하지만, 어쩜 수동적으로 ‘경험 당하는’ 일이 더 많지 않을까? 당하는 경험이 자신의 바람이나 이익에 반하면, 무슨 무슨 ‘탓’을 한다. 인지부조화를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경험을 하든 경험을 당하든, 그 경험이 이익과 바람에 합치하든 반하든, 인과관계의 분석은 필요하다.

유리는 열전도율이 낮다. 뜨거운 냄비를 유리 위에 놓으면, 표면은 빠르게 가열되어 팽창하나 아래는 그대로여서, 두 부분이 부딪치면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물리법칙이다. 찬찬히 따져 보면 알 수 있으나, 일상생활에서 행동 하나하나를 물리법칙을 생각한 다음에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냥 호되게 한 번 당하는 경험이 특효약이다.

냄비 탓도 일진 탓도 아니다. 그렇다고 물리법칙을 탓할 수 없듯, 내 자신도 탓할 수 없다. 내 이익과 바람에 반하는 경험, 내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경험이 지천인 탓일 뿐이다. 유리판이 깨지는 경험은 인과관계를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의 많은 부분은 우리의 앎이나 분석 너머에 있다. 우리의 인식 능력 한계로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없는 세상사는 널려 있는 법이다.

현기증 나게 발전하는 정보기술과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시대다. 시대의 변천은 그냥 자연의 이치이다. 이치이거늘 인과관계를 따질 수도 따질 필요도 없다. 그냥 순응해야만 한다. 익사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런 저런 전문가 의견을 참조하고 궁리 끝에 내린 답은 학습(공부)이라는 헤엄뿐이다. 헤엄치지 않으면 물속으로 가라앉아 익사할 수밖에 없다.

친숙했던 물건이든 사람이든 떠나가게 되어 있다. 자신의 시대도 떠나간다. 회자정리(會者定離)는 시대를 막론하고 진리이지만, 거자필반(去者必返)은 시대착오적이다.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지만, 떠난 사람이 반드시 돌아온다는 법은 없다.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생물학적 나이가 절대 기준은 아니더라도,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시대의 아들, 딸’이다.

뭍에의 안착 여부는 개인이 예측·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헤엄치지 않으면, 정보의 바다는 쓰레기의 바다일 뿐이다. 그리고 헤엄침 그 자체는 건강에도 이롭지 않은가!

조송원 작가

<작가,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