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헤드와 그의 저서 '관념의 모험' 한국어판 표지

“오랫동안 당연시해 온 것에 의문부호를 붙임으로써 매사를 건강하게 이끌 수 있다”

-버트런드 러셀(1872~1970)-

1803년은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한 지 3년째 되는 해이다. 갈대밭(蘆田) 마을에 사는 한 농부가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사흘 만에 군보(軍保)에 아이 이름이 오르고 급기야 이정(里正)이 군포(軍布) 대신 소를 빼앗아 갔다.

농부가 억울한 심경을 이기지 못해 칼을 뽑아 자기의 생식기를 스스로 베면서 울부짖었다. “내가 이것 때문에 곤욕을 당하는구나.”

그의 아내가 아직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식기를 관가에 가지고 가서 울면서 자신들의 기막힌 사정을 호소했으나, 문지기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 버렸다. 이 이야기를 들은 정약용이 시를 지어 한탄하였다.

애절양(哀絶陽)/정약용

시아버지가 죽어서 이미 상복 입었고
갓난아인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삼대의 이름이 군적에 실리다니

달려가서 억울함을 호소하려 해도
범 같은 문지기 버티어 있고
이정이 호통하여 단벌 소만 끌려갔네

남편 문득 칼을 갈아 방안으로 뛰어들자
붉은 피 자리에 낭자하구나
스스로 한탄하네. “아이 낳은 죄로구나”

- 이이화/한국사 이야기⑯(pp.111-2)-

1803년이면 220여 년 전이다. 그 시대에 우리 조상 대부분이 속했던 농민들의 생활상은 서글프게도 <애절양>에서 보듯 참혹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며 조선왕조는 농본사상(農本思想)을 유학과 함께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농업을 담당하는 농민은 지배의 대상인 피지배자에 불과했고, 주권은 왕에게 있었다. 농민의 안녕은 왕과 그 대리인인 관료의 ‘선의’(善意)에만 의존했을 뿐이다. 설령 농민이 억울함을 당해도 고작 문지기의 제지에 더 이상 저항도 할 수 없었다.

220여 년 전만 아니라 2200여 년 동안을 인류는 대부분이 지배자의 지배 대상일 뿐, 주체적인 삶을 꾸릴 수 없었다. ‘민본’(民本)은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정치적 구호일 뿐, ‘민주’(民主) 곧 ‘백성이 주인이다’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민본시대의 재산 목록 1호인 소를 빼앗김은 민주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부정의(不正義)이고 불법(不法)이다. 그러나 민주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민본시대에 태어났다면, 부정의나 불법을 의식하며 저항할 수 있었을까?

‘민주’를 내 개인의 힘으로 얻었는가? 어쩜 개인은 시대가 일방적으로 베푸는 시혜의 향유자일 뿐인 것은 아닐까? 하여 우리는 인류 역사의 수혜자임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 내가 누리는 민주든 경제적 현실이든 인류 역사 발전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그 역사 발전은 ‘관념의 모험’으로 요약할 수 있다. 왕조시대와 독재시대에 ‘민주’란 관념(idea)을, 노예시대에 ‘인간평등’이란 관념을, 남성중심의 가부장사회에서 ‘남녀평등’이란 관념을 누군가가 창조하고, 그 관념이 기득권과 관습 간의 지난한 전투 곧 모험을 하여 드디어 제도로 정착해온 것이 우리 인류의 역사이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는 『관념의 모험(Adventures of Ideas)』에서 다음과 같이 설파한다.

인류 역사는 새로운 관념(idea)을 공적(公的)인 사회질서 속으로 끌어들여 현실을 바꿔나가는 거대한 모험 그 자체이다. 원시 부족의 감정과 관습에 갇혀 있던 초기 문명에서, 그리스·로마 문명이 남긴 보편적 ‘논리·예술·사법’의 씨앗을 발전시키고, 중세 기독교 교리가 이를 융합한 세계관을 거쳐, 근대 과학·합리주의·정치적 자유·경제적 시장질서가 서로 뒤엉켜 새로운 사회조직을 생산해 낸 것, 이것이 바로 ‘관념의 모험’인 것이다.

이 모험은 곧 ‘사유 속의 판단-어떤 관념’을 공적 제도와 관습 속으로 구현해내려는 끊임없는 시도였고, 따라서 자유, 평등, 선거권, 법치 같은 정치적 성취도 화이트헤드는 모험의 한 국면으로 본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관념의 모험’은 끝난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모험을 통해 성취된 현실 사회제도는 또 다른 문제를 잉태하고 있다. 하여 이 모험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필자가 생각하기엔 현실적이고 가장 시급하게 모험을 감행해야 할 관념은 ‘경제 민주화’라고 판단한다. <계속>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