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 이현보 초상(보물 제872호) [위키피디아]


바위에 올라보니 늙은 눈이 외려 밝다
사람 일이 변한들 산천이야 변할까
바위 앞 강과 언덕이 어제 본 듯 하여라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농암가(聾巖歌)이다. 원작은 한문 투라서 필자가 현대말로 의역했다. 농암은 이현보의 고향인 경상도 예안군의 분강(汾江) 가에 있는 바위 이름인데, 이현보는 이 바위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바위 이름이 재미있다. ‘聾巖’의 ‘聾’은 ‘귀머거리’, ‘巖’은 ‘바위’이니, 농암은 ‘귀머거리 바위’란 뜻이 된다. 사람 말귀를 알아먹는 바위가 어디 있나. 하지만 분강(汾江)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이현보 생전에는 분강이 여울처럼 세차게 흘렀던 모양이다. 하여 시끄럽게 흐르는 강물 소리 때문에 이현보가 앉아 있는 바위 저 아래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강물이 떠들썩하게 흐르든, 도둑놈 발자국 소리 같이 흐르든 바위는 무심하다. 듣고 못 듣고는 사람 소관이다. 하지만 흔히들 사람 마음을 자연에 투사한다. 하여 애먼 바위를 귀머거리로 만들어 ‘농암, 귀머거리 바위’로 칭하는 것이다.

바위를 귀머거리로 만든 사람의 심사는 무엇일까? 시끄러운 강물 흐르는 소리가 아니라, 세상사의 시끄러운 소리에 귀 막고 싶다는 정서를 바위에 의탁하여 표현한 것이리라. 이는 이현보보다 천여 전의 사람인 도연명(도잠, 365~427)의 ‘잡시’(雜詩)를 읽으면 이해가 간다.

結廬在人境(결려재인경) 사람들 틈에 오두막집 짓고 살지만
而無車馬喧(이무거마훤) 시끄럽게 수레 몰고 찾아오는 이 없다
問君何能爾(문군하능이) 어찌 그럴 수 있냐고 묻는데
心遠地自偏(심원지지편) 마음이 멀어지면 땅도 절로 편벽된다네

농암은 1498년(연산군 4, 31세)에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32세에 벼슬길에 올랐다. 38세에 사간원 정언(正言, 정6품)이 됐다. 이때 서연관의 비행을 탄핵했다가 안동으로 유배 됐으나, 중종반정으로 지평(持平, 사헌부의 정5품)으로 복직했다.

밀양부사 등을 거쳐 56세 때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중종으로부터 표리(表裏, 임금이 하사하는 옷감)를 받았다. 이후 동부승지 등을 거쳐 경주부윤, 경상도관찰사, 형조참판, 호조참판(종2품, 차관보 급)을 역임했다.

76세 때 고관인 지중추부사(정2품, 판서 급. 현 장·차관 급)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하고 낙향했다. 중종과 지인들이 만류했으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낙향 시 챙긴 짐이 화분 몇 개와 바둑판 하나뿐일 정도로 청렴했다.

위 농암가는 낙향 직후의 감회를 읊은 듯하다. 자연에 귀의한 후 안빈낙도의 삶은 연시조(5수) ‘어부사’(漁父詞)에 잘 그리고 있다. 특히 눈길이 가는 곳은 5수 중 맨 끝 수이다.

장안(長安)을 돌아보니 북궐(北闕)이 천리로다.
어주(漁舟)에 누웠은들 잊을 새가 있으랴
두어라 내 시름 아니라 제세현(濟世賢)이 없으랴

젊어서(32세)부터 노쇠 때(76세)까지 나랏일로 녹을 먹은 사람으로서, 낙향하여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라 하더라도, 어이 국사가 걱정되지 않으랴. 마는 농암은 정확히 현실 인식을 한다. 자신은 이미 흘러간 물이다. 자신이 아니라도 ‘나라 구할 인재’는 많다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적확한 자기 인식이다.

문득 한덕수(1946~, 76세) 전 국무총리와 비교된다. 애당초 70세가 넘었는데 총리직을 탐한 게 노추(老醜)의 근인(根因)이다. 늙은 자신이 나라 구할 인재의 앞길을 막는다는 인식은 못했을까? 욕심은 늙지 않는다. 그러나 그 욕심의 끝은 ‘내란 공범’이다. 비참하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랴!

농암은 부귀를 탐하지 않고, 자기 절제와 안빈낙도의 실천을 통해 유교적 이상을 구현한 인물로 귀감이 된다. ‘내면의 도(道)’를 중시하던 시대의 한계는 있다. 그러나 부귀에 대한 탐욕을 절제하고, 자신보다 더 나은 인재가 있으므로, 물러날 때를 아는 자기 인식은 오늘날에도 공직자의 본이 될 만하다.

하지만 뭔가 하나 빠진 것 같아 아쉽다. 현실 개혁 의지의 부족이다. 지식인의 생명은 비판(비난이 아님)에 있다. 비판이 유가(儒家)의 선비 정신이다. 조선의 관료는 당대의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진정한 유가의 선비정신으로 무장한 관료라면, 현실에 비판적이어야 한다. 어떤 현실에서든 모순이 누적돼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제도적 모순이나 불평등이 심화되어 가는 시절에, 현직일 때는 체제에 안주하여 제도 개선에는 힘을 쏟지 않았다. 중앙 정치나 토지 제도 전반을 개혁하려는 의지도 부족했고, 대대적인 구조 개혁에는 전혀 눈을 돌리지 않았다. 자연인이 되어 안빈낙도의 삶을 즐긴 것에 무슨 티를 굳이 초들 필요야 있겠는가. 마는, 구조적 모순에 의해 신음하는 백성들에게는 안빈낙도는 언감생심, 호사일 뿐이다.

하여 ‘농암 이현보의 길’은 적어도 ‘조국의 길’은 아니다.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