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서상균]
22. 갈수록 태산 오리농장(2)
화기애애하게 분위기가 익어 가는데 문득 영순씨가 옆구리를 지르는지라 열찬씨가 카드가 들어있는 지갑을 건네주자 화장실에 가는 척하고 결재를 하고 왔다.
식당입구에서 작별인사를 하고 개좌터널을 넘어오면서
“내가 소개도 잘 하고 추어탕도 잘 먹었는데 자꾸만 뭔가 켕기고 걱정이 되네.”
호영이할머니가 불편한 어조라
“왜요? 사람들이 깔끔하고 좋아 보이던데요?”
“사람이 첫인상만 보고 아나? 아무튼 내 동생이 마음이 좀 까다롭고 의심이 많은 것쯤은 알 거고.”
“그야 대충 짐작하고 있지요.”
“거기다 자기가 낳은 아이가 없으니 좀 그렇기도 하고.”
“예.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런데 사내가 더 문제란 말입니다.”
“왜요?”
“마누라보다 나이가 근 열 살이나 아래인데다 부잣집 외동아들로 오냐, 오냐, 귀하게 커서 세상물정을 통 모른다고 할까, 아니 자신밖에 모른다고 해야 되나, 좌우간 만만하지가 않아요.”
“그런 사람은 그런 데로 대하면 되지요.”
“영서할매, 지금 말은 그리 수월해도 나중엔 꼭 그렇지만도 않을 걸.”
“설마.”
이제 급한 불은 끈 것 같았다. 농사철이 닥쳐도 막상 고추 한 포기 심을 땅도 없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4월 1일까지 비료와 농자대등 귀하 소유의 비품과 자재일체를 철거하지 않으면 민사상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교장선생의 배달증명을 감당하지 못 하면 어떡하나, 차라리 거름과 농기구를 통장님을 비롯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줘 버릴까도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통장님과 이호열씨, 윤병균씨도 열찬씨와 황서방을 두둔했다는 이유로 교장선생, 특히 사모에게 미운털이 박혀 고전중이라 그럴 정신도 없었다.
우선 윤병균씨는 그간 거름사건 등에서 한 결 같이 열찬씨를 두둔한 것이 괘심했는지 단번에 밭을 빼라는 요구와 함께 <이 밭을 임대 경작할 분 구함.>이라는 작은 팻말이 울타리에 붙었다. 수년간 무탈하게 부치던 밭을 갑자기 내어놓으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항의하자 ‘내 땅 가지고 내가 내어놓으라는데 무슨 소리냐?’며 삿대질을 했다. 보다 못 한 이호열씨가
“교장선생님, 그건 상식을 벗어나는 일인데요. 지주에게 권한이 있다면 소작인에게도 권한이 있는 법이지요.”
하고 항의하다
“내 땅을 비우라는 것이 지주인 내 마음이지 그럼 누구 마음이란 말이요?”
하는 순간 옆에 있던 사모가
“아니, 찔레아버지는 남의 땅에 온갖 나무를 다 심어놓고 그 무슨 경우 없는 짓이요? 소작인이 나무를 심을 때는 지주에게 승낙을 받아야 되는 것이지만 암에 걸린 찔레엄마의 약용으로 심는다고 봐준 공도 모르고.”
하자
“그래 맞아! 당신도 당장 내 땅에 몰래 심은 나무를 뽑아. 오가피든 당두충이든 꾸지뽕이든 이번 주까지 몽땅 뽑아!”
마치 잘 걸렸다는 듯 교장선생이 신명을 내자
“저, 교장선생님, 우리가 교장선생님을 한두 해 아는 것도 아니고 또 여기서 농사를 한두 해 짓는 것도 아니고 전에 누님 계실 때부터...”
옆에 섰던 통장님이 젊잖게 운을 떼는데
“이 양반이 우리 누님은 왜 찾아? 우리 누님이 당신의 원두막을 지으라고 해서 땅까지 당신 준 건 줄 알아? 당장 내 땅에 지은 그 원두막을 뜯어!”
오랜 세월 물망골 경작자들의 휴게소이자 주말이면 대학교수에 의사까지 쟁쟁한 지위의 통장님의 처남들과 친구들이 놀러와 쉬고 가던 명품정자가 날아갈 판이었다. 통장님이 사정을 해도 소용없이 그 이튿날 집으로 3월 말일까지 철거해달라는 배달증명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신중하고 원만한 성격이지만 눈곱만큼이라도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통장님이 긴급히 인부들 사서 이튿날 바로 철거하니 철거자재를 자기 땅에 쌓아놓지 말라고 해서 교장선생의 밭 위쪽에 무단으로 국유지를 경작한 곳으로 모두 옮기느라고 품삯만 30만원이 넘게 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농자재들을 월내리 오리농장(행정구역이 장안읍 오리)으로 옮겨야하는데 아무 의지도 없는 허허벌판인 만큼 우선 농기구를 넣을 창고와 한여름의 땡볕과 비를 피하고 커피와 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며 휴식을 취할 원두막 비슷한 가건물이라도 지어야 하는 것이었다. 어느 새 3월이 다가오고 있어 어서 빨리 일부라도 땅을 일구어 급한 데로 상추와 쑥갓, 감자를 심어야 되는데 소금기 먹은 바닷바람이 사정없이 불어오는 그 허허벌판에 아무런 의지처가 없이 개간(開墾)작업을 할 엄두를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다음 일요일 얻어 논 땅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찾아가 본 열찬씨가
“아따, 그 땅 한번 넓어서 좋네. 구서동 밭이 한반도라면 여기는 온통 시베리아네.”
하는데
“시인 같은 말씀 하고 있네. 저 거친 시베리아를 언제 개척해서 씨를 넣는단 말이요? 이 허허벌판에 아무 의지도 없이.”
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렇제? 창고든 움막이든 뭔가 의지가 있어야 되겠제?”
한참이나 고심하던 열찬씨가
“그래 맞다!”
쾌재를 부르자
“맞기는 개가 몽둥이를 맞나?”
서당 개 3년이라고 이제 열찬씨의 말투를 흉내에 익숙한 영순씨가 장난스럽게 웃는데
“명촌에 또식이 말이야? 걔가 건축업을 하며 가건물 짓는데 전문이라잖아?”
하고 휴대폰을 꺼내는데
“잠깐!”
영순씨가 제지하더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아주 복잡하고도 미묘한 표정인데
“왜, 요즘 겨울철이라 일감이 없어 일꾼들 놀린다고 걱정이던데 다믄 인건비라도 좀 벌게 해주면 좋지.”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좀...”
“왜?”
“명촌하고 엮인다는 것이 새삼...”
“새삼?”
“옛날 명촌에 소 사주고 논 사준 생각 해봐?”
“...!”
어안이 벙벙해진 열찬씨가 꼬리를 낮추는데
“또식이 그 조카가 옛날에 술 먹고 연산동 찾아온 것도 그렇고.”
“지금은 교회 다니고 술 끊었다 하잖아?”
“...”
“아이가 넷인데 다믄 일당이라도 벌면 그 이상 좋은 것도 없고.”
“몰라. 당신 알아서 하고 나중에 후회하기 없기요.”
하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어 전후사정을 설명하자 그러면 어떤 건물을 지을 건지 한번 보자고 해서 이튿날 구서동에서 만나 물망골 밭으로 같이 올라가 보기로 약속했다.
이튿날 오전 열시 약속시간에 구서동 E마트 앞에 나타난 또식씨가 고개를 꾸뻑하고는
“호동아, 인사해라. 우리 외삼촌이다.”
하고 동행한 사내를 돌아보자
“...”
뭔가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막거리다 그냥 고개만 꾸뻑하는 사내를 보는 순간“
“예. 반갑습니다.”
하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다 푸후, 절로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입을 오므렸다. 후리후리하게 큰 키에 수수깡처럼 바짝 마른 몸매는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듯 허리가 굽어있었고 길쭉한 얼굴에 세모진 턱과 노란 머리카락과 가는 눈매가 어릴 적 김경언이란 만화가가 그린 구부정하고 어수룩한 캐릭터의 주인공을 영판 빼닮은 것이었다. 노란색 상의를 자세히 보니 어디서 구했는지 민방위훈련복이었고 땟물이 졸졸 흐르는 청바지 밑에는 붉은 색의 낡은 군화인지 등산화인지도 모를 가죽이 여기저기 벗겨진 모양이 얼핏 보면 피난민이나 낙오병 같은 몰골이었다.
“이래봬도 지붕이나 천막설치전문가입니다. 철골이든 철주든 경사면 지붕이든 높은데 올라가서 일하는 데는 전문입니다. 잔나비처럼 생긴 것처럼 고공작업 전문가로 한 나절에 혼자 몽고텐트 30개를 친 기록보유자지요.”
“그래. 진짜 잔나비상이다. 혹시 잔나비 띠는 아인가?”
“70 범띠랍니다.”
하면서 셋이 한참을 걸어 5각정에 도착해서
“봐라. 이렇게 한쪽에 창고가 있고 한쪽에는 앉아서 쉬거나 누워 자기도 하고 간단하게 라면이나 커피를 끓여 먹는 공간만 있으면 되지.”
하는데
“외삼촌, 그건 뭐 쳐다볼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가건물을 한두 동 지은 사람들이 아니니까 그만 척 하면 삼척이고 툭 하면 건너 편 울타리에 호박이 떨어지는 소리 아입니까?”
“그래? 그럼 왜 일부러 여기까지 왔나?”
“일이 없어 심심하기도 하지만 삼촌 짐 옮겨야지요. 이 높은데서 일일이 지게도 저다 나르면 며칠이 걸릴 건데요.”
하고 열찬씨와 영순씨가 미리 챙겨 논 퇴비랑 고무물통, 삽과 괭이, 분무기와 물조리개 등을 쳐다보더니
“호동아, 옮기자!”
하면서 커다란 고무 통에 씨앗, 농약, 마대, 끈, 주전자, 가스렌지, 컵과 수저 따위의 온갖 잡동사니를 쓸어 담고
“영차!”
소리와 함께 그 빼빼한 호동씨의 어깨에 올려놓자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발걸음도 가볍게 성큼성큼 내려가는 것이었다.
“자, 인자 농기구가 문제네.”
하고 또 하나의 고무 통에 삽과 괭이, 호미, 낫, 도끼, 쇠스랑고춧대와 그물 등을 몽땅 집어넣어
“어라 차차!”
단숨에 둘러맨 또식씨가 지게에 20kg들이 퇴비 두 포대를 지고 내려오는 열찬씨를 보며
“삼촌은 그만 쉬이소. 우리가 하지요.”
해도 같이 내려가서 포터차 화물칸에 차곡차곡 싣고 나서 다시 밭에 올라
“쪼깨는 밭에 거름은 왜 이래 많응교?”
하면서 60킬로는 훌쩍 넘을 것 같은 마대를 하나씩 메고 내려가고 열찬씨는 또 40킬로를 매고 내려가다 힘이 들어 중간에 쉬는데
“삼촌, 포대에 든 것만 가져가고 나머지 거름은 두고 갑시다. 그래야 다음 농사짓는 사람이 야박하다 소리는 않 하지요.”
하면서 요번에 내려가서 짐을 부리고 그냥 쉬라는 것이었다. 열찬씨가 겨우 도로로 내려오는데 금방 뒤따라온 두 사람이 차에 짐을 싣고
“삼촌은 지게 이리주고 오지 마이소. 우리가 이번에 마무리 하지요.”
하더니 마지막 포대거름을 지고와 마무리가 되었다.
“월내 어데라 캤능교?”
화물차를 출발하며 또식씨가 묻는데
“니가 월내를 아나?”
“월내뿐아니라 임랑해수욕장에 정훈희까페도 <꽃밭에서>도 알지요”
“그래? 월내가 아니라 장안읍 오리라고 하는데.”
“아아, 오리. 고리원전직원 아파트 지나서 울산, 부산 경계선에 말이지요?”
“야, 대단하다. 니가 거게를 우째 다 아노?”
“다, 아는 방법이 있지요.”
하더니 한참 만에
“외삼촌, 제가 건축업 하기 전에 1톤짜리 포터에다 온갖 잡화를 싣고 만물상회가 왔다고 방송을 하며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오리마을도 수십 번 왔지요.”
“그렇구나. 고생했네.”
하는데 도시고속도로로 올린 자동차가 해운대 장산터널을 지나자 새로 생긴 부산울산고속도로로 진입, 순식간에 장안 나들목을 빠져나오며
“외삼촌, 기왕이면 경치 좋은 바닷가로 정훈희까페나 보면서 갑시다.”
하고 좌천시내를 지나 임랑해수욕장과 월내역을 거쳐 한수원아파트 앞의 철로를 건너 단지를 가로질러 좌측 울타리를 돌아
“오리 어느 동넹교? 마실이 다섯 개나 있어 오리라 안 캅니까?”
“쪼깨 가다가 황토 흙이 벌건 비포장 언덕길로 가면 원룸건물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좌회전이다.”
“아이구, 그 구신 나올 것 같은 원룸 말이지. 내 거기서 물건 좀 팔라고 갔다가 차가 빠져 혼만 났지. 그 큰 원룸에 입주자가 단 두 집이라 귀신이 나올 것 같았지.”
하며 정확히 원룸건물 앞에서 좌회전해 낮은 언덕하나를 넘어 평평한 밭과 검정그물로 친 울타리가 나타나자 “외삼촌 여게 맞지요?”
“야, 귀신이다.”
하며 지주 윤여사가 철주 밑에 감춰둔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자, 짐을 어디로 옮긴다?”
하다
“외삼촌, 아무래도 저 물탱크 옆으로 옮겨야 되겠네요. 건물을 지어도 수도가라야 되니까요.”
“그래. 그러자.”
단숨에 짐을 옮기고
“삼촌, 타이소. 울산서 부산가는 1127번 버스 태워드릴 게요.”
“너거는 고속도로 안올리고?”
“예. 중간에 들릴 데가 있어요.”
하고 다시 내려오다
“야야, 대체 움막은 어떤 식으로 지을 건데?”
“아이구, 걱정 마이소. 전문가적 입장으로 지어서 한 일주일이면 가져올 것입니다.”
“비용은?”
“공장에 헌 자재 이용해서 지어서 서비스로 드리지요?”
“그라면 되나? 니도 인건비 들어갈 텐데.”
“괘않심더.”
“나는 자재비 약간에 너거 두 사람 인건비 하고 해서 한 50만원 생각했다.”
“괜찮심더. 자재비 인건비 다 치면 100만원도 모자랍니더. 이렇게 우리 호동이가 한 번 움직이면 일당만 25만원 아입니까?”
“그러나?”
“예, 아무 걱정 마이소. 이 못난 조카가 젊을 때 애 먹인 일도 많고 해서 서비스로 드립니다.”
“아이, 그래도.”
그렇게 헤어진 이튿날 열찬씨 혼자 등산배낭에 물과 김밥에 소주를 넣고 밭으로 가서 일단 상추 심을 밭을 일구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열찬씨가 알아낸 교통편은 주공 앞에서 49, 54, 210, 62번을 타고 광안동 수영아파트 앞에서 63번이나 해운대 방향의 버스를 갈아타고 기장의 청강리 공영차고지에 내려서 동해바닷가를 비잉 돌아가는 80번 버스를 타면 한수원 아파트단지안의 종점에 내려서 부산, 울산 경계도로를 한 25분쯤 걸으면 현장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아침 일곱 시경에 나와 주공 앞에서 49번을 타고 수영교차로에 내려 10여분을 기다려 63번을 타니 등교시간이라 웬 여학생들이 그리 많은지 좌석은커녕 서 있을 공간도 부족해 아무에게나 툭툭 부딪치는 배낭을 벗어 가슴에 안거나 남의 발치에 놓아야 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걸려 청강리에 도착하니 아홉시가 다 되었는데 80분 간격이 버스가 8시 40분에 출발해 한 시간 5분간을 기다려야하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이게 부산광역시 시민이 이용하는 교통망이란 말인가?)
하다 저 자신도 시민들의 불만을 이리저리 합리화시키기 바빴던 공무원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에 픽 웃으며 버스정류소의 빈 의자에 앉았다. 보통 2,30명의 환승여객이 앉아있어도
20여개의 일반버스와 직행버스가 출발할 때마다 몇 명씩 타고 떠나는데 열찬씨가 탈 80번이 올 시간은 아직도 한 시간 너머가 남았다. 무심히 울타리 넘어 동해남부선에 네 칸짜리 꼬마열차에 부산, 울산 간 출퇴근 기차가 지나가는 걸 보며 푸우, 하품을 하다 어느새 고개를 끄떡이며 졸기 시작했다. 평소 날마다 버스든 지하철이든 남의 승용차를 얻어 타든지 매일 어디론가 떠나고 마침내 돌아오던 생활을 수십 년 해온 그로서는 버스나 지하철에 앉으면 채 1분도 안 되어 잠이 들고 그 혼곤한 잠결 속에서 다음 정류소가 어디라는 방송을 듣고 귀신처럼 하차 역에서 잠을 깨던 동물적 감각이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약간 싸늘하기는 해도 맑고 시원한 공기에 점차 찾아지는 자동차경적과 이젠 도란도란하게 젖어오는 낯선 아주머니이 목소리가 귓가를 어루만지며 얼마나 포근하게 이른 아침부터 단잠에 빠졌는지
“아이구, 이 양반 봐라! 얼마나 피곤하면 침을 다 흘리고 잠이 들었노?”
“머리가 허연 양반이 간밤에 뭐 했노?”
하며 웃는 소리에 잠을 깨어 눈을 비비니
“보소, 그 발밑에 교통카드나 주우소.”
동년배 사나하나가 푸우 웃었다. 휴대폰의 시계를 보니 30분도 더 잔 것 같았다.
“아침부터 춘곤증은 하느님도 못 말린다 하지만 이렇게 잠에 떨어진 사람은 처음보네.”
혀를 끌끌 차던 사내들은 이내 자신들을 싣고 갈 차에 올랐다. 부산에서 기장의 바닷가마을이나 여기저기 흩어진 농촌마을로 들어갈 사람들이 모두다 이 청강리공영주차장에 내려서 대부분 배차간격이 2,30분이 넘는 명색은 시내버스지만 오지를 운행하는 털털이버스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기다리는 입구 쪽 버스정류장에서 안쪽으로 가로세로 근 200미터나 되는 넓은 공간에 여남은 개 회사의 수십 개의 노선버스가 운행을 마치고 주차하다 다시 출발하기를 반복하니 길목인 정유소에는 늘 여남은 명 승객이 기다렸다 버스에 오르는 데 자신만이 미아처럼 홀로 버려진 것이었다. 문득 아랫도리가 묵직해지며 오줌이 마려워진 그가 주변을 둘러봐도 화장실은 물론 슬쩍 일을 볼 은폐물마저 없었다.
그러다 저 멀리 주차장 뒤에 커다란 건물하나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천천히 걸어갔다. 예상대로 입구에 넓은 공영주차장사무실이 있고 복도를 따라 좌우로 개별회사사무실이 늘어서고 반대쪽 방향에는 기사휴게실, 기사식당, 남녀화장실과 음료수판매대와 커피자판기가 늘어서 있었다. 한참이나 밀린 소변을 보고 나오니 기사식당의 구수한 음식냄새가 코를 찌르며 배가 고파왔다. 여섯 시 좀 넘어 건성으로 아침을 먹고 버스에 시달린 게 두 시간이 지났으니 배가 고플 만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좀 심하다 싶어 자판기에 동전 300원을 넣고 종이컵커피를 한잔 빼서 사무실을 나오니 마침 앞에 등나무파고라 아래 벤치가 놓인 휴게실이 있어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데 거기가 기사들의 흡연장소인 모양으로 커다란 꽁초가 수북한 커다란 항아리에서 담배냄새가 진동했다. 천천히 다시 정류소로 와서 시간을 보니 5분전이었다.
“?”
180번 버스에 오른 열찬씨가 차안을 둘러보다 흠칫 놀랐다. 자신 외에 더는 승객이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평생처음 월내행 버스를 타는 자신이 없는 어제나 그제는 어쩜 한 명의 승객도 없이 다람쥐쳇바퀴 돌듯 했을 것이었다. 시내버스준공영제로 엄청난 예산이 들어간다고 들었지만 준공영제로 예산지원이 없었다면 자기 같은 사람이 그 먼 곳에서 농사를 지을 엄두도 내지 못 했을 것 같은 생각에 픽 웃음이 나왔다.
차고지를 벗어난 버스는 부산에서 동해안을 돌아 강릉을 향하는 3번 국도에 접어들더니 오른 쪽으로 대변항으로 향하는 도로, 웬 모텔들이 다닥다닥 붙은 길을 지나 저 앞쪽으로 높다란 사각빌딩 기장군청이 보일 즈음 갑자기 왼쪽으로 꺾어 동해남부선 철도 위를 가로지르는 과선교를 지나 기장읍내로 접어들어 우회전 몇 개의 아파트를 지나 또 다시 우회전해 한참을 달려 기장성당 앞에서 비로소 40대 아주머니 한 명을 태우고 다시 동해남부선을 건너 기장군청과 기장체육관을 지나 한참을 달리더니 오른쪽 일광방향으로 진입했다. 일광읍사무소를 지나 전에 한번 와본 적이 있는 <대복집>이라는 초대형 복국집을 지나 제법 큰 개울하나를 지나니 그대로 일광 항이 열리고 바다 저 끝에 일광해수욕장이 보였다. 다리를 건넌 자말자 문득 김이 무럭무럭 피어나는 가게가 나타났는데 그게 주말이면 한참이나 줄을 서야 살 수 있다는 제법 소문이 난 일광역 앞 찐빵 집이었다. 벌써 줄을 선 사람도 너덧 명이 보였다.
정면의 커다란 건물 한국유리공장을 지나자 문득 고즈넉한 어항과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안내방송을 들으니 이동항이 었다. 또 한참을 달리니 오른쪽의 새파랗게 송림이 우거진 벼랑아래 동해바다가 새파랗게 펼쳐지고 용처럼 길게 몸을 늘어뜨린 갯바위의 암맥이 철썩이며 부서지는 물거품과 함께 절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어디인가 눈에 익다 싶었는데
“...!”
마침내 낯익은 갯바위하나가 눈에 들어오며 전광석화처럼 죽은 일찬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장례를 치르고 와서도 밤에 잠이 안 온다던 영순씨와 함께 오색과일과 명태머리를 마련해 와서 촛불을 켜고 술을 부으며 손을 빌던 자리였다.
지끈 눈을 감자 이내 자주 아나고회를 먹으러 왔던 칠암마을과 임랑해수욕장의 안내방송이 나와 눈을 뜨니 오른 쪽으로 정훈희의 사진이 걸린 카페 <꽃밭에서>가 스쳐 지나고 왼쪽으로 민가처럼 조그만 월내역이 나오고 왼쪽으로는 손바닥 만 한 월내시장 건물너머 고리원전의 동그란 건물이 바다위에 떠 있었다. 다시 동해남부선을 넘어 한수원아파트 관사가운데를 가로질러 첫 번째 정류소에서 기장성당에서 탄 아줌마가 내리고 나자
“오리에서 농사를 짓는 분이신가요?”
버스기사가 물어
“예.”
하니 한참이나 이윽히 들여다보다
“제가 이쪽에 버스 타고 다니면 농사짓는 할아버지 둘과 봄 되면 두릅과 쑥을 뜯으러 오는 할머니 네 명은 아는데 아저씨는 낯선 분인데요?”
“예. 오늘 처음 옵니다. 앞으로는 자주 볼 겁니다.”
“예, 잘 알겠습니다.”
너무 승객이 없어 오죽 심심하면 먼저 말을 다 걸겠나 싶어 종점에서 내리면서
“혹시 180번 배차시간표 있나요?”
“아, 예. 청강리버스정류소 게시판에 붙어있어요. 휴대폰으로 사진 찍으면 될 겁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반듯한 포장도로를 걷다 또 오줌이 마려워 주변을 둘러보니 인기척이라고는 없어 길가의 소나무 밑에다 시원스레 일을 보는데
“빠앙!”
자주 빛 직행버스하나가 지나가며 경적을 울리는데 저도 몰래 고개를 돌린 열찬씨가 바지춤을 잡은 채로
“...”
어색하게 손을 흔들자 버스기사도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바지춤을 올리고 조금 걷자
<어서 오십시오. 여기서 부터 울산광역시입니다.>
커다란 안내판에서 왼쪽으로 꺾어 한수원아파트 울타리를 따라 주욱 걸어 작은 고개하나를 넘어 왼쪽 토취장과 오른 쪽 폐목장 사일로를 바라보며 부지런히 걸어 원룸건물이 보이는 황토길을 지나 원룸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또 한참을 올라가니 긴 문장의 마침표처럼 동그란 평지하나가 나왔다. 열쇠를 찾아 문을 여는 순간 어딘선가 삐, 열시 시보를 알리는 방송소리가 들려왔다. 출발한지 무려 세 시간 만에 농장에 도착한 것이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