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이모한테는 엄마가 전화하마. 이모는 다 널 위한 일인데 무조건 찬성하실 거다. 신부님 찾아가는 건 니가 알아서 해라. 신부님한테 부모님 뜻이 그렇다는 걸 말씀 잘 드려 봐. 영영 안 가는 게 아니고 대학 입시 마칠 때까지만 쉬겠다하면 다 이해하실 거다. 자, 내려가서 미역국에 밥 한 술 떠라.”
성당의 사제관 앞이었다. 인호는 다니엘 신부를 찾아 상담을 청하려 했다. 어린이 미사와 토요 특전미사 사이에 여유 시간이 있는 걸 알고 인호는 그 시간을 택했다. 일전 사제관 방문을 언제든지 환영한다는 신부님 말씀에 용기를 내며 인호는 사제관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렸다. 신부님은 밝은 미소를 띠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요한이라는 인호의 세례명을 되살려냈다.
“오오, 요한. 요한 맞지요? 반가와요. 어서 들어와요.”
인호는 신부의 기억력에 감탄했다. 일전 수녀님이 그의 집을 방문했던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신부는 인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잠깐 기다리라며 인호에게 소파에 앉기를 권하고 옆방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인호는 신부님이 오실 동안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벽 한쪽엔 집무를 볼 수 있도록 책상이 자리 잡았고, 책상 옆 진열장엔 외국서적과 함께 우리 글로 된 책들도 여러 권 눈에 띄었다. 책상 위엔 사진 액자가 있었다. 신부님이 젊은 시절에 찍은 가족사진 같았다. 얼른 세어보니 아홉 명의 대가족이었다. 인호가 사진 액자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동안 신부가 들어왔다. 손에 들고 온 쟁반에는 인절미가 담긴 그릇과 우유가 채워진 잔이 두 개 있었다. 인호가 다가가 쟁반을 받아들려 하자 신부는 괜찮다며 직접 테이블 위에 놓았다.
“요한, 우선 소파에 앉아요. 인절미는 내가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서 우리 교우분들이 자주 해가지고 와요. 자, 어서 들어요.”
신부의 환한 표정에 인호도 아무런 근심 없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떡을 집어 들었다. 그 사이 신부는 인호가 보고 있던 사진 액자를 가져왔다. 그리고 인호 쪽에서 잘 보이도록 액자를 테이블 위에 세웠다. 인호가 고개를 기울이자 신부는 집게손가락으로 사진 속의 인물들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가운데가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여기가 형님, 그 옆이 후후, 신부님이에요. 남동생, 여동생, 맨가에 막내 여동생....... 신부님이 수도원에 들어가기 전에 찍은 사진이에요. 모두 다 이태리에 살고 있지만 막내는 결혼해서 미국에 가 살아요.”
막내 여동생이 그리운지 사진 속의 동생 얼굴 아래 신부님의 손끝이 잠시 머물렀다. 인호는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먼 이국땅까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온 그에게 절로 존경심이 생겼다. 신부님과 단 둘이 마주앉아 이야기하려니 칸막이만 없을 뿐 고해소에서 고백하는 느낌과 비슷한 어색함이 감돌았다. 신부는 인호를 편하게 해주려고 인절미와 우유를 거듭 권했다. 우유를 마시고 심호흡을 한 뒤 인호는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두 손은 깍지 끼고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부가 인호를 온화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요한은 부모님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군요, 그렇지요?”
“네,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겠지요. 특히 한국의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기를 바랍니다. 요한, 공부 열심히 해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세요. 미사 참례를 하면서도 공부를 잘 할 수 있다는 걸 부모님께 보여드리세요. 부모님도 자식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기꺼이 들어주십니다.”
“하지만 신부님, 부모님은 제가 성당에 나가는 것 자체가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대학 들어갈 때까지 성당은 쉬라 하세요. 어머닌 제 신앙생활까지 반대하는 것 같습니다.”
인호는 표준말을 구사하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다 소상히 전했다. 다니엘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요한,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부모님 뜻이 그렇다면 따라야지요. 부모님이 노여워하시는데 미사참례를 한들 마음이 평화롭지 못할 겁니다. 하느님은 부모자식간의 불화를 원하지 않습니다. 부모님 뜻대로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미사 참례는 미루는 걸로 하세요. 그렇지만 항상 하느님의 자녀란 걸 잊어선 안 됩니다. 매일 기도를 하는 거예요. 주님이 요한을 지켜주실 겁니다.”
인호는 대학 들어갈 때까지 부모의 뜻에 따르라는 신부님의 말씀에 적이 안심이 되면서도 뭔지 모를 상실감에 젖어들었다.
“저는 영세를 받았는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주님은 기다려주십니다. 요한의 기도가 끊어지지 않는다면 주님께선 언젠가는 부모님도 당신 품으로 부르실 겁니다. 요한, 다가오는 부활절이나 성탄절, 그리고 요한이 간절히 교회를 찾고 싶을 땐 언제든지 오세요. 열심히 공부하는 가운데 자식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부모도 막지는 못한답니다. 지금은 이무래도 요한이 참고 기다려야 할 때인 거 같습니다.”
“신부님. 저는 중학교 때만해도 공부가 재미있었는데 요즘은 공부 열심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습니다.”
“너무 걱정 말아요. 공부가 잘 되지 않을 때도 있는 거예요. 사실 신부님도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신학을 배울 때는 아주 열중했어요. 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으니까요. 요한도 소중한 것을 찾으세요. 공부는 너무 연연하지 않아도 돼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당신 자녀들이 모두 일등 하는 것을 바라진 않습니다. 일등이 있으면 이등이 있고 꼴찌도 있지요. 하느님은 일등과 꼴찌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칭찬 받은 일등보다 꼴찌를 더 어여삐 여기시기도 하지요. 요한, 집에 가서 가족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세요. 신부님도 요한을 위해 기도할게요.”
다니엘 신부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에게 작은 상본을 선물했다. 어린 예수가 성전에서 율법 학자들과 토론하는 장면이 그려진 것이었다. 그리고 아래쪽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눈길을 끌었다.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습니까?’ 열두 살이 된 예수가 성전에서 사흘 만에 그를 찾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한 말이었다. 이는 이미 하느님의 자녀로 성장한 자신을 성당에 가지 못하게 강요하는 엄마를 향해 던지는 말같이도 들렸다. 인호는 엄마도 이모처럼 신앙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화살기도를 올렸다.
사제관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기다려 특전미사를 보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주일 학생미사에 가서 수녀님과 그간 면을 익힌 몇몇 친구들에게 당분간 못 나온다는 사실을 알리기로 했다. 이모가 마음에 걸렸다. 엄마의 뜻이라 어쩔 수 없이 동의하더라도 속으로는 많이 안타까워할 것 같았다. 인호는 갑자기 이모가 보고 싶어졌다.
해가 서산에 지고 있었다. 인호가 앞을 보니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는 걸인이 눈에 띄었다. 누더기를 걸치고 덕지덕지 묻은 때로 온통 새까매진 얼굴이었다. 예전 같지 않아 동냥도 어려울 텐데 끼니는 해결하고 다니는지 오늘밤 지낼 거처는 있는지 슬며시 걱정이 되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베푼 것이 곧 내게 베푼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되새기며 인호는 그 곁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자신이 베풀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에게 해줄만한 말 한마디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그를 집으로 데려가 따뜻한 물에 목욕시키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힌 다음 찬을 갖춘 저녁 한 그릇 대접하는 상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그러나 기겁을 하고 그를 내쫓을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클로즈업되었다. 예전 구덕산 저수지 아래 판잣집에서 살 때 거지에게 식은 밥 한 덩이라도 건네주려 했던 엄마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었지만 그동안 세상도 엄마도 많이 변했다는 것을 인호는 잘 알고 있었다. 인호는 엄마 핑계를 대면서 그 생각을 끊으려 했지만 실은 자신이 먼저 그에게 손을 내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저버린 그를 향해 누가 돌을 던진다면 대신 맞아줄 수 있는가 자문해보기도 했다. 이 또한 선뜻 답변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 예수님께서 계신다면 어떻게 대하실까 하는 상상도 시도해보았다. 그러자 예수님 대신 다니엘 신부의 얼굴이 나타났다. 신부가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요한. 그를 위해 기도하세요. 지금 요한이 할 수 있는 건 간절한 기도예요. 누구에게나 피치 못할 사정은 있는 겁니다. 그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가 용기와 희망을 잃고 산다면 그를 위해 용기와 희망을 청하는 기도를 올립시다.”
다니엘 신부의 속삭임 같은 내면의 소리에 이끌려 인호는 걸인을 위한 기도를 바쳤다. 아까부터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뒤따르는 인호를 의식한 걸인은 순간 걸음을 멈추고 휙 돌아보았다. 느릿느릿한 걸음걸이와는 사뭇 다른 움직임이었다. 까만 얼굴에 번득이는 눈빛이 섬뜩했다. 놀라 두어 걸음 물러서는 인호를 경멸하듯 쏘아보곤 그는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인호는 서둘러 그를 벗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불안을 가장한 것인지 몰라도 적의가 가득 담긴 그의 눈빛이 망막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서로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마다하고 그가 혼자 짊어지고 가는 운명의 사슬이 과연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어 인호를 답답하게 했다.
다음날 아침식사 후 인호가 학생미사를 보러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덕희가 그를 말렸다.
“신부님한테 성당 쉬는 거 허락 받았다면서?”
소파에서 신문을 보던 이정식이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신문을 접었다.
“좀 있다 준호랑 셋이 낚시나 가보자. 저 건너 큰 못이 있어 이 동네를 못골이라 하는데 못에 붕어가 꽤 잡힌다더라.”
일요일에도 종종 회사에 나가던 이정식이 그날은 휴식을 즐길 참이었다. 예정에 없던 낚시 이야기에 준호가 먼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안 돼요. 친구 생일 초대받았어요.”
이정식이 두 아들을 번갈아 보곤 피식 웃었다.
“허어. 그래, 한창 친구가 좋을 때다. 그럼 인호도 성당 가서 친구들 보고 오너라. 작별인사는 해야지. 이게 대학 들어갈 때까지 마지막 성당 나들이다, 알았나!”
어쨌든 그날 인호는 학생미사 시간에 맞추어 성당으로 갔다. 그리고 수녀님과 몇몇 동급생 교우들에게 당분간 미사 참례를 할 수 없음을 알렸다. 사제관으로 들어가려던 다니엘 신부가 인호를 보곤 손을 흔들어주었다. 인호도 그에게 머리 숙여 절하곤 손을 흔들었다.
삼십대 후반의 여자가 가정부로 들어왔다. 덕희는 그녀를 남해댁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덕희가 아는 여자의 일가친척이었는데 아기를 낳지 못해 소박맞은 처지였다. 과거에 열병을 앓고 생긴 청각장애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는 소리나 작은 소리는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았다. 덕희는 요 며칠 지켜보며 트집을 잡아 내보낼 궁리를 했다. 하지만 소처럼 큰 눈망울을 보면 모질게 대하려고 마음먹었다가도 어느새 관대해지는 자신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남해댁은 덕희를 사모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친척 언니의 친구라는 점을 앞세워 언니라 불렀다. 언니라 부르는 상대방에게 굳이 호칭을 바꾸라고 요구할 마음은 없었다. 덕희는 이제 사모님이란 소리는 웬만큼 듣고 있었고, 오히려 언니라는 소리에 정감이 묻어 있어서 듣기 싫지 않았다. 실은 덕희가 남해댁에게 호감을 갖게 된 건 그녀의 타고난 부지런함 때문이었다. 며칠 일을 시켜 보니 본인이 알아서 일거리를 척척 찾아냈고, 집안 청소도 꼼꼼하게 잘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음식 솜씨가 예사 손맛이 아니어서 그 정도면 의사소통의 불편은 충분히 감수할 만하다고 여겼다. 그녀가 집안의 일원으로 안착했을 때쯤 뒤이어 네 발 달린 짐승이 새 식구로 들어왔다.
이정식이 개 훈련소에서 데려온 셰퍼드였다. 생후 일 년이 된 큰 몸집으로 갈색에 검은 빛이 섞인 털을 가지고 있었다. 덩치에 맞게 만들어진 개집이 대문 가까운 곳에 놓여졌다. 개 이름 작명은 인호와 준호의 몫이었다. 인호가 ‘쫑’이 어떠냐고 묻자 준호는 촌스럽다고 고개를 저었다. 결국 준호의 뜻대로 ‘코리’라고 이름 지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영어를 열성적으로 배우던 준호가 코리아에서 따온 이름으로 발음하기도 좋았다. 하지만 준호는 인호에 비해 코리에게 애정을 쏟진 않았다. 자연히 코리는 제 콧잔등을 자주 쓰다듬어주는 인호와 가까워졌고 그를 주인으로 예우하는 꼬리를 흔들었다. 인호는 강아지에게도 홍역 예방접종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미처 몰라 쫑을 잃고 만 안타까운 기억을 떠올렸다. 확인해보니 코리는 홍역에서부터 광견병 예방접종까지 마친 상태였다.
한 해 사이에 키가 부쩍 큰 인호는 일종의 성장통을 겪는지 무릎이 종종 아파왔다. 심할 땐 등굣길이 불편했다. 버스정류장에서 학교까지 계속 오르막길이라 정문에 다다를 때쯤 저도 모르게 다리를 절기도 했다. 병원에서는 관절염 약을 처방해주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집에서도 이층 계단을 오르며 다리를 저는 인호를 유심히 보던 남해댁이 장보러 가는 길에 우슬이란 약재와 돼지 사골을 구해 왔다. 뼈를 찜통에서 푹 고운 다음 그 속에 우슬을 넣고 달인 물을 인호에게 건네주었다. 이를 미심쩍게 바라보던 덕희는 인호가 마시는 걸 꺼려했지만 남해댁의 자신감 넘치는 주장에 한 발 물러서고 말았다.
“아이고, 언니. 우리 고향에선 할바시도 이거 묵고 산만디꺼지 잘만 댕긴단께요. 인호 물팍에는 이기 딱이시다.”
인호는 구수한 맛이 도는 약물을 잘 마셨다. 한 열흘 꾸준히 마셔서 그런지 무릎이 제법 부드러워진 듯했다. 이런 일 말고도 남해댁은 집안 곳곳에서 영향력을 넓혀 나갔다. 하지만 이정식한테는 통하지 않았다. 덕희에게 언니라는 호칭이 자연스러워진 남해댁은 어느 날 저녁 주방에서 거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언니, 식사 준비 다 됐응께 형부도 빨랑 오시라 하이소.”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이정식은 처음엔 사장님이라 부르던 그녀 입에서 형부라는 소리가 나오자 바로 불만을 표출했다.
“무슨 소리고? 나는 처제라곤 둔 적이 없는데.”
이를 못 알아들은 남해댁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언니, 형부가 뭐라캅니꺼? 얼렁 식사하러 안 오시고.”
하는 수없이 덕희가 주방 한쪽으로 그녀를 몰고 갔다. 나한테는 언니라 불러도 좋은데 인호 아버지는 사장님이라 부르라고 타이르는 소리가 거실에까지 흘러들어왔다. 잠시 후 남해댁이 주방 입구에서 소처럼 큰 눈을 끔벅였다.
“사장님, 진지 잡수러 오이소.”
못마땅한 얼굴로 일어서는 이정식을 따라 인호와 준호가 나란히 주방으로 들어갔다. 식사를 하는 동안 이정식의 표정은 풀어졌지만 남해댁은 큰 눈을 내리깔고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모습을 곁눈으로 살피며 덕희는 엷은 웃음을 날려보냈다.
남해댁은 황 기사의 처 정순과 자주 어울렸다. 산달이 가까운 정순의 빨랫감을 그녀가 맡아서 해주었다. 그리고 두 돌이 지난 정순의 아들도 잘 데리고 놀았다. 아이의 이름은 기철이었는데 그녀는 똘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신문지에 눈깔사탕을 싸서 칼자루로 쳐 잘게 부수어 똘아, 똘아 하면서 하나씩 먹여주었다. 그러면 기철은 날름날름 받아먹고 그녀 곁을 떠날 줄 몰랐다. 정순이 왜 남의 아들 반듯한 이름을 놔두고 똘이라 부르느냐고 눈을 흘겨도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자꾸 똘이, 똘이라고 불러줘야 알라가 똘똘해지는 기라. 나는 그래 부를 끼구마.”
남해댁은 유별나게 아이를 귀여워했다. 청소가 끝나 좀 한가한 시간이면 정순에게 가 기철을 안고 와선 거실에서 함께 노는 게 큰 낙이었다. 기철도 그녀를 잘 따라 별일은 없어 보였지만 덕희는 이를 문제 삼았다. 어디로 튈지 모를 아이인데 귀가 어두운 남해댁이 잠시 한눈 파는 사이 무슨 일이 있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혹 아이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안주인인 자기 책임이 있다는 걸 간과하지 않았다. 덕희가 자꾸 주의를 주자 남해댁은 기철을 데리고 거실이 아닌 마당에서 놀았다. 처음엔 저보다 덩치가 큰 코리를 무서워하던 기철은 남해댁이 코리를 다루는 걸 보고 가까이하기 시작했다. 코리는 끼니마다 밥을 챙겨주고 똥을 치워주는 남해댁을 주인으로 받들었다. 인호는 그 다음 서열로 밀려나 있었다. 인호가 산책을 데려나갈 땐 꼬리를 힘차게 흔들던 코리는 남해댁이 나타나면 꼬리뿐만 아니라 온 몸으로 반가워했다. 남해댁은 코리의 목덜미를 쓰다듬어주면서 서로 교감하는 시간도 충분히 가졌다. 남해댁 앞에서 코리는 마냥 행복해 보였다.
하루는 인호가 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남해댁이 그를 찾아왔다. 그녀의 큰 눈이 인호의 책상 위를 훑고 있었다.
“어제 청소할 때 본 긴데, 예쁜 알라 그림이 있던데......”
“아, 이거요?”
인호가 다니엘 신부에게서 받은 어린 예수 상본을 꺼내보였다.
“그래, 그거. 인호야, 그거 내 주믄 안 되까?”
“아니 왜요?”
“아아가 너무 예뻐서.....”
“아줌마, 이 아이가 누군지 알아요?”
인호가 또박또박 말하자 그녀는 잘 알아들었다.
“내가 모를까이, 예수님 아이가. 아줌마도 어릴 때는 예배당에 가고 그랬데이. 그때는 귀도 밝아서 찬송가도 잘 따라 불렀데이.”
“선물 받은 거라서 주긴 곤란한데 아줌마는 뭐하게요?”
“오랜만에 예수님 얼굴 보이 반갑고 또 너무 예뻐서 안 그라나. 내가 심심할 때 함 쳐다보고 자기 전에도 함 보고 잘라꼬 그라는 긴데, 안 되건나?”
남해댁이 말하는 ‘심심할 때’란 인호의 귀엔 많이 외로울 때로 들렸다. 그리고 자기 전에 본다는 것은 일종의 기도 행위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보았다. 인호는 상본을 그녀에게 넘겨주는 것이 자신이 책갈피로 쓰는 것보다 더 의미 있을 것 같았다. 상본을 받아 쥐고 뜻을 이룬 기쁨으로 방을 나가는 남해댁의 뒷모습에서 문득 대구의 이모 얼굴이 떠올랐다.
두 달 정도 흐르자 인호는 학급 친구들 개개인의 성향이나 장단점 등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을 수업태도에 따라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는 학생 최대의 명제가 공부라는 담임선생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친구들이었다. 둘째는 공부도 적당히 하면서 다른 방면에도 많은 관심을 갖는 부류였다. 단짝 태영처럼 바둑에 빠져 있거나 점심 후 휴식시간을 축구에 바치는 친구들 등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공부는 뒷전이고 잡담이나 공상을 즐기면서 수업 끝나는 종이 울리기만을 기다리는 부류였다. 많지는 않았지만 벌써부터 그런 친구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는데 인호는 자신도 세 번째에 해당하는 게 아닐까 의심을 가지면서도 둘째에 속한다고 서둘러 단정했다. 그는 꾸준히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는데 최근에 본 것이 황순원의 단편소설이었고 이제 그의 장편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을 입증할 만한 근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작가로서 소질이 있다고 믿었고 지금 하는 독서 행위 또한 공부라 여겼다. 그러나 인호는 세 번째에 가까운 수업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국어나 국사 등은 흥미를 잃지 않았지만 물리, 화학 등 과학 과목은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았다. 교과서 위에 소설책을 얹어 놓고 읽거나 상념에 잠길 때가 많았다. 성당에서 돌아오다 만난 걸인이 생각날 때도 있었고, 중학교 때의 여러 가지 일들을 되새김질하다가 수업 종료 종소리를 듣기도 했다. 주로 세실리아와 관련된 일들이었다. 인호는 하굣길을 태영과 같이 내려오면서 그런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 물어보았다.
“안 그래도 내가 한번 말할까 했는데 요새 니를 보면 처음 봤을 때하곤 영 달라진 것 같아. 수업시간에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게 솔직히 불안해. 지난번에 물리선생이 니한테 분필 조각을 던진 후부턴 내가 다 조마조마하다니깐. 무슨 일 있는 거가?”
“생각이 많아서 그래. 분위기 전환이 필요할 것 같아.”
“니도 바둑 배워볼래? 재미도 있지만 집중력 향상엔 제일이다.”
“태영아, 사실 나는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어.”
“그래? 어느 학굔데?”
“대구에 있어.”
“아, 니가 중학교 때 사귄 친구구나. 보고 싶다 이거네?”
“보고 싶지...... 친구가 좋긴 좋다. 니한테만 털어놓는 건데 이렇게 말이라도 하고나니 좀 낫다.”
“야, 니 그 애가 보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그런 답답한 마음을 갖고 공부가 머리에 들어오겠나. 가서 만나 봐라. 대구가 멀면 얼마나 멀다고.”
태영과 헤어져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동안 인호는 빠른 시일 내 대구로 갈 결심을 했다. 엄마가 자신의 의사를 존중해줄 리가 없다고 판단한 인호는 적당한 기회에 몰래 대구를 다녀오기로 했다. 때마침 결행에 옮길 날이 바로 찾아왔다. 이튿날 덕희가 계모임 하는 친구들과 오전 열시에 만나 기장에 가기로 약속을 잡는 전화 통화를 듣게 된 것이었다. 기장 대변항의 횟집에서 점심을 함께하는 모임이었지만 주목적은 인근의 땅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개발이 예정된 지역이라 투자 가치가 있는 땅을 매입할 목적을 가진 만남이었다.
다음날 인호는 교련 수업이 있는 날이라 교련복을 입고 학교에 갔다. 첫 시간 수업을 마치고 인호는 태영에게만 대구행을 알리고 조퇴 신청을 하기 위해 교무실을 찾았다. 그는 지난번 무릎 통증에 시달렸던 경험을 되살려 다리를 저는 시늉을 하며 담임선생 앞에 섰다. 남해댁이 달여 준 약으로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통증이 다 가신 것은 아니었다. 담임선생은 다리를 저는 인호를 보곤 조퇴 허락을 해주었다. 부산역 정류장을 지나기 전 버스에서 내릴까 고민하다가 교련복 차림으로 대구에 가는 것은 모양새가 아니라 생각되었다. 인호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집에 들렀다. 덕희가 출타하고 빈 거실엔 남해댁과 정순이 소파를 차지하고 있었고, 기철은 소파 한 쪽에서 잠에서 깬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인호를 살피던 정순은 상황을 서둘러 판단했다.
“인호, 우짠 일이고? 사모님 나가실 때 암말도 안 하시던데 니 학교 땡땡이 친 거 아이가?”
“땡땡이는 무슨, 몸이 안 좋아 조퇴했어요. 나 옷 갈아입고 병원 갈 겁니더.”
“병원 갈 정도로 어디가 아픈가....... 다리? 뱃속이?”
“아뇨, 마음의 병.”
인호는 재빨리 이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다. 그때 정순에게 인호가 내뱉은 말을 확인한 남해댁이 소리쳤다.
“뭐, 마음으 병! 니가 마음으 병이 있다 카믄 내 마음은 새까마케 타가 숯 돼뿟다! 인호야, 도로 올라가거래이. 니 나중에 혼나는 거 아줌마 책임 못 진데이.”
“걱정 말아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나는 바람 좀 쐬러 갑니더.”
인호가 나가는 모습을 남산만한 배를 하고 현관까지 걸음을 옮기며 바라보던 정순은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엄마야, 인호가 저런 구석이 있능가베. 저 착한 도련님이 친구 잘못 사귄 거 아이가.”
남해댁도 한숨을 내쉬고는 덩달아 중얼거렸다.
“내가 봐도 인호가 요새 좀 글터라. 성당도 못 댕기제, 글타고 준호처럼 친구가 만키라도 하나....... 혼자 마니 적적할 기라. 맞네, 그라이까 마음으 병 맞네. 우야꼬, 지 맘 지가 잘 달래야 될 낀데.”
경부선 열차를 탄 인호는 새로 지어진 동대구역에서 내렸다. 새 역이 대구역보다 이모집과 훨씬 가까웠다. 동네 어귀에서 낯익은 길들이 오랜만에 찾아온 인호를 반겨주었다. 이 개월여 만에 돌아왔는데도 그 사이 긴 시간이 흘러간 것 같았다. 집에 들어서니 안나 아주머니는 외출 중이었고 경숙 혼자 있었다. 인호는 자신을 보면 달려와 안아줄 줄 알았던 이모가 깜짝 놀라 멍하니 서 있는 모습에 그만 기가 한풀 꺾였다.
“아니, 요한아. 지금 이 시간에....... 학교는 우짜고?”
경숙은 인호가 대꾸 없이 고개를 숙이자 걱정에 잔뜩 휩싸인 얼굴로 다가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엄마는 니 여 온 거 아나? 모르는 기가? 아이고, 이를 우야겠노......”
경숙은 정신을 가다듬고 부산으로 전화를 걸 생각부터 했다. 인호가 입을 열었다.
“이모, 엄마 볼일 보러 나가고 업데이. 이모는 내가 안 보고 싶더나? 오랜만에 왔는데 이기 뭐꼬? 내가 못 올 데라도 온 기가? 섭섭하구로.”
경숙 앞에서 전에 쓰던 말씨가 되살아난 인호는 엄마 뜻에 밀려 성당을 쉬게 된 사실을 고자질하듯 들려주었다. 경숙은 인호의 말에 한숨을 내뱉었다.
“나도 니 엄마한테 공부 땜에 성당 쉬게 할 꺼란 말 들었데이. 세상에, 그래서 요한이가 안정을 못 찾는갑네. 그래도 이라믄 안된데이. 학생이 학교도 빼묵고 여 오믄 이모 맘이 편하건나.”
“이모, 대구 도로 오고 싶어.”
“나중에, 그건 나중에 일이고. 인자 고등학생인께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아이가. 이모 소원도 니 좋은 대학 가는 기데이. 점심은? 아직 못 묵었겠네? 배 고프겠구마. 오랜만에 이모가 해주는 밥 묵고 얼른 부산 돌아가거래이. 내가 역까지 바래다주꾸마.”
안나 아주머니는 교우의 소개로 한복 주문이 들어와 치수를 재러 갔다고 했다. 세실리아와 루시아도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의 얼굴이 눈앞을 서성거렸다. 점심을 들고 나서 역까지 바래다주려는 경숙의 뜻을 간신히 만류한 인호는 여기까지 와서 세실리아를 안 보고 갈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호는 버스 정류장에서 작별하기로 하고 이모와 함께 집을 나섰다. 이모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버스 안에서 인호는 지난날 자신이 쓴 시를 떠올렸다. 세실리아가 감탄했던 시였다. 그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그의 마음 하나가 한 마리 오리처럼 물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버스가 동대구역 앞에서 멈추었을 때 인호는 잠시 망설였지만 내리지 않았다.
버스 종점에서 내린 인호는 그 주변을 배회했다. 중학교 수업이 끝나려면 두 시간가량 남아 있었다. 어느 블록공장의 야적장에서 블록을 쌓는 작업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보다 두어 살 많아 보이는 일꾼이 보였다. 블록을 다 쌓아놓고 빈 리어카를 끌고 가던 그가 밖에서 지켜보고 있는 인호를 발견하곤 그를 향해 뭐라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인호는 그에게서 무안을 당한 기분으로 그 자리를 떴다. 그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방황하고 있는 자신과 비교가 되었다. 인호는 버스 종점으로 돌아와 앞서 타고 온 노선 버스에 다시 몸을 실었다.
인호는 세실리아의 학교 정문과 사선을 이룬 맞은 편 길모퉁이에서 몸을 최대한 숨기고 기다렸다. 한참 후 동그란 안경을 낀 세실리아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전 늘 보던 그 얼굴을 몰래 바라보아야 했다. 인호는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세실리아의 뒤를 따랐다. 세실리아와 함께 이야기 나누며 가던 여학생이 한쪽 골목길로 사라졌다. 혼자가 된 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걷다가 잠시 고개를 들었다 다시 숙이는 동작을 되풀이하며 걷고 있었다. 무슨 생각에 잠긴 것일까? 혹 내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인호는 큰길을 건너기 위해 걸음을 멈춘 그녀 앞으로 “세실아!” 하고 부르며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부산으로 잘 돌아갔으리라 믿고 있을 이모를 실망시킬 순 없었다. 길을 건너 예전에 함께 집으로 가려고 둘이 만나던 지점을 지나던 세실리아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인호 있는 쪽을 향했다. 순간 몸을 길가로 붙인 인호는 조심스럽게 세실리아를 살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가 집으로 들어가는 길로 접어들어 마침내 보이지 않자 인호는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허탈한 발걸음을 뗐다.
동대구역에서 부산행 차표를 끊기를 주저하던 인호는 매표구 앞 벤치에 앉았다. 수중에 돈은 좀 남아 있었다. 어차피 벌어진 일, 이대로 곧장 집으로 돌아가는 당연한 결말에서 벗어나려는 반발심이 솟아났다. 그는 자신이 현재 방황하고 있으며 이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일방적 처사와 연관된 것임을 이번 기회에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 세실리아를 만나지 않고 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학교에서 태영이가 여자 친구 잘 만나보고 왔냐고 물으면 뭐라 대답할 것인가. 청승맞게 먼발치서 바라만 보고 왔다고 얘기할 순 없는 것 아닌가. 더구나 지금쯤 그가 대구에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세실리아 또한 서운해 할 것만 같았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가로등이 켜진 거리를 돌아다니다 시장기를 느낀 인호는 작은 음식점을 들렀다. 비빔밥을 시켜 먹는 동안 집에서 기다릴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쯤 엄마도 이모를 통해 자신이 대구에 온 사실을 알고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걱정을 하고 있을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금 바로 이모한테 가 자신이 다시 왔음을 알리고 세실리아와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다음날 못 이기는 척 떠밀려 부산으로 돌아가는 방법이 괜찮게 여겨졌다. 그러나 낮에 보여준 이모의 태도로 보면 당장 되돌려 보내질 것만 같았다. 이모의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것이었다. 결국 인호는 다음날 아침 일찍 등교하는 세실리아를 만나고 가는 걸로 결정을 내렸다. 자꾸 생각하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 더 이상 번복 않기로 작정했다. 인호는 역 인근의 숙소를 찾았다. 삼층 건물로 된 여관이 있었다.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인호에게 숙박부를 내밀었다. 그는 까맣게 염색한 머리카락 아래 흰머리가 살짝 비치는 이마를 내보이며 인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인호가 이름과 부산의 주소를 적은 숙박부를 돌려주자 아직 절차가 남아 있다는 듯 그가 입을 떼기 시작했다.
“요금 받기 전에 물어볼 게 있는데, 학생이냐? ”
“네.”
“집이 부산인데 대구는 무슨 일로 왔노?”
“이모 보러 왔어요.”
“와, 이모집에서 안 자고?”
“이모한텐 간다고 하고 나왔어요.”
“막차가 아직 있으니 그거 타고 부산 가면 되겠는데.”
“내일 할 일이 남아 있어서요.”
인호는 바른대로 얘기했는데도 그는 쉬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인호 역시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결단을 위한 시간을 가진 그는 좀 전 깐깐한 태도를 버리더니 능글맞은 미소를 보였다. 목소리도 한결 부드럽게 바뀌었다.
“그래, 미성년자는 숙박 안 시키는 게 내 방침인데 오늘 하룻밤은 재워주마. 학생한테도 뭔 사정이 있겠지.”
간단한 샤워를 마친 인호는 여관의 창을 열었다. 그리고 성당이 있는 곳을 향해 서서 성호를 그었다. 가족들 모두 걱정할 것 없이 편안한 밤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주님이 자신을 잘 인도해주시길 빌었다. 세실리아를 꼭 한번 보고 가는 게 목적이었지만 그동안 억눌려 있던 자신의 존재를 홀로 대면해보고 싶은 욕구도 뒤따랐다. 맑은 정신으로 묵상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온갖 잡념이 번갈아 들어오며 그를 혼란에 빠뜨렸다.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쉬 들 것 같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역에 나가면 막차 타고 부산으로 갈 수 있다는 속삭임이 그를 흔들기 시작했다. 노기를 띤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시간이 지나자 세실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걱정과 두려움이 차츰 진정되면서 인호는 전에 비해 훨씬 대범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내일 세실리아 꼭 만나보고 가야지.”
인호는 깜짝 놀라워할 세실리아를 생각하면서 혼잣말을 되새겼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인호는 시계를 보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세실리아가 등교하기 전에 집 근처로 가는 덴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욕실에서 세면을 하고 나오니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혹 주인이 깨우는 건가 싶어 문을 열었다. 문 앞엔 뜻밖에도 경찰관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어리둥절해 하는 인호를 순식간에 닦아세웠다.
“야! 빨리 신 신어! 달아날 생각 말고 순순히 따라와!”
인호는 사태가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에 대처할 겨를도 없이 경찰에 이끌려 나왔다. 여관 입구를 지키던 전날 밤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순찰차에 실려 인근 파출소까지 간 인호는 그를 끌고 온 경찰에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아니, 제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예요. 이래 막 잡아와도 되는 겁니까? 갈 데가 있으니 바로 보내주세요.”
“조용히 해, 임마! 니 같은 가출 청소년 때문에 우리 일거리만 늘잖아. 성질 건드리지 말고 조용히 있어!”
인호를 연행한 경찰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압박했다. 이어서 한 계급 높은 경찰이 황당해하는 인호를 자기 책상 앞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인호가 다가가자 힐끗 치켜뜨는 눈빛에서 감도는 냉기가 상대하기 쉽지 않은 사람임을 일러주었다. 인호는 일단 자신이 가출학생이 아닌 모범생으로 보이도록 단정하고 고분고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저기 의자 끌고 와서 앉아.”
인호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의자를 그의 책상 앞에 놓고 앉았다.
“이름은?”
“이, 인, 호, 입니다.”
인호는 자신의 신상을 묻는 대로 밝히고, 집 전화번호까지 알려주었다. 만약 집에 전화가 없었더라면 학교로 연락이 갈 상황이었다. 인호의 공손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쌀쌀한 눈빛을 거두고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짜아식, 부모님 다 계셔, 집도 잘 사네. 남부럽지 않은 놈이 뭐가 부족해서 집을 뛰쳐나와. 부모 속 썩이는 놈은 나중에 다 후회하게 되어 있어.”
잠시 그는 마치 지난날의 자신을 반성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들어 허공을 향했다. 인호는 그에게 아침에 꼭 만날 사람이 있으니 보내달라고 간청했지만 인호가 부모의 허락 없이 집을 나온 사실을 확인한 이상 어림없는 일이었다. 인호는 파출소에서 끓여주는 라면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누가 신병을 인수하러 오기 전까진 꼼짝없이 있어야만 했다. 세실리아를 만나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게 안타까워 그를 신고한 여관집 남자가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여관에서 그를 끌고 온 경찰이 책을 한 권 건네주고 나갔다. 경찰서에서 제공하는 청소년용 명심보감이었다. 두 시간여 경과했을 때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오는 황기사를 볼 수 있었다. 인호와 눈빛으로 인사를 나눈 황기사는 신분증을 제시하고 신병인수 확인서에 서명했다. 파출소를 나오며 황기사는 이제 자기보다 키가 더 커버린 인호의 어깨를 툭 쳤다.
“흐흐. 인호, 독립운동이 너무 빠른 거 아니가.”
“아버지 화 많이 나셨죠?”
“크게 내색은 안 하시더라마는....... 그보담도 사모님은 잠을 아예 못 주무신 얼굴이더라.”
인호가 한숨을 내쉬자 그는 한 번 더 인호의 어깨를 쳤다.
“괘안타, 마. 머스마라믄 한번쯤 사고도 치고 그라는 기다. 사장님이 오는 길에 같이 점심해라고 돈 챙겨 주시는 거 보믄 화도 거지반 풀렸을 끼다.”
차가 집 앞에 닿을 때까지 울적하던 기분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시기 시작했다. 꾸중 듣는 일은 둘째 치고 우선 집이 주는 포근한 기운이 그를 감싸주었다. 코리가 반갑다고 컹컹 짖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거실에서 덕희와 대면한 인호는 눈 둘 데를 찾지 못하고 어떻게 말문을 열지 고민했다. 그리고 엄마 앞에 일단 사죄의 인사를 한다는 자세로 머리를 푹 수그렸다. 머리를 숙인 채 기다려도 덕희가 입을 열지 않자 침묵이 버거워진 인호는 죄송하다는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이층 계단을 밟았다. 그때서야 덕희의 입에서 울분에 싸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죄송하다는 말 한 마디면 다야? 무릎 꿇고 빌어도 시원찮을 녀석이....... 이 엄마 속 다 태워놓고 죄송하다는 말 한 마디가 다냐구?”
인호는 걸음을 돌려 당장 엄마 앞에 무릎을 꿇고 싶었으나 두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생각과 행동이 다르게 움직였다. 마음은 엄마 앞에 가 있어도 몸은 이층으로 올라가버렸다. 그는 방안에 들어박혀 상념에 잠겨들었다. 전날 집을 나온 건 분명 잘못한 일이었지만 죄책감이 들 정도는 아니었는데 엄마를 보는 순간 자신의 의도보다 한참 잘못된 결과가 빚어졌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저녁에 아버지가 오셨다고 내려가자는 준호의 말이 있기까지 인호는 방에서 꼼짝 않고 있었다.
침묵 속의 저녁식사였다. 개도 먹을 땐 안 때린다고 이정식은 인호에게 화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신문에서 본 적이 있는 청소년기의 이유 없는 반항이 인호에게도 나타난 것이라 간주했다. 없었던 일로 덮어둘 사안은 아니지만 매를 드는 것도 능사는 아닌 성 싶었다. 심사숙고 끝에 적당한 선에서 나무라고, 다음엔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정리할 참이었다.
식사 후 이정식은 소파로 인호를 불러 앉혔다. 주방에서완 달리 냉랭한 기류를 감지한 준호는 서둘러 이층을 올랐다. 남해댁은 둥그런 눈을 더 크게 뜨고 주방 한쪽에서 거실을 넘어다보고 있었다. 인호에게 쓰라린 배신을 느끼고 어느 정도 회복을 한 덕희는 남편이 아들을 어떻게 훈계하는지 지켜보기 위해 그 옆에 앉았다. 이정식은 먼저 인호에게 말없이 대구로 간 자초지종을 물어 도대체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알고자 했다. 계획을 실행으로 옮기는 능력이 탁월한 사업가라 자부하는 이정식에게도 뜻하지 않게 일이 꼬일 때도 있었다. 가만히 앉아 꾸중을 기다릴 줄 알았던 인호가 불쑥 일어선 것이었다.
“실망을 끼쳐 죄송합니다. 다신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인호는 긴장된 표정으로 말을 마치고 꾸벅 절을 하자마자 자리를 떴다. 이정식은 고개를 돌려 이층으로 오르는 아들을 넋 놓고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에서 인호에겐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놈의 손이요...... 내 말은 안 들어도 된다 이거가.”
이정식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리더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미 인호가 올라가버린 계단에서 시선을 거둔 다음 한 마디 더 얹었다.
“저 놈이 머리통 굵어졌다고 선수 칠 줄도 아네.”
◇ 이광 시인 :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부산시조 작품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집 《당신, 원본인가요》, 《소리가 강을 건넌다》, 《바람이 사람 같다》, 현대시조 100인선 《시장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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