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장편소설】 저곳 - 3. 병구과 인정①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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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0 17:25 | 최종 수정 2023.12.14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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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3-1. 주화론자와 주전론자
세상에 나만큼 죽어서 치욕을 당한 사람이 또 있을까? 나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모욕들을 다 담는다면 큰 수영장 만 개로도 모자랄 걸. 인숙아 내 하소연 좀 들어 볼래. 도대체 내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잘못을 했으니까 욕을 먹겠지. 아니 때 굴뚝에 연기날까?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머리가 좋아 과거에 급제해 출세가도를 달렸어지. 수완이 좋았나봐. 당시 우리나라는 오랑캐들의 침략에 힘들었어. 왕이 오랑캐한테 붙잡힐 때 나도 같이 붙잡혀서 고생을 많이 했었지. 다행이 나는 도망쳐 나왔어. 그때 우리나라는 윗쪽 오랑캐들이 하도 우릴 못살게 굴고 쳐들어 오고 해서 아랫쪽으로 피난갈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피난 간 나라에서 오랑캐한테 끌려간 왕의 아들이 왕이 되었지. 아들 왕은 나를 신뢰하며 재상으로 임명했어. 그 오랑캐 놈들은 다른 건 우리보다 훨씬 못해도 싸움 하나는 정말 잘 했어. 우리가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어. 도망 내려왔는데 조정은 두 파로 갈렸어. 대신들 중 한 명인 나는 오랑캐와의 화친 조약을 맺으며 전쟁하지 말자는 주화론을 주장했어. 일단 싸움을 피하고 난 후 우리의 힘을 키워 상황을 보아 그 때 가서 싸움을 할 땐 하자고 했지. 그런데 나의 정적들은 무조건 당장 윗쪽으로 쳐들어가 빼앗긴 영토를 찾자는 주전론을 주장했어. 주화론과 주전론이 격렬하게 대립했지. 내가 볼 때 주화론이 현실적이었어. 힘도 없어 도망쳐 내려온 주제에 무조건 올라가 싸운다는 주전론은 아주 비현실적이었어. 주화론과 주전론의 대결이었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상투적 얘기같지 않아. 언뜻 듣기에는 주전론이 멋있게 들려. 싸나이다워. 선명하니 폼나 보여. 주화론은 왠지 비겁하게 들리지. 찌질이같지. 그래서 주전론자들의 입김이 세질 수 있어. 내가 이런 일을 겪고 수백년 후에 저기 어떤 나라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지. 주화론과 주전론의 대결이 펼쳐졌어. 한 대신은 저 드센 오랑캐 놈들과 싸우다간 전멸이니 일단 생존을 위해 화친을 맺어야 한다고 주화론을 주장했지. 다른 한 대신은 죽기살기로 싸워야 한다고 주전론을 격렬히 주장했지. 주화론자 대신이 왕에게 올리려고 쓴 화친 문서를 찢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더군. 사생결단 결사항전, 싸우다 죽자! 그러니 일단 군사력을 테스트 해볼 겸 병사 300명을 싸우라고 성문 밖으로 내보냈다더군. 그런데 300명의 병사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나가자마자 전원 몰살당했다더군. 페르시아의 침입에 맞선 300명의 스파르타 용사들은 싸우다 장렬히 죽었지만 그 300명 병사들은 그냥 개죽음을 당했대. 결국 사태를 파악하고 결론이 났겠지. 싸우고 싶어도 힘이 딸려 싸울 수 없으니 결국 화친을 택할 수 밖에 없었겠지. 그래서 왕이 성문을 나가 오랑캐 두목에게 엎드려 굴욕적인 절을 하고 수만 명 백성들이 오랑캐 나라로 끌려 갔었다지.
아! 얼마나 비참했을까? 헛되이 죽어간 300명 병사들 참 불쌍하다. 아무튼 싸움을 않고 화친을 했으니 주화론자들이 주전론자들을 이긴 거네.
일단은 그랬지. 그런데 꼭 그런 게 아니었어. 이후 상황이 달라졌지. 주화론자들은 정신적으로 위축되고 주전론자들의 정치적 세력이 커지게 되었어. 정치 바닥이라는 데가 이상한 데가 많아. 싸울 능력이 없어서 화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뿐인데 그런 와중에 전쟁하자고 주장했던 사람들은 숭고한 정신을 가진 고고한 애국자로 격상되고 화친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그냥 얼빠진 배신자 놈들로 격하되었어. 나중에 주전론자들의 후예들은 치열한 정치투쟁 끝에 정권을 독식하고 민생을 거덜내며 끝내 나라를 말아먹었다지. 그러고선 아직도 의기양양하게 군다고 들었어.
아니 그게 말이 되? 도무지 이해가 안되네. 세상 참 요상하게 돌아가는구나. 세상은 요지경이란 말이 괜한 게 아니네. 그리고 주화론자들의 주장대로 화친을 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아났잖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정신승리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해지는 거지. 주화론자들은 센 오랑캐 놈들한테 당한 분풀이로 삼는 거지. 반면에 주전론자들은 오랑캐의 강압에 맞선 애국자가 되는 거지. 상부의 강압적 지시로 300명이 억지로 빠져나가 죽은 성문은 전승문(全勝門)으로 승화되고, 돌아가는 국제정세를 오판하며 오랑캐를 얕보다 참극을 초래했던 찌질이 왕이 걸었던 성문 옆 길은 국왕의 길이 되고, 그냥 일방적으로 당했기에 용감하게 싸운 장수가 한 명도 없었는데도 상상속으로 장수의 길이 만들어지는 거지. 참담하게 깨졌으니 정신승리라도 하겠다는 건 이해되지만 역사를 왜곡하며 마냥 미화시키는 것은 안 될 일이지. 그런데 흥행이 목적인 영화 같은 데서 영화를 더욱 극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만들기 위해서 역사왜곡이 심하게 일어나지. 영화에서 주전론을 극렬히 주장한 대신은 화친을 해야 할 수밖에 없자 목을 매 자결을 하는데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다지. 그는 왕이 오랑캐 앞에서 항복의 절을 할 때 몰래 성을 빠져나가 귀향해서 팔순을 넘기며 오래 살았다더군. 그리고 충의와 절개의 상징으로 추앙까지 받는다더군. 반면에 오랑캐와의 화친을 주장했던 대신은 나중에 간신 배신자 소리를 들었다더군.
주전론에 맞서 주화론을 주장했던 병구도 그렇게 되었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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