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3호-신작시】 갑오징어 외 9편 - 김 영 화
장소시학
승인
2023.11.02 12:05 | 최종 수정 2023.11.05 08:59
의견
0
신작시
갑오징어
김 영 화
생물이라 시세 따라 몸값 들쑥날쑥더니
마트 할인행사에서 데려온
저 대양 쏘다니던 두꺼운 갑옷 더듬이 촉수
성마른 성정 아니랄까 스스로 덮어쓴 진한 먹
그를 토막 내 헤쳐 놓고 문득 들여다본다
늑골 이어붙인 듯 매끈하고 하얀 돛대 한 척
두툼한 살 속 절대 허우적거리지 않겠다는 듯
단단한 결기가 박물관 화석처럼 말 건다
스무 살 막막했던 첫 출근 자주 넘어졌던 비린 꿈들
월급봉투에서 꺼내 산 두어 권 책이
그나마 쓰디쓴 초년생 비위 받치던 버팀목이던
아래보다 위 속보다 바깥이 먼저 뵈던 미숙했던 눈길
쉰 끄트머리 주방 개수대 서서
뜨거운 물에 데쳐지고도 더 조여진 네 몸 빌려
돌아다본다
이젠 아이들 앞가림 덧대 자주 흔들리는 등대
내 돛은
몸 어느 구석 온전히 정박하지 못하고
아직도 숨 고르기나 하고 있다
이유 있는 비행
함안 강지골 강명리사지 발굴터
납작돌로 괸 석축 제 모습 남아 산 중턱 받치고
널찍했을 앞마당에 부서진 기왓장인지
여기저기 흩뿌린 듯 줄무늬 조각들 뒹굴고 있다
조사단이 헤집고 간 벌건 흙 쓸린 상처들
아직 새벽 찬 서리 내리고 아랫마을 못은
하루 다르게 겹 얼음 풀렸다 얼었다 메워 가는데
코끝 매운바람 빼곤 막힘없는 햇살 달고 순하다
고려 시대에서 통일신라 거슬렀다는 풍문
마지막 승려가 스스로 떠난 폐문인지
잦은 환란에 할퀴어 스러졌는지 알 길 없지만
어느 누가 이 골짜기 멧밥 지고 서러운 걸음 했을
동냥젖으로 자란 아이 맨발로 든 산문
갸웃한 상념 가파르게 오르내린다
저 멀리 까마귀 굼뜨게 우는데
머리 드니 소리 없이 매 한 마리 정찰 비행한다
누대에 걸쳐 대가 없이 복무 중인가도 싶고
산딸나무 칡넝쿨 사이 참새 떼 조잘조잘 박작거리는데
어느새 어둑살이 성큼 내려앉는다
요즘 어디
쉿! 이리와
꼬신내 부엌 바닥에 깔리면
밥물 잦아든 아궁이 잔불 속 새끼 조기
윗집 연이 엄마는 장날이면 밥상 들이기 전
뼈째 한 마리 뜯고 본다는데
할메 너그 아버지 오빠들 동생 틈에
언제 맛이나 보겄노
얼른 삼킨 살점 목젖에 올라붙고
엄마와 딸 소심한 연대
잿더미에 몰래 묻었다
설악초
칠원 밥집 할머니 마당에서 얻어 온 씨앗들 꼬들꼬들 물기 마르면 때맞춤이다 소나무 바람막이에 메밀밭 이웃한 공원묘원 쉼터 찬 서리 언 땅 먹거리 찾아 헤맬 까마귀 길손에 들킬세라 얼른 주먹치기로 꾹꾹 눌러 심는다 종종 앉은걸음으로 뒤돌아보면 산까치가 심은 듯 졸졸 따라오는 발자국
봄 밟고 8월 초순 눈꽃 소복하다 알고도 눈 감아 준 뭇까마귀 멧새들 엄마 떨군 신부 웨딩부케 마냥 새하얗게 부신 이파리 꽃
서정시
첫 시집 받고 작은오빠
잘 읽었다
그런데 이젠 서정시를 쓰려무나
오빠
이게 서정시인데요
무슨 서정시가
이렇게 우울하냐
제 속마음
끄집어 헤쳐 놓은
생물인데요
시는
부드러워야 시답지
이젠 아프지 않은 시를 써봐라
간장밥
딸깍 빨간 곤로에 앉힌 냄비밥이 타닥타닥 눋는다
좁다란 부엌 타일 벽을 기던 석유 내 자취 감추고
감질나게 가동거리던 양은 뚜껑은 매번 지레뜸이다
하교 후 동네 동생과 찬 없이 비벼
허겁지겁 씹을 새 없이 삼키던 허기는 바닥을 긁어도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여섯 터울 회사 선배와 혼인한 친구 집에서
달걀 치즈에 비빈 아기 밥
불현듯 한 숟가락 거들고 싶어 삼켰던 침
한참 후 여드름 굵은 목소리로 그 아이 인사할 때
부끄럽던
먹어도 고팠던 자취생 선밥
이 길은 어디로
국수 가닥 맹키로 호로록 넘기도록 썰어 달라 캐라
밀치 꼬신 2월이면 아버지 자꾸 생각나
재가요양 환자 돌보는 친구
이태 전 홀아버지 여읜 친구도 불러
뜨거운 국물 홀짝거린다
앉으면 빠지지 않는 고향 마당골
봄이면 동네 밭 쑥 캐러 가자는 약속
꾸미처럼 오늘도 얹었다 흘리고
꽃비 내린 이른 아침 감꽃 먼저 차지하러
눈곱 매달고 달리던 골목 얘기도
금방 멍들던 목걸이로 슬며시 떨구고
헤어져 나와 혼자 걷는다
여느 때 무심히 보던 보도블록 조각들
문양 속 갇혔던 비명이 새고
두 줄로 이어진 점자 길눈
끊긴 도로 끝
무뎌지다
가까운 이들 부음이 날아든다
언제까지나 주변을 싸고 있을 것만 같은
가족 스크럼 또
녹슨 세월에 느슨해진 매듭이
좀 먹고 삭으며 툭 한 올씩 끊겨 나간다
알아채기도 전에 소리 없는 무서리
친구 여럿 모여
영정 바라보고 잔 올린 후
깊이 엎드렸던 고개를 들고 돌아 나와
미지근한 시락국에 무심코 밥 만다
주고받는 근심은 이미 낡은 의례
죽음이 삶을 예사로 타 넘는 일상
아직은 이른데 일렁이지 않고
피식 꺼져버리는
식은 마음이 바닥에 구른다
유월
가뭄 끝 부슬비에
어린 모 고개 제법 빳빳하다
콘크리트 부조 벽
기념탑만 에돌아선 곳
경인년전쟁에
지정 나루 붉은 물길
끝없이 이어졌었다는 소문
윗녘에선 못물 없어 한숨소리
가쁘다는데
강가라 무논도
축복인가
이 저런 사정 알 만한지
큰 놈 작은 놈
흰 진돗개 둘
도리질하고
헤실헤실
지정다리 건넌다
점
점이 위험하다
몸 중앙에 점 있으면
자신을 찌른다는 점
사춘기 앓을 새 없이
엄마가 세상 떠난 친구는
“다 점 때문이야 점”
엄마 닮아 하필 배꼽 가운데
그놈의 점
언제 내가 나를 밀어낼까
두렵다는 아직 어렸던 친구
젖가슴 아래 한가운데
또렷하게 박힌 내 점
나도 언젠가
나도 언젠가
낮의 점
밤의 점
무수히 비껴간 굴욕의 날들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
숟가락으로도 파낼 수 없는
깊은 못
◇ 김영화
| 시인. 의령 출신. 마산에 거주하고 있으며 일터는 의령 신반. 6인 공동시집 『양파집』(2020)과 계간 『여기』 시부문 신인상(2021)으로 문학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꼬뚜레 이사』(2022)를 냄. san5f@naver.com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