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브리드 사고'를 주제로 TED 강연하는 레이 커즈와일. 커즈와일은 과학자, 발명가, 미래학자이자 구글 엔지니어링 책임자이다. 왼쪽 작은 사진은 그의 저서 '특이점이 온다' 표지.
2016년 미국 조지아텍에서 온라인 교과과정을 신청하는 학생들을 상담한 조교 중에 ‘질 왓슨(Jill Watson)’이라는 ‘여성’이 있었다. 상담을 성심성의껏 해줄 뿐 아니라 인간적인 호감까지 주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질 왓슨이 대학원생 중 한 명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질 왓슨은 인공지능이었다!
그 ‘질 왓슨’이 바로 IBM에서 개발한 현대 인공지능의 상징 ‘왓슨(Watson)’이다. 2011년에는 미국 ABC방송의 퀴즈쇼 제퍼디(Jeopardy)에서 인간 챔피언을 누르고 우승을 하였고, 2013년 암치료와 관련한 의료분야에 진출하기 시작하였으며, 법률서비스, 금융투자, 교통시스템 등 그 응용분야의 한계를 뛰어 넘고 있다.
레딩대학에서 개발한 ‘유진’을 제외한다면 현재까지 공식적인 뢰브너 상(Loebner Prize) 수상자 중 2008년 우승자인 엘봇(elbot)이라는 컴퓨터가 가장 성적이 좋았다. 심사위원 12명 중 3명이 엘봇을 진짜 인간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www.elbot.com 으로 접속하면 지금도 엘봇과 대화할 수 있다. 직접 시도해보니 놀라울 정도로 똑 부러지게 답변을 하는가 하면 때로는 전혀 엉뚱한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심사위원의 수준에 따라서는 속아 넘어갈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일상적으로 오고가는 인간들의 대화를 따라 가기에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튜링테스트를 통해 가장 인간적인 컴퓨터를 선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창안된 뢰브너 상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인간적인 인간'을 선발하기에 이른다.
직접 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정확히는 화면에 표시)만으로는 기계와 인간의 구별이 모호해진다. 진짜 인간의 대답도 기계의 대답으로 간주되는 현상이 생기면서 제한된 조건에서 가장 인간적인 인간을 뽑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된 것이다.
뢰브너 상 수상자를 선정하는 대회에서는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심사위원과 컴퓨터, 인간들 간의 블라인드 대화가 이루어진다. 컴퓨터든 인간이든 ‘가장 인간답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심사위원을 속이거나 설득시킬 기발한 방법을 동원한다. 컴퓨터가 인간이 아님을 알아내기는 어렵지 않다고 한다. 컴퓨터는 인간인 심사위원들의 물음에 모순되거나 동문서답식의 응답을 내놓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인간적인 인간을 찾아내는 문제는 쉽지 않다. 인간과의 대화에서는 특정 표현이 의도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 혼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닌 척 할 수도 있고, 사람임을 확신시키기 위한 무리한 시도가 오히려 의심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인간다움'은 무엇으로 결정되는 것일까에 대한 다소 철학적인 문제가 제기되고, '인간은 ( )을/를 하는 유일한 존재다'라는 매우 오래되고 익숙한 질문이 제기된다. 기계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인간만 가질 수 있는 품성, 태도, 행위는 무엇일까?
'가장 인간적인 컴퓨터'처럼 기계도 사람을 속일 수 있고, 거짓말도 하며, 근엄하거나 우스운 태도를 보이는 것이 가능하며, 인간이 반드시 합리적이고 예측할 수 있는 행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전제로 볼 때 기계가 보이는 전혀 엉뚱한 반응이 인간의 반응일 수도 있다는 착각을 일으킬 여지도 있다.
그러면 누가 뭐라 해도 의심할 여지없는 '인간성'의 징표는 무엇일까? 튜링테스트에서는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그저 너 자신이 되어라")이 하나의 방법으로 추천되기도 하고, 변덕스러움, 까칠함 같은 괴팍한 성향들을 컴퓨터와 변별되는 요소로 제시하고 있기는 하나, 궁극적으로는 정답을 상정할 수 없는 질문이다.
반복된 훈련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는 인간이 기계의 계산 능력을 따라 갈수 있는 것처럼, 기계도 지속적으로 결함을 수정하면서 인간성의 복잡 미묘한 부분까지 흉내 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튜링테스트가 화면으로 출력되는 문자적인 대화에 국한되고 매우 제한적인 범위에서 인간과 컴퓨터, 인간과 인간의 소통을 시험한 것이고, 인공지능의 수준을 판별하기 위한 테스트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인간 같은 기계, 기계 같은 인간, 기계 같은 기계, 인간 같은 인간을 분별해 내는 작업을 통해 기계가 가진 지적 능력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 인간이 인간 스스로에게 가진 호기심을 상호대립적인 구도를 통해 풀어내고자 한 시도로서는 훌륭한 방법인 것 같다.
'가장 인간적인 인간'의 선발은 인간과 컴퓨터의 경계, 점점 인간화 되는 컴퓨터에 대한 한계와 전망을 다루면서 결국 진정한 인간의 모습, 인간을 어떤 다른 존재와 구별되게 하는 핵심적인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먹고 살기도 바쁜 세상에 인간과 기계의 말장난 이라니. 왜 튜링테스트니 뢰브너 상이니 하는 이상한 물건이 고안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에는 남들보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쓸데없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인생을 거는 사람도 있으므로 아직은 이런 일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가십거리로 여겨 질 수 있다.
적어도 우리 세대 동안 사람같이 생긴 기계가 접근해서 사람에게 사기 치는 일은 별로 일어날 것 같지 않고 (너무 안이한 전망인가?), 컴퓨터와의 대결에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성의 상실의 의미하는 것은 아니므로 별로 실망할 일도 아니다.
인간은 원래 지극히 불완전한 존재이고, 현실 세상에서는 인간이 다른 동물이나 기계보다도 못하게 취급받는 경우도 허다하므로 극히 제한된 테스트를 통해 인간성을 측정하는 것이 사치스런 장난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DNA 염기서열의 발견으로 인해 생물학적으로는 인간과 다른 동물의 구별은 명확해졌다. 염기서열조차 없는 무기물인 기계와 문화라는 최고의 발명품을 만들어낸 인간을 굳이 비교대상에 올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현실은 미래를 향해 쉴 새 없이 가고 있고 우리는 ‘자아’도 없는 무기물과 경쟁을 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세계적인 미래학자이자 구글의 인공지능 책임자인 레이 커즈와일은 『특이점이 온다』라는 책에서 "2045년을 특이점(singularity)의 시기로 예상한다"면서 "이 시점은 인간 역량이 심오하게, 돌이킬 수 없는 변환을 맞는 때"라고 했다. 또 그 이후에는 인간과 기계가 합일되는 영생과 불멸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예측도 하고 있다.
머지 않은 미래에 현생 인류가 절멸할 것이라고 예고한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도 최근 그의 새로운 저서 『호모 데우스』에서 빈부차이에 의해 극단적으로 분리되는 인공지능 세상의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리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전망들이 공상과학소설에나 나오는 완전히 헛소리라는 반박이 많고, 생각보다 그렇게 급격하게 변하는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도 설득력 있게 제기된다.
예일대 신경과학과 이대열 교수는 '지능의 탄생'에서 지능이란 근본적으로 자기복제를 핵심으로 하는 생명현상의 일부이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완전히 대체하는 일은 당분간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기계는 원래 인간을 대리하는 역할에 그치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인공지능을 장착한 기계가 생명체처럼 자기 복제를 시작하지 않는 한, 인간이 인공지능의 관리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대리관계는 유지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기술적인 한계가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급격한 변화가 노동과 경제시스템의 붕괴를 가져와서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의 대규모 투자가 지속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정치적 이해관계가 있는 국가와 집단지성을 가진 인류가 인공지능에 의한 디스토피아적 상황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그러나 모든 노력을 하더라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고, 운 나쁘면 살아서 그런 세상을 맞닥뜨릴 수도 있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헤아릴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숙제들이 던져질 것이다. 벌써부터 잉여이익의 분배나 윤리, 법률 문제까지 논의되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인간이 과연 유토피아냐, 디스토피아냐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잡을 수 있을 지 의문을 품는다. 기회는 단 한 번밖에 없고, 그 기회를 놓치면 이후의 세상은 예측을 할 수 없으며 사실상 인간의 시대는 끝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40년 전 어느 지방소도시의 중학교 교무실 구석에서 머리를 처박고 인간 컴퓨터 노릇을 한 시절이 있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당연히 인간이다. 인간으로서 기계보다 더 빠른 계산능력을 가졌었고, 그런 능력이 긴요하게 쓰인 마지막 세상을 보냈다.
이제 그런 능력은 별로 소용치도 않고 새삼스레 개발할 이유도 없다. 어쩌다 회사 회식을 끝내고 식당 카운터에서 계산을 할 때, 주인보다 더 빨리 계산을 끝내 놓고 기다리는 정도의 재미만 즐길 뿐이다.
이제 그런 소소한 재미조차 느낄 수 없는 세상이 올 지도 모르겠다. 모든 식당의 카운터에 사람 대신 기계가 지키고 있는 장면은 현실적으로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닐 듯하다. 공상은 공상만으로 끝나는 것이 좋은데, 미국 실리콘 밸리의 어느 실험실에서는 공상조차 못하는 어떤 일들이 이미 벌어지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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