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는 현대기술문명의 상징이다. 그 컴퓨터는 양자역학의 산물이다. 따라서 현대기술문명은 양자문명이나 마찬가지다. 출처: 인스티즈
러시아 출신의 미국 천체물리학자로 빅뱅 이론의 창시자인 조지 가모프의 에세이집 ‘나의 세계선(My World Line)’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영국의 물리학자 파울러(R. H. F. Fowler)는 런던 왕립협회에서 있은 나의 강의가 끝난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파동역학에 따르면 통과하지 못할 장벽이란 없습니다. 이 강의실에 있는 여러분은 출입문이나 창문을 열지 않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In wave mechanics there are no impenetrable barriers, and as the British physicist R. H. Fowler put it after my lecture on that subject at the Royal Society of London. “Anyone at present in this room has a finite chance of leaving it without opening the door, or, of course, without thrown out of the window.” <George Gamow, ‘My World Line’(1970)>
문을 열지 않고 밖으로 나갈 수 있다니! 우리가 귀신이라도 된다는 말일까요? 대학시절 양자역학(French & Taylor) 책에서 이 문구를 보고 흥미로운 양자역학의 세계에 더욱 매료됐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처럼 기묘한 양자의 세계는 공상이 아니라 현대 기술문명의 근간이 되고 있습니다. 양자론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천재물리학자 폴 디랙에게 양자역학을 소개한 R.H. 파울러(왼쪽). 출처: 위키피디아'. 장벽 관통'이라는 기묘한 양자역학의 현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발언이 실려 있는 프렌치 &테일러의 양자역학 교과서 일부분.
양자역학, 현대기술문명의 초석
양자론을 응용한 기술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반도체 기술입니다. 이것이 없었다면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오늘날 전자문명, 혹은 디지털문명은 아예 세워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같은 디지털문명은 바로 서두에서 소개한 기묘한 미시세계의 현상을 설명하는 양자역학 응용기술이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원자 혹은 물체 안 전자의 운동 양식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양자역학이 정립되었기에 가능해졌지요.
컴퓨터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숫자를 이용한다 해서 디지털 방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이 없었다면 컴퓨터는 아예 탄생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의 현대문명은 근본을 따지자면 디지털문명이라기보다 양자문명(quantum civilization)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확할 것 같습니다.
양자역학은 전자 등 미시적 입자의 운동을 기술하는 물리학입니다. 고체는 금속과 같이 전기를 잘 통하는 도체, 나무나 유리처럼 전기가 잘 통하지 않는 부도체(절연체) 그리고 그 중간 성질의 물질인 반도체로 나뉩니다. 전류는 전자의 흐름을 말하는데,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종류의 고체는 전자의 흐름이 다르기 때문에 전기적인 성질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특히 실리콘이나 게르마늄 등 반도체에 소량의 불순물을 섞는 것으로 전기적인 성질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양자역학에 의해 명확히 규명되었습니다. 이를 응용한 반도체 부품, 즉 다이오드나 트랜지스터 LIC(대규모 집적회로) 등은 마이크로 전자제품의 주역이 되어 우리들 일상생활을 변혁시켰습니다.
서두에 소개한 파울러의 ‘출입문이나 창문을 열지 않고 밖으로 나갈 유한한 가능성을 갖는다’는 구절은 양자역학의 ‘장벽 관통(barrier penetration)’의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그런데 장벽 관통 효과를 절묘하게 응용한 것이 메모리 반도체입니다. 반도체는 금속이나 도체에서처럼 전자가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고 양자역학적인 에너지 우물에 갇혀 있는 구조로 설명됩니다. 에너지 우물에 갇힌 전자들의 일부가 에너지 우물의 벽을 뚫거(tunneling)나 뛰어넘어(jumpping) 나오기도 합니다.
전자가 우물에 갇히는 성질은 반도체의 기억 능력을 갖게 해줌으로써 메모리 반도체의 탄생을 가져왔습니다. 이외에도 초전도체, 다양한 금속재료 등 현대기술문명에 필수적인 신소재의 개발은 양자역학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양자문명은 진행형
최근에는 꿈의 컴퓨터인 양자컴퓨터 개발과 양자 얽힘 현상을 이용한 공간이동 연구도 시도되고 있습니다. 양자역학의 획기적인 실험 기법 개발에 성공한 학자들(프랑스의 세르주 아로슈와 미국의 데이비드 와인랜드)의 201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은 양자공학시대가 먼 미래의 꿈이 아님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양자역학은 그동안 컴퓨터로 대표되는 디지털문명의 기초를 제공한 데 나아가 향후 양자컴퓨터와 공간이동을 현실화하는 첨단 양자공학문명을 견인할 게 틀림없습니다. 현재와 미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양자문명의 틀을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과학의 한 이론을 넘어 현대 기술문명의 근간이 된다는 점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류가 누리는 물질문명은 대부분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인류 인식의 지평이 크게 확대되었다면, 그것은 양자론과 상대성이론 덕분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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