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1호기 전경

(3) 고리2호기 재가동과 폐로산업

부산·울산·경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원전을 끼고 사는 지역이다. 그 중심에 있는 고리1호기는 2017년 영구정지 이후 2025년부터 본격적인 해체 절차에 들어가며,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용 원전 폐로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국제적으로 2050년까지 폐로 예정 원전은 588기에 이르며 시장 규모는 500조 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부산은 고리1호기 폐로를 바탕으로 국내·해외 폐로산업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갖고 있다. 그러나 최근 원자력안전위원회의 고리2호기 수명연장 승인으로 이러한 기회는 크게 흔들리고 있다.

고리2호기 수명연장 재가동은 안전문제는 차지하고서라도 ‘부산 폐로산업’ 입장에선 단기적으로는 물량과 긴장감을 빼버리는 악재이고, 장기적으로도 고리1호기와 연계된 ‘폐로 클러스터’ 구상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결정이다. 다만 고리1호기 하나만으로도 10년 넘는 대형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부산시가 어떻게 방향을 잡느냐에 따라 여전히 ‘폐로산업의 선도도시’가 되느냐, 그냥 ‘그대로 원전도시’로 남느냐가 갈릴 것이다.

고리1호기 해체작업은 총 사업비 약 1조700억 원, 약 12년으로 추산되는 국내 첫 상업용 원전 해체 프로젝트이다. 두산에너빌리티·HJ중공업·한전KPS 등이 비관리구역 해체공사를 수주해 2028년까지 1단계를 수행할 예정이다. 부산시는 2010년대 중반부터 ‘고리1호기, 월성1호기 ,고리2~4호기 등 2020~2029년 설계수명 만료 10기’를 겨냥해 ‘원전해체산업의 글로벌 허브’를 표방한 적이 있다.

최근 부산발전연구원·부산시 자료에서도 ‘고리원전 + 해체·폐기물 처리 + 방사선의학 + SMR(소형모듈원자로) 부품 산업’을 묶은 ‘원전 관련 산업 생태계’를 부산의 신성장 축으로 보겠다는 기조가 유지돼왔다. 즉, 정책 구상은 ‘운전+해체+SMR’을 다 잡겠다는 혼합형인데, 실제로 있는 물량은 고리1호기 폐로 하나뿐인 상태이다.

고리2호기 수명연장 재가동이 주는 직접 영향은 이렇다.

첫째, 폐로시장 물량과 타이밍의 문제이다. 원래 시나리오는 2017년 고리1호기 영구정지, 2020년대 초반 폐로 본격 착수로 2020~2030년에 고리2~4호기, 월성1호기 등 설계수명 만료원전은 순차적 폐로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즉 고리1호기 해체 경험을 바탕으로 바로 고리2~4호기로 이어지는 ‘연속 물량’이 있어야 지역기업이 투자하고, 인력·기술이 끊기지 않고, 부산이 ‘국내 폐로산업의 메인 허브’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고리2호기 계속운전 승인으로 최소 10년, 더 길면 20년 이상 폐로 진입 시점이 뒤로 밀릴 가능성이 생겼고, 고리1호기 이후에 부산·경남권에서 곧바로 이어질 대형 폐로 프로젝트가 사실상 사라지는 상태가 된다. 폐로산업 입장에선 ‘시장 타이밍을 놓칠 위험’이 크다. 세계적으로 2050년까지 영구정지 대상 원전이 588기, 시장규모가 500조 원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그 사이에 고리2~4호기가 계속운전으로 빠지면 부산이 아닌 월성·영광이나 해외쪽이 실적을 가져갈 가능성이 커진다.

둘째, ‘운전 중심’ 기조와 폐로산업의 정체성 충돌이다. 부산시는 최근 ‘원자력산업 육성 조례’(2024)를 통해, SMR 산업, 원전 관련 부품·서비스, 해체·폐기물 처리를 한 묶음으로 ‘원자력산업’으로 밀고 있다. 고리2호기 수명연장 승인은 이 조례의 기조를 더더욱 ‘운전·증설 중심’으로 끌고 갈 가능성이 커졌다. 그렇게 되면, 안전한 폐쇄·해체·에너지전환을 중심 가치로 삼는 ‘폐로산업’의 정체성이 “운전 기간을 늘리다가 언젠가 해체도 하겠지” 정도의 부수 사업으로 축소될 위험이 있다. 결국 ‘부산=폐로산업 선도도시’가 아니라 ‘부산=노후원전 계속운전 도시 + 해체도 좀 하는 곳’으로 굳어질 수 있다.

폐로산업은 단순한 공사 시장이 아니라 로봇·원격 해체장비, 방사능 계측기술, 폐기물 처리·부지 재생, 방사선의학 등 다양한 분야를 포함하는 고부가가치 융합 산업이다. 부산은 동남권원자력의학원, 고리원전 인프라, 우수한 해양기술 기반을 보유하고 있어 충분한 경쟁력이 있다. 그러나 고리2호기 수명연장이 확정된다면 지역기업들이 폐로 기술에 투자하고 인력을 양성할 유인은 줄어든다. 부산이 세계 폐로산업의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더 큰 문제는 고리1호기 폐로조차 아직 지역 산업·대학·연구기관과 충분히 연계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리1호기가 국제적 레퍼런스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지역기업 참여 확대, 폐로 연구센터 구축, 시민 안전감시체계, 인력양성 프로그램 등 체계적인 전환 전략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기반이 단단히 구축되기 전에 고리2호기 연장이 이루어지면 고리1호기 폐로 경험은 부산의 미래산업으로 연결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부산은 고리1호기 폐로를 ‘에너지전환+폐로산업 클러스터’로 연결하는 데 상당히 실패한 상태이다. 기술·기업 연계라는 점에서 보면 고리1호기 해체 프로젝트의 핵심 사업자는 두산에너빌리티, HJ중공업, 한전KPS 등 대기업·중견 중심이고, 부산·기장 지역 중소기업 참여 비율, 지역 R&D 센터(부경대·부산대·동의대 등)의 직접 참여 비중은 아직 제한적이다. 인력·교육·연구 클러스터 차원에서 봐도 고리1호기 바로 곁에 동남권원자력의학원, 연구용 중입자가속기, 방사선응용 산업 벨트 등 좋은 인프라가 있지만, 이것이 ‘폐로 전문 인력 양성 + 해체기술 실증 + 사용후핵연료·폐기물 관리 연구’라는 일관된 폐로 클러스터 전략으로 묶이지 못한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리2호기마저 계속운전이 되면, ‘고리1호기 폐로→곧바로 고리2~4호기 폐로 →지역 클러스터 완성’이라는 시나리오는 약해지고, 고리1호기 해체 경험이 일회성 프로젝트로 끝날 위험이 커진다.

그렇다면, 고리2호기 수명연장이 폐로산업에 주는 구조적 신호는 뭘까?

그것은 폐로 시점의 지연, 산업의 ‘골든타임’ 상실 위험이다. 고리2~4호기의 폐로 진입이 늦어질수록 부산이 국내·해외 폐로 시장에서 레퍼런스를 쌓을 기회가 줄어든다. 운전·증설 위주의 원자력정책이 굳어질수록 폐로산업은 ‘부산의 주역’이 아니라 ‘부수적인 분야’로 밀릴 위험이 크다. 특히 SMR·원전 수출·가동 연장이 중심이 되면, 해체·폐기물·에너지전환은 항상 뒷순위가 될 것이다. 고리1호기와의 ‘산업적 연계’가 약한 상태에서 고리2호기 수명연장은 ‘폐로산업 방향성’을 더 모호하게 만든다. 시민 입장에서는 “부산이 앞으로 무엇을 먹고 살려고 하나? 계속 원전인가, 탈원전+폐로인가?”가 더 혼란스러워진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이 취할 수 있는 폐로산업의 전략은 뭐가 있을까? 고리2호기 계속운전이 결정됐다고 해서 폐로산업 카드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오히려 “이럴수록 더 의도적으로 폐로·안전·전환 축을 키워야 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고리1호기를 ‘전략 프로젝트’로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단순 공사 프로젝트가 아니라 ‘부산형 폐로기술 실증장+교육장+국제연수센터’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본다. 부산시·부울경이 ‘고리1호기 폐로 감시·참여 협의체’를 제도화해 지역 대학·시민단체·기업이 실제 데이터와 경험을 축적하도록 정책화할 필요가 있다.

둘째, 고리2~4호기 수명연장 조건에 ‘폐로산업 기여도’를 걸어야 한다. 만약 계속운전이 불가피하게 진행된다면, ‘폐로 산업 및 지역 전환 기여계획’을 수명연장 조건에 반드시 붙여야 할 것이다. 가령 고리1호기 해체공정에 지역기업·연구기관 참여를 의무화하거나 고리2~4호기 폐로를 전제로 한 사전 설계·기술 개발을 지금부터 시작하고, 사용후핵연료 건식저장·해체폐기물 처리시설을 지역 전환산업(연구·재료·로봇 등)과 묶는 사업 모델 개발이 절실하다.

셋째, ‘폐로산업=에너지전환산업’이라는 프레임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원전해체 공사 시장’이 아니라 ‘방사능 해체·재료·로봇·원격제어·방사선의학·부지 재생(재생에너지·해양생태 복원)’을 한 묶음으로 보는 ‘에너지전환 클러스터’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이때 고리2호기 수명연장은 “운전은 더 하지만, 그만큼 폐로 준비와 전환을 더 강화한다”라는 ‘조건부 수명연장 + 전환 플랜’으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고리2호기 수명연장은 당장의 전력은 늘리겠지만, 부산이 세계 폐로시장에 진입할 ‘골든타임’을 스스로 늦추는 결정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고리1호기 폐로와 고리2~4호기 수명연장이 따로 놀면, 부산은 ‘원전도시’로는 남되, ‘폐로산업 선도도시’로는 전환하지 못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설령 수명연장을 전제로 하더라도, 그 대가로 ‘폐로산업·에너지전환·지역산업 다각화’에 대한 구체적인 로드맵과 지역 참여권을 확보하는 일이다. 부산의 도시경영자는 최소한 이러한 ‘골든타임’을 놓치는 우를 범해선 안 될 것이다. 부산이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미래산업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폐로산업을 중심에 두고, 지역 경제·안전·전환 정책을 새롭게 재편해야 한다. 고리1호기 폐로야말로 부산의 미래를 바꿀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