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111) 갠지즈, 박형권
손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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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8 14:14 | 최종 수정 2023.12.12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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갠지즈
박형권
문을 열 때 한 처녀가 꽃 한 다발을 들고 난감해 있다
꽃 한 다발 어울리게 들이지 못하는 내 혈관으로
부끄러운 가난이 역류한다
너무 과분한 꽃을 두고 가는 처녀에게
나는 편지를 한다
장밋빛
장미에게 편지를 한다
다시 꽃필 수 없는 내 스무 살과 꽃피는 그녀의
스무 살 사이에
강이 흐른다
꽃보다 쌀을 가져올 걸 하고 눈물짓는 처녀와 쌀보다
꽃을 가져온 게 좋았다고 생각하는 나 사이에
갠지즈가 흐른다
그날
편지를 한다
지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다 실패한
한 발자국 앞의 연민에게
- 박형권 시집 《내 눈꺼풀에 소복한 먼지 쌓이리》을 읽었다. ‘걷는사람’ 2023.
시인의 시 앞에서 무릎 꺾는다. 텅 비어서 꽉 찬 허공처럼. 사랑이 너무 많아서 보이지 않는 마음처럼 질문 없이도 내 생의 허접과 자본의 욕심을 본다. 거미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가는 사이 허기진 꿈을 깜빡 놓을지도 모르겠다는 시인의 일갈에 바람의 방향은 언제 어떻게 바뀔지도 모른다는 것을 왜 놓치고 살았던 걸까. 누구에게나 닿을 저 편이 있듯이, 그러나 누구나 또 닿지 못할 그곳에 대하여 사색을 놓친 것 같아서 잠시 들숨은 횡격막을 붙든다. 시집 속에 들어있는 이 많은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손에 쥔 것이 없어도 참으로 당당하다. 피기 위해 지는 꽃처럼 꼭 다문 입술은 피처럼 붉다. 나는 수순처럼 문밖으로 쫓겨나서도 희망을 갖게 되는 이, 이상한 경험. 한 권의 시집을 읽으면서 울음이 달다. 시가 사람을 반성하게도 하는구나, 시와 시인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생각한다. 12월이니까.
◇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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